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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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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원회, 강력하게 나선다

등록 2006-01-19 00:00 수정 2020-05-03 04:24

늦어도 2~3월께 강제철거 막기 위한 정책권고, 행정대집행법 대수술 불가피
겨울·새벽·악천후 때 집행 금지와 ‘임대료 차등부과제’로 전향적 계기 될 듯

▣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아마도 올해는 반세기 넘게 이어진 대한민국 철거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될 것 같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50여 년 동안 반성 없이 되풀이된 강제 철거에 구체적인 정책 권고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시연구소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한 ‘개발사업지역 세입자 등 주거빈곤층 주거권 보장 개선방안을 위한 실태조사’는 연구소가 인권위에 제안한 ‘강제 철거 관련 정책권고 내용’을 담고 있다. 인권위는 이 보고서를 뼈대로 강제 철거를 막기 위한 정책 권고안을 준비 중이다. 인권위 관계자는 “늦어도 2~3월께 강제 철거에 대한 인권위 권고안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가 제시한 제도 개선 방향의 뼈대는 크게 세 갈래다. 첫째, 개발사업지역에 사는 모든 거주민들에게는 적절한 주거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즉, 지금과 같은 강제 철거는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행정대집행이나 명도 소송 절차는 좀더 엄격해져야 한다. 셋째, 개발지역 안에 사는 모든 세입자들에게 공공임대주택에 우선 들어가 살 수 있는 권리와 그들에게 맞는 저렴한 주택을 마련해야 한다.

보고서의 개선안이 입법화되려면 주택법·행정대집행법·민사집행법·임대주택법 등 관련 법들의 개정이 불가피하다. 첫 번째 손질 대상은 주택법이다. 주택법은 개발지역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이주가 아닌 경우 적절한 주거대책을 만들고, 어쩔 수 없이 강제 퇴거가 이뤄질 때도 엄격한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법안에 명시하게 된다.

주택법·민사집행법·임대주택법도 손질

행정대집행법은 대수술이 불가피하다. 보고서는 행정대집행법 4조(대집행의 요건)에 “대집행이 이뤄지는 경우라도 주거로 사용하는 건축물을 철거할 때에는 퇴거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 대집행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할 것을 권고했다. 이 밖에도 주택을 철거할 때까지는 그 안에 사는 사람과 충분히 협상할 기회를 주고, 대집행을 할 때는 적절한 주거 대책을 마련하거나 임시주거 대책을 제공하고, 겨울·밤·새벽·악천후 등에는 대집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도 새로 포함됐다.

민사집행법은 39조·41조를 대대적으로 손봐야 한다. 주요 내용은 행정대집행법 개정안과 같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명도를 집행하더라도 사람이 사는 집을 부수는 것은 금지되고, 퇴거를 수행하는 집행관의 신분은 확실히 공개해야 하고, 강제로 쫓겨나는 사람에게는 임시이주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보고서는 임대주택법에 대해서도 “임대보증금이나 임대료를 마련하기 힘든 도시 빈민들을 위해 손질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임대료 차등부과제다.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 임대아파트 거주민들은 연체료가 밀리기 일쑤다. 대한주택공사나 서울SH공사 등에서는 임대료를 3~6개월 이상 밀리면 주민들을 임대아파트에서 쫓아낸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2004년 펴낸 <공공임대주택 임대료 및 공급체계 개선 방안>에서 “소득을 10등급으로 나눠, 최하위 등급은 영구임대 아파트 수준(4만~10만원)의 저렴한 임대료를 부과하고 그 위 등급부터는 공공임대 아파트 수준의 임대료(10만~20만원)에서 최대 130%까지 할증률을 적용하는 게 좋다”는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입주자의 수입이 늘어나면 임대료를 시장 가격에 가깝에 부과할 수 있고, 실직 등으로 소득이 없어지면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강제 철거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저렴한 주택을 많이 만드는 쪽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도 개선안이 입법화되면, 철거단체의 폭력성을 걱정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의 시름도 크게 덜 수 있을 것이다. 폭력 투쟁의 대명사가 돼버린 전국철거민연합의 투쟁 목표는 철거민들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영구 임대주택 수준의 싼 집과, 그 집이 완공될 때까지 들어가 살 수 있는 가이주단지 제공이다. 인권위의 권고가 입법화되면 1994년 결성된 전철연은 투쟁 목표를 달성해 발전적으로 해체할 수 있게 된다. 박찬운 인권위 인권정책본부장은 “인권위는 강제 철거를 중점 과제로 놓고 개선 방안을 찾고 있다”며 “검토 절차를 거쳐 조만간 좋은 대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칠준 변호사는 “인권위의 권고가 하루빨리 입법화돼 가난한 철거민들이 이제 그만 삶의 짐을 덜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겨레21>도 겨울밤 거리에서 풍찬노숙하는 가난한 철거민들이 이제 그만 삶의 짐을 덜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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