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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팔아 세웠네, 자랑스런 충무공!

등록 2006-01-11 00:00 수정 2020-05-03 04:24

1960년대부터 학교·도로·공원에서 떨고 있는 이순신·세종대왕·을지문덕 동상의 역사…이승복 동상은 정확한 기록도 없어… 수준 이하의 졸작들은 박정희 때 철거되기도

▣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소설가 김훈은 2004년 펴낸 <자전거 여행> 둘쨋권에서 “자전거로 지방도로를 달릴 때 초등학교 운동장은 좋은 휴식처가 된다”고 적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한가운데 연단이 있고, 그 옆으로 반공소년 이승복,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 같은 인물상이 늘어서 있다. 동상은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한푼두푼 모아 세워졌다. <조선일보>는 1969년 5월30일치 3면에서 ‘깡통 등 폐품 팔아 두 달 만에 기금을 만들어 충무공 동상을 세운’ 서울 충무국민학교 어린이들의 사연을 작은 쪽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아이들이 돈을 모아 존경할 만한 위인의 동상을 세우는 것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충무공께서는 국가 예산을 갖고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라 자급자족해서 군대를 키웠다”며 “너희도 스스로의 힘으로 (동상 건립 비용을) 마련하라”고 등을 떠미는 교장 선생님의 훈시에 이르러서는 그때 우리 학교가 어린아이들에게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장은 말했지, 동상을 세워라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그의 오랜 친구 김훈에게 “그때 이승복 상을 건립하는 것이 의무사항은 아니었지만, 안 만들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자발적으로 만든 것인지 강제로 만든 것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사회 전체가 군대 조직과도 같았던 그 시절의 학교는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한겨레21>이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아본 ‘선현 동상 및 영정 실태조사 결과 처리계획’(1973년 10월 문화공보부)을 보면 전국 곳곳에 352개의 선현 동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충무공의 동상이 압도적 다수인 274개, 세종대왕이 41개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선현’도 아닌데 전국 초등학교 앞마당에 불려나와 수십 년째 벌벌 떨고 있는 이승복 동상에 대해서는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개수를 확인할 수 없다. 문공부에서는 1983년에 같은 조사를 한번 더 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두번째 조사 결과는 문서목록에서 찾을 수 없었다. 유신의 칼바람 속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초등학교 앞마당에 세워졌는지 후세 사람들은 그저 상상해볼 뿐이다.

196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는 동상 제작 열풍에 휘말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열풍은 1966년에 만들어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조상건립위원회)에서 시작된다. 1960~1970년대 박 정권의 통치 이념은 반공과 부국강병으로 대변되는 국가주의, 조국 근대화였다. 1965년 한-일회담으로 박 대통령은 이승만 정권의 국시였던 반일 외교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경영하기 위해 만든 괴뢰 정부인 만주국 보병 8사단 중위 다카키 마사오로 해방을 맞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친일파라는 혐의를 두고 있었고,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현실을 개조하거나(조국 근대화) 과거로 회귀(선열 숭앙사업)하는 것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홀로 수십만의 일본 해군을 맞아 ‘23전 23승’을 거둔 충무공을 불러내 부족한 자신의 정통성을 메울 분신으로 삼고 싶어했다. 박 대통령은 1706년에 세워져 초라하게 방치돼 있던 현충사를 새로 단장했고, 금산 7백의총·강화도 유적·전국 주요 성곽 등 호국 유적들을 보수했으며, 윤봉길·유관순 등 항일 인사들의 기념관 건립을 지원했다.

그 시절에 조상건립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역사의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열들의 애국충절을 오늘에 되새기며 내일의 조국을 조망하기 위한” 위원회는 1966년 8월11일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출범했다. 위원회의 창립을 주도한 것은 <서울신문>이었다. 서울신문사가 창사 50년을 기념해 1995년에 펴낸 <서울신문 50년사>를 보면 “당시 장태화 사장은 이 사업(동상 건립 사업)에 오래전부터 뜻을 두고 있었는데, 제1회 5·16 민족상 산업부분 장려상 수상자 이한상이 상금 50만원을 본사에 기탁함으로써 사업이 구체적인 입안 단계로 들어서게 됐다”고 적고 있다.

조상건립위원회의 초대 총재엔 박 대통령의 뒤를 이은 ‘2인자’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 부총재에는 <서울신문> 사장 장태화씨가 취임한다. 위원장은 장동운 주택공사 총재, 상임위원은 정성호 <서울신문> 상무였고, △전문 △기획 △재정 △건립 △선전 등 5개 산하 분과에 20여 명의 위원을 선임했다. 이렇게 모인 위원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떤 인물의 동상을 만들 것인지였다. 1966년 11월2일 건립대상 인물을 뽑기 위해 학계·문화계·관계·교육계·실업계 인사 127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해 78명의 회신을 받았다. 이렇게 뽑힌 1차 건립대상은 이순신·세종대왕·을지문덕·사명대사·김유신·강감찬·계백·광개토대왕·김춘추·윤관 등 10명이었다.

박정희, 작업실 들르고 제작 대금도 희사

동상을 만들기로 한 뒤에 처음 부딪힌 문제는 제조 방법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주조된 동상이 없었다. 위원회는 해외 공관을 통해 외국 동상 사진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부산을 떨다 못해 1968년 9월에는 주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실무위원 김경승, 상임감사 한교택, 주조 기술자 4명을 일본 조각계로 2달 동안 견학을 보냈다.(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경승은 80년대 이후 일제시대에 맹렬히 친일 활동을 한 전력이 드러나, 재평가 작업이 진행 중이다.)

우여곡절 끝에 위원회는 1966년 11월2일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천거를 받은 이순신 장군·세종대왕·사명대사 동상을 발주했다. 첫 제작품은 김세중 서울대 교수가 제작한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었다. 윤범모 당시 <계간미술> 기자(경원대 교수)는 1980년 봄호에 쓴 ‘기념조각, 그 문제성의 안팎’에서 “충무공 동상을 가장 먼저 건립하기로 한 것은 당시 박 대통령의 뜻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박 대통령은 김 교수의 작업실에 2번이나 직접 들러 동상 제작 과정을 주의깊게 관찰했고, 공사 대금 983만원을 직접 ‘희사’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 동상의 제막식은 1968년 4월27일에 열렸다. 그후로 오랫동안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끊임없이 이어진 철거·이전 논란을 이겨내고 서울 도심 최고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위원회의 2호 작품은 대한문을 지나 처음 마주하는 덕수궁 안뜰에 자리한 세종대왕 동상이다. 그 비용을 떠안은 것은 당시 위원회 총재인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었다. 나머지 13개 동상은 당대 유명 기업주들이 갹출해 부담했다. 기업주들이 어떤 마음으로 돈을 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울신문 50년사>는 “선뜻 성금을 내놓는 기업주들도 많았으나. 때로는 힘겹게 교섭해서 성금을 얻어내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은 정몽주, 럭키화학의 구자경 회장은 이퇴계, 조중훈 한진상사 사장은 원효대사를 위해 돈을 냈다(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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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렇게 제작된 동상들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작가들은 서로 작품을 따내기 위해 ‘동상파 작가’라는 비아냥을 이겨내며 암투를 벌였고, 이순신 장군상은 잘못된 고증으로 제작 직후부터 철거 논란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문제로 지적된 것은 제작 기간이었다. 정몽주·이퇴계·정약용은 겨우 2달, 김유신·원효대사·을지문덕·이율곡은 3~4개월 만에 날림으로 만들어졌다.

동상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정몽주 동상은 양화대교 북단 강변북로 방향 램프에 숨바꼭질하듯 숨겨져 있고, 이황·정약용 동상 등은 남산공원에 몰려 있다. 애초 서울시청 앞과 남대문 앞 녹지대에 각각 세워진 김유신 동상과 유관순 동상은 지하철 1호선 건설공사 탓에 설치된 지 채 1~2년이 못 돼 장충단공원(유관순)과 힐튼호텔 옆 남산공원(김유신)으로 옮겨졌다. 을지문덕도 양화대교 양평동 쪽 녹지에서 어린이대공원 후문 옆으로 밀려났다. 그렇지만 후손들 덕에 제일 고생하고 계신 분은 누가 뭐래도 세종대왕이다. 대왕은 살아 생전에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덕수궁 안에서 수십 년 동안 인자한 눈빛으로 방문객들을 굽어보고 있다.

위원회의 동상 제작은 날림으로 이뤄졌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이후 전국의 학교·공원·공터는 동상의 천국이 됐다. 수준 이하의 졸작들이 전국 초등학교 교정을 가득 메웠고, 이는 부메랑이 되어 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

<한겨레21>이 국가정보원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얻은 ‘선현 영정 동상조사위원회’의 결과 보고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4월28일 “충무공 영정 및 동상을 통일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한 달 뒤쯤 ‘선현에 대한 동상 및 영정 제정에 관한 국무총리 지시’(6호)로 이어졌고, 문화공보부는 그해 6월25일부터 7월25일까지 한 달 동안 전국 선현들의 영정·동상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였다.

이승복까지 낀 초등학교 단골3인방

조사 결과 확인된 선현들의 동상은 32종 352개였다. 대부분이 이순신(274개)의 동상이었고, 세종대왕(41개) 동상도 더러 있었다. 352기 가운데 322기가 학교에, 나머지가 도로·공원에 세워졌다. 보고서는 “작품은 전문적인 미술 수업을 받지 못한 비전문가들이 20만원 정도의 적은 제작비로 시멘트를 사용해 날림으로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문공부는 결국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들을 대거 철거하기에 이른다. 전수조사 결과 표준 영정과 같고 조잡하지 않은 39개는 A급으로 표시해 그대로 보존하고, 고증에는 맞지 않지만 조잡하지 않은 B급 209기는 감독기관의 판단에 따라 처리하며, C급 104개는 철거하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서 C급을 받은 이순신의 동상은 답십리국민학교·신설국민학교·남대문국민학교·서울고등학교 등 34곳이다.

소설가 김훈은 “시멘트는 조형물의 심층이나 음영을 표시할 수 없어, 이승복의 표정은 발생 과정의 태아처럼 모호하고 멀어 보인다”고 적었다. 이승복만이 아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의 표정도 모호하고 먼 표정으로 수십 년째 초등학교 교정을 지키고 있다. <한겨레21>이 찾은 경기도 의왕 덕장초등학교 조회대 옆에는 초등학교 동상의 ‘단골 3인방’인 세종대왕·이순신·이승복이 오래된 친구처럼 나란히 겨울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동상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이 “아주 멋없게 생겼다”며 웃고 떠들다 집으로 돌아갔다.



장군님, 왜 거기 계세요?

“충무공은 충무로, 을지문덕은 을지로, 세종대왕은 세종로에 있어야”

전우용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사연구실 연구원은 지난해 9월 <서울학연구>에 발표한 ‘서울의 기념인물과 장소의 역사성’에서 “서울의 공공용지에 ‘공공부지 조형물’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동상은 모두 41개”라고 적었다. 전 연구원은 “그렇지만 정치권력은 아무런 객관적 기준도 없이 동상을 만들 인물을 자의로 정했고, 아무 곳에나 편한 대로 동상을 세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말 없는 동상은 그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그곳에 서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충무공 이순신은 충무로가 아닌 세종로에 서 있다. 충무로는 일제 때 일본인들의 본거지였고, 그 이름은 혼마치(本町)였다. 1946년 ‘가로명제정위원회’는 혼마치에서 일본의 기를 누르기 위해 거리 이름을 ‘충무로’라고 붙였다. 구한말 청나라의 근거지였던 을지로에는 수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그랬으면 세종로에는 세종대왕을, 충무공 동상은 충무로에, 을지문덕 동상은 을지로에 모셨으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애초에는 그럴 계획이었지만, 박 대통령의 일방적인 지시로 계획이 바뀌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이런 경향이 바뀌고 있다. 1996년에 세워진 횡보 염상섭 동상은 종묘공원 벤치 위에 친근하게 앉아 있어 다가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높은 좌대 위에 위압적으로 서 있는 다른 동상과 달리 의열단 단원 김상옥 동상도 마로니에공원 한쪽에 자연스럽게 서 있다. 전우용 연구원은 “이제 동상은 더 이상 권위주의 시대의 ‘동원기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동상 조영 대상이나 건립 장소를 정할 때 시민들의 참여와 동의를 구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순신은 항복한 장수?

고증 잘못으로 세종로 동상 새로 제작할 뻔했다가 10·26으로 무산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첫 번째 작품인 광화문 ‘충무공 동상’은 건설 직후부터 “고증이 잘못됐다”며 철거 논란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재건립 문제가 본격적인 이슈로 떠오른 것은 1977년에 들어서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여론을 모아, 문화공보부가 동상의 정확성 여부를 심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고증을 둘러싼 논란은 크게 5가지였다. 첫째, 오른손에 잡고 있는 칼집 때문에 항복한 장수나 왼손잡이로 오해될 수 있다. 둘째, 얼굴 모습이 월전 장우성의 현충사 표준영정과 다르다. 셋째, 갑옷이 장군의 모습으로는 어색하다. 넷째, 동상 앞의 거북선이 너무 작다. 다섯째, 동상 옆의 북이 누워 있어 용감하게 싸우는 분위기가 묘사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충무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예술품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고, 별걸 다 가지고 트집이다”는 느낌이지만, “충무공 동상을 표준화하라”는 ‘각하’의 말 한마디에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던 당시 공무원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서울시는 문공부 선현동상 심의위원회에 동상 철거 여부를 질의했고, 위원회 쪽에서는 “재건립하라”는 결론을 냈다.
문화계의 반발과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데 쓸데없이 세금을 낭비한다”는 시민의 비난을 무릅쓰고 사업은 강행됐다. 1980년 서울시 예산에 동상 재건립비 2억3천만원이 배정됐다. 김찬회 당시 서울시 제1부시장을 위원장으로 한 ‘충무공 동상 재건립위원회’가 발족되고 모형까지 제작됐지만, 사업은 중단된다. 10·26이 터지고, ‘각하’가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24년이 지나 충무공 동상 이전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이번에는 서울을 ‘걷고 싶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세종로 보도폭을 넓히려면 중앙 분리대를 없애야 했다. 2004년 2월 이종상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공사를 위해 충무공 동상을 옮기겠다”고 밝혔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두 달 만에 계획을 백지화했다. 서울시의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시민 87.2%가 “이전 반대”를 외쳤다. 미우나 고우나 동상은 어느새 우리 현대사의 일부가 됐다. 이제 충무공이 없는 세종로는 상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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