1910년대 토막집부터 하코방, 광주 대단지까지 무허가 건물과 철거의 역사
겨울 또는 새벽을 틈타 ‘행정대집행법’은 당신의 보금자리를 노릴 수 있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강제 철거의 역사는 곧 무허가 건물의 역사다. ‘근대적’인 무허가 건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대다. 이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 강점기에도 엄청나게 많은 무허가 건물이 있었다”고 말했다. 농촌에서 땅을 잃고 쫓겨난 농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도시로 향했고, 경성 외곽 지역에 몰려들어 ‘토막집’을 짓고 집단 생활을 시작했다.
토막민들은 강제 징용으로 사라져
토막집은 처음에는 땅을 파 토굴을 만들었기 때문에 토굴집이라고 불렸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지면을 조금만 파고 흙벽을 만든 뒤 그 위에 멍석·가마니·작은 목재 등으로 벽과 지붕을 만든 원시 주택으로 발전해갔다. 토막집은 홍제동·돈암동·아현동 등에 산발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해 1920~30년대를 거치며 수천 호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는 1942년 토막집에 대한 현황 조사를 벌였는데, 그 인구는 10월1일 현재 3만7천 명(7426호)이나 됐던 것으로 나타난다. 토막집이 강제 철거되기 시작한 것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이다. 일제는 실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토막집을 정리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교수는 1996년 펴낸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에서 “조선총독부와 경성부는 토막민들을 구슬러 속이거나 강제로 징집해 일본 홋카이도나 사할린 탄광으로 징용해갔다”고 적었다. 그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8·15 당시 전국 각 시·도에서 토막집과 토막민은 흔적도 없이 깨끗이 정리돼 있었다고 한다.
해방이 됐지만 도시 빈민들의 삶은 달라질 게 없었다. 일제의 강한 행정 통제가 없어진 틈을 타 서울 주변 구릉지들은 판잣집들로 뒤덮였다. 우리나라 공식 1호 ‘판자촌’은 지금의 서울 용산구 용산동2가를 형성하는 ‘해방촌’이다. 이때 무허가 건물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두꺼운 종이상자·목재·아연 철판 등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미군들의 야전식량인 레이션 박스가 주요 자재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코(상자·箱)라는 일본말에 방을 붙여 ‘하코방’이라고 불렸다. 지금도 철거민촌에 나가보면 ‘하코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노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950년대 청계천변을 따라 들어선 하코방들의 행렬을 찍은 사진을 보면, 지독했던 가난이 만들어낸 장관을 확인할 수 있다.
인구의 도시 집중과 더불어 무허가 건물촌도 빠른 속도로 확장됐지만, 정부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정부는 무허가 건물을 부수는 대신 정착지를 만들어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애초 계획 면적은 120만 평이었지만, 3만 평 정도를 개발하고 사업은 끝난다. 주변에 무허가 건물이 걷잡을 수 없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무허가 건물촌인 강북구 미아1~9동, 노원구 상계1~10동, 관악구 봉천본동, 봉천1~10동, 신림본동, 신림1~13동 등이 이때 생겨났다. 그 대부분은 이제 재개발 붐을 타고 초고층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도시빈민들, 경찰서를 습격하다
무허가 건물에 대한 대규모 철거가 시작된 것은 1966년 4월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부임하면서다. 1966년 당시 서울에는 13만6650동의 무허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이 숫자를 근거로 4만6650여 동은 ‘양성화’라는 이름으로 현지 개량하고, 나머지 9만 동은 시민아파트를 만들어 이주시키거나, 경기도 광주군에 대단지를 조성해 이주·정착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시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 철거민 10만5천 가구 50만~60만 명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대단지 사업지구(계획 면적 350만 평)에 옮기는 대규모 이주·정착 사업을 시작했다. 이른바 ‘광주 대단지’ 사업의 시작이었다. “광주에 가면 무허가 건물을 짓고 살 수 있고, 서울에서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말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2년이 못 돼 인구가 15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상·하수도 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쓰레기 같은 삶을 강요당했다. 결국 1971년 8월10일 종일 간헐적으로 내리던 비를 맞으며 성난 3만 명의 군중이 경찰서와 경기도 성남 출장소를 불태웠다. 1977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에 실린 윤흥길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그 아비규환에 대한 기억이다. 사람들은 흙탕물에 뒹구는 참외를 깨물어 먹어가며 경찰서를 습격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이 이 땅에서 노동의 권리를 일깨웠다면,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은 철거민들에게도 생존권이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철거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 첫 번째는 1954년 만들어진 행정대집행법에 의한 강제 철거였고, 두 번째는 민사소송법·민사집행법에 따른 명도 소송을 통한 집행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철거는 법원의 판결이 아닌 행정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이뤄져왔다. 그 과정에서 적준·다원산업 등 악명 높은 용역업체들이 명멸했다. 행정대집행법은 지난 52년 동안 한 글자도 바뀌지 않고 1950년에 행해진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2006년에도 철거민들의 집을 부수고 있다.
물밑에 잠복해 있던 철거민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떠오른 것은 1984년 목동 투쟁과, 1980년 초반 합동재개발을 통한 불량촌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합동재개발이란 주민들이 조합을 만들어 토지를 제공하고, 건설업체는 참여조합원으로 아파트를 지어 우선적으로 조합원에게 배정하고 나머지는 일반 분양하는 방식이다. 건설자본이 재개발 사업에 끼어들자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형성된 산동네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공무원들은 “철거민 대책을 세우라”는 말에 듣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돈의 논리로 움직이는 건설자본은 두려울 게 없었다. 재개발 조합은 비리 추문이 끊일 날이 없었고, 그 횡포에 저항하던 많은 철거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부터 철거운동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목동 투쟁 이후 ‘빈민의 벗’ 고 제정구 의원이 주도한 ‘천주교도시빈민사목회’(천도빈)가 만들어졌고,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기도빈) 등이 생겨났다. 지금은 익숙해진 ‘주거권’ ‘도시빈민운동’이라는 용어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학생운동과 철거민들의 연대가 시작됐다. 철거민들의 자생적인 조직이 생긴 것은 1987년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가 생겨나면서부터다. 그로부터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전국철거민협의회(전철협)·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합(주거연합) 등이 파생됐다.
7개월째 방치된 판교 철거민의 가재도구
투쟁은 희생을 뜻했다. 한국도시연구소가 1998년 11월 펴낸 <철거민이 본 철거>를 보면, 1986년 4월2일 이순복씨를 시작으로 1997년 7월25일 박순덕씨까지 철거운동으로 숨진 사람이 29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1986년 한 해에만 6명이 죽었다. 이순복(37·이하 사망 당시)씨는 그해 4월2일 암사동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다 알 수 없는 불이 나 타죽었고, 남성열(31)씨는 어용 세입자 단체 총무의 부정에 항의하다 그해 6월6일 숨진 채 발견됐고, 이치호(59)씨는 강제 철거 과정에서 지붕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최홍숙씨는 자살했고, 박정자씨는 철거와 천막 생활로 건강이 나빠져 숨졌다. 전철연 쪽은 그로부터 7년 동안 희생된 사람이 6명 더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오산에서 숨진 철거용역업체 직원 이진욱(23)씨까지 합치면 강제 철거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36명에 이른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거치고도 반인권적인 강제 철거 관행은 눈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악명 높은 겨울 철거와 새벽 철거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복음자리 마을이 철거된 것은 2004년 12월31일이다. 을지로 삼각·수하동에 철거 용역들이 난입한 것은 2004년 11월7일 새벽 4시였고, 지금으로부터 불과 다섯 달 전인 2005년 8월23일 한국토지공사는 새벽 4시에 용역업체 직원 400명을 투입해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판교 세입자들의 집을 부쉈다. 그들의 가재도구는 근처 공터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7개월째 방치돼 있다. 겨울이나 새벽에 사람이 잠들어 있는 집을 부수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반인권적 행동이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 모든 절차는 현장 출동한 경찰의 보호를 받는 ‘합법적인 법 집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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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 동안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개발 사업으로 갈등을 빚은 곳은 20여 곳이다. 한국도시연구소는 지난해 말부터 국가인권위원회의 용역(‘개발사업지역 세입자 등 주거빈곤층 주거권 보장 개선 방안을 위한 실태조사’)을 받아 2003년 10월27일 강제 철거가 이뤄진 영등포2동 쪽방부터 2005년 11월2일 철거가 있었던 판교 택지개발사업까지 20여 곳을 조사했다.
강제 철거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보고서는 “민간 개발은 예전과 큰 변화가 없지만, 2000년 이후 공공이 주체가 되는 사업에서는 강제 철거가 자제돼왔다”고 적었다. 그러나 2002년 3월21일 공공이 주체가 된 판교 개발사업의 경우 지난해 8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200여 채의 집을 강제로 부쉈다. 판교 주민들은 철거 지역 주변에 컨테이너와 천막을 쳐놓고 위태로운 삶의 끈을 잇고 있다.
철거 과정에서 주민과 철거 용역업체 사이의 싸움이 잇따랐고, 기물 파손도 많았다. 2004년 11월6일 서울 삼각·수하동 도시환경정비사업구역에서 철거된 박아무개(44)씨는 “철거 때 뺏긴 물건을 보관소에 찾으러 가보니 보관비가 몇백만원이나 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교복까지 뺏긴 박씨의 딸은 졸업식 때 사복을 입고 가야 했다. 철거 현장에는 수상한 불(광명소하택지개발 예정지구)이 많이 나고, “언제 철거가 이뤄지는지” 통보가 되지 않는 경우(상도5동 재개발 사업)도 있다. 농성투쟁이 시작되면 물과 전기를 끊어 주민들을 고립시키고, 겨울·장마철·밤·새벽 철거도 여전하다.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의 주거 여건은 이전보다 나빠진다. 세입자들에게 주거이전비(4인 가족 기준 700여만원)나 공공임대아파트 입주권이 주어지지만, 1천만원 안팎하는 보증금 마련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삼일아파트·용산5가동 도시환경정비사업 지구에서는 ‘임대아파트 쟁취’라는 투쟁 목표를 달성한 뒤에도 웃지 못했다. 그들은 “임대보증금을 마련해달라”며 새로운 투쟁을 시작해야 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과 한국도시연구소가 2004년 펴낸 <서울시 재개발지역 주민 연구>를 보면 “재개발 사업으로 이주가 불가피한 세입자들에게 정책적으로 재개발 임대아파트를 주고 있지만, 소중한 임대아파트를 받아놓고도 임대료와 관리비 부담 때문에 입주를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적고 있다. ‘난곡’으로 불리는 서울시 관악구 신림7동 산101 일대 재개발 지역의 경우, 전체 세입자 1713가구 가운데 임대아파트에 실제 입주한 경우는 34.6%인 594가구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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