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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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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등록 2005-12-28 00:00 수정 2020-05-02 04:24

포크가수 김광석 10주기, 주름가득 웃음짓던 시대의 절창을 그리워하다
유족간 갈등과 대중문화의 끝없는 차용에 소탈한 그 모습 사라져가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 안에 가득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 없이 흐르는 이슬 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김광석이 만들고 부른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를 잊기 위해 그의 목소리를 빌린 밤이 있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잊으려 돌아누운 나를 위로했다. 잊어야 한다고. 그의 위로가 없었다면, 우리는 불면의 밤을 통과했을까.

그가 그리워 그의 목소리를 빌린 밤도 있었다. 나지막한 노래는 자신에게 보내는 만가로 들렸다.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글썽이는 모습이 보였다. 글썽이는 것이 그인지, 나인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되뇌었지만, 어제보다 커진 그리움만 남았다. 긴긴 밤을 잊지 못해 새웠다. 그리고 남은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마음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10년이 더 지나면, 그를 지울 수 있을까. 김/광/석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2005년 12월16일(음력 11월15일) 서울 창천동 안양암에서는 고 김광석씨를 추모하는 10번째 기제가 쓸쓸하게 열렸다. 형 김광복씨는 “요즘 시끄럽고 그래서” 고인의 친구와 팬들에게 해마다 돌리던 연락을 따로 하지 않았다. 몇 년새 손님이 부쩍 줄어, 양력 1월6일에도 따로 찾는 사람이 많진 않을 듯하다. 영정사진 속 고인은 썰렁한 전당을 둘러보며 사람으로 꽉 메워졌던 학전소극장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양암의 영정사진, 쓸쓸하다…

퍼그같이 주름웃음을 짓고 인생을 나지막이 읊조리던 가수 김광석. 그는 살아서도 포크의 신화였지만 사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신화’다. 잊을 만하면 영화에서, 텔레비전에서, 노래방에서 흘러나온다. 문화적·사회적 감수성이 이질적인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아우르는 우리들의 ‘공통분모’를 자처한다. 또한 갑작스러웠던 죽음은 ‘불완전성’을 완성시켰고, 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화석의 권위를 얻었다. 산울림과 들국화가 시대를 풍미했고, 이문세와 이승철이 애절한 절창을 보여도, 대중문화는 유독 김광석을 자주 찾는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에 유달리 관대해지기 때문일까. 사람들을 노래로 마취시킬 줄 몰랐던 그는 이런 모습이 고마울까, 버거울까.

후배 가수들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의 이름을 애써 부른다. 가수 싸이, 이소은, JK김동욱, 김경호의 공통점은 김광석의 노래를 리메이크했다는 사실뿐인지도 모른다. 성시경은 종종 “35살 땐 김광석처럼 소극장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테이는 “김광석의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고 소망한다. 경력 많은 유리상자도, 신인 그룹 버즈도 입을 모아 “김광석처럼 1천 회 공연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김광석, 그는 가수들에게 ‘가창력’과 ‘라이브’의 선언문이다.

드라마, 영화, 뮤지컬에서 그는 청춘과 회한을 상징하는 소도구로 변신한다. 노래의 리얼리티가 배경음악에 인용되면 애틋함은 고조됐다. 시트콤 <세 친구>(2000), 드라마 <삼총사>(2002), 영화 <클래식>(2003),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4), 뮤지컬 <달고나>(2005). 매년 어디선가 노래는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무턱대고 감정이입을 했다. 소설가 윤대녕도 시인 이동재도 나지막이 그를 불러 행간에 이름을 새겼다. 그는 ‘표상’이었다. 영화감독 허진호는 맑은 웃음을 띤 김광석의 영정사진을 보고 ‘죽음을 앞둔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줄거리를 떠올렸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89)는 그렇게 해서 나왔다. 배경음악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김광석은 누군가들에게 ‘내러티브’의 제공자가 되기 시작했다.

‘김광석 내러티브’는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직접적으로 표출되면서 거대한 붐을 일으켰다. 인민군 오경휘 중사(송강호)가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라고 말한 순간, 남북의 병사와 관객들은 다같이 몰래 잔을 부딪쳤다. 1996년이래 가장 뜨거웠던 회고 열풍은 이듬해 2001년 김광석 음반 2장을 발매시키기에 이른다.

청춘과 회한을 상징하는 소도구로 소비

그러나 간헐적으로 이뤄진 추모 움직임들은 점차 사라지고 초기에 거론되던 장학사업도 소식이 없다. 1996년 2월, 49재 때 김광석 추모사업회(회장 김민기)가 첫 추모 공연을 연 뒤 1999년 1월 서울 학전에서 열흘간 포크축제를 개최해 좋은 반응을 얻고, 2001년 1월엔 ‘JSA 효과’에 힘입어 추모 음반 <김광석 앤솔로지 1> 발매 공연을 했지만 이젠 동료가수들이 자신의 콘서트에서 간간이 친구의 노래를 부르는 정도다. 1999년 윤도현, 서우영, 이정열, 엄태환이 한시적으로 결성한 김광석 프로젝트 밴드도 영화 <산책>(2000) O.S.T 작업에 한 차례 참여한 게 눈에 띌 뿐이다. 이에 비해, 1989년부터 16차례 열린 유재하 가요제는 추모제를 겸하면서 조규찬(1회), 유희열(4회) ‘재주소년’ 박경환(14)을 배출했다(올해는 은행에 예치된 운영자금의 원금 잠식으로 개최 못함).

그를 기리는 건 팬들이다. 1995년, 김광석과 어울려 나우누리 통신동호회에서 활동했다가 이후 웹으로 옮긴 팬클럽 ‘둥근소리’(http://www.oneum.net)는 1996년부터 매해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1995년 회원들의 연습을 지켜본 김광석은 “나도 게스트로 꼭 나갈게”라고 약속하며 “수익금은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쓰자”고 제안했지만 갑자기 그들의 곁을 떠났고, 단순했던 동호인 행사는 추모 음악회로 변했다. 동물원, 박학기, 권진원 등 동료 가수들이 잊지 않고 게스트로 참여하는 이 음악회는 2006년 2월에도 열릴 예정이다. “형의 10주기라고 특별한 건 없습니다. 매년 하던 대로 하려고요.” 소리지기 이승우씨나 다른 회원 모두 여전히 그를 “형”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의 그림자가 희미해진 이유는 죽음의 원인이 부른 유족 간의 갈등과 저작권 분쟁에서 찾을 수 있다. 김광석씨 부모와 부인 서해순씨는 1996년 죽음 직후 저작권을 놓고 다툼을 하다가 6월 합의에 이른다. 그해 여름 딸 서연(14)이를 데리고 출국한 서해순씨는 미국, 캐나다에 거주하다가 2002년 6월 귀국해 음반기획사 ‘위드33’을 차렸으며, 딸 서연이는 성장장애증후군으로 인해 현재 미국 버지니아에 머물며 학교에 다닌다. 사후 음반들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저작권 분쟁이 일어났고, 2004년 10월8일 아버지 김수영씨가 폐암으로 사망하면서 ‘김수영씨 사후엔 판권을 손녀에게 양도한다’는 1996년 합의 조항이 효력을 보이면서 분쟁은 2라운드로 들어갔다. 분쟁의 씨앗은 1993년 김광석씨가 킹레코드(현 신나라레코드)와 계약할 때 아버지 김수영씨가 대리인이 되어 계약서에 사인을 한 데 있다(상자기사 참조).

나오지 못한 “아저씨”의 5집이 아쉽다

부친 김수영씨와 둥근소리 회원은 2003년 1월5일 <시사매거진 2580>에서 사인에 의문을 제기했다. 친구 박학기는 이미 1988년 6집 음반 <남겨진 너의 노래(광석에게)>에서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다면 꿈속에서라도 말해줘/ 너 떠나던 밤 가려진 모든 진실을”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96년 사건 당시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드나들며 사인에 의구심을 품게 됐다는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는 2005년 12월22일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며 “다만 명예훼손 등의 문제로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수사당국이 의지를 가지고 당시 자료를 검토하면 의문점을 찾아낼 것이며, 그 지점에서부터 누가 왜 죽였을까를 재수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건 당시 경찰은 긴급수사반을 편성했고, 부검도 했지만 의문점은 없었다.

2006년 달력을 펼쳐도 팬들이 가공이 덜 된 김광석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을 듯하다. 새로 발굴된 1992년 미 워싱턴대 라이브 실황은 접근성이 낮은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에서 선보인다. 연초 계획된 뮤지컬 <서른 즈음에>(가제)의 공연도 불투명하다. 다만 “서울 대학로에 노래비를 세우고 싶다”는 둥근소리의 작은 음악회가 유일한 제례가 될 듯하다. 생전에 발매된 음반과 사후에 발견된 미발표곡, 공연 실황 등을 들으며 팬들은 마음을 달래야 할 듯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 연말 ‘송년회, 이런 노래는 참아주세요’라는 보고서에서 분위기를 ‘다운’시키는 위험한 10곡에 주병선의 <칠갑산>, 조용필의 <한오백년> 등과 함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를 포함시켰다. 그만큼 우린 여전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김광석을 노래한다.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이 중심을 잃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던 김광석. 변하지 않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조금씩 변해간다. 나오지 못한 “아저씨”의 5집을 아쉬워하면서.



그가 남긴 노래, 다시 불러요

[김광석의 음악과 생애]

3집으로 ‘포크’ 이정표… <다시 부르기 1·2>는 가요사의 명반

1964년 1월22일 대구시 대봉동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김광석이 살아 있다면 올해로 만 41살이다. 그는 서울 경희중학교 현악반, 대광고등학교 합창단, 명지대 경영학과 입학 뒤 가입한 연합동아리 ‘메아리’에서 차근차근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1984년 뮤지컬 <개똥이> 음반에 참여하면서 지인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내고, 1985년 군대에 간 뒤 군에서 사망한 큰형으로 인해 6개월 복무를 끝내고 제대한다. 1987년엔 ‘회색분자’ 친구들이 모여 동물원을 만들어 1집을 내고 의외의 반향을 얻는데, 프로가 되고 싶었던 그는 탈퇴 뒤 1989년 1집을 낸다.
그의 음악적 여로는 생전에 발매된 음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투박한 강건함, 애달픈 낭만성에 포크의 색깔이 입혀져 음악은 성숙해졌다. 그의 뒤에는 학전의 김민기와 음악감독 조동익이라는 걸출한 두 음악인이 있었다. 1995년 8월 소극장 1천 회 공연을 마친 그는 다음 겨울인 1996년 1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사후에는 미발표곡과 실황녹음분을 중심으로 베스트 음반이 출시됐고,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추모 음반이 나오기도 했다.



△ 1989: 1집(서울음반) 동물원 스타일의 연장으로 <너에게> <내 마음의 문을 열어줘> <기다려줘> 등 수록. 10곡 중 6곡이 자작곡으로 싱어송 라이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 1991: 2집(문화레코드) 한동준 작사·작곡의 <사랑했지만>이 대히트를 쳤다. 문대현의 <꽃>,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 다른 작곡가들의 곡이 대부분이며 발라드 느낌이 강하다.
△ 1992: 3집(서울음반) 포크의 색깔이 드러난다. <나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 조동익밴드의 담백한 세션이 가미돼 완성도가 높아졌다.
△ 1993: <다시 부르기 1>(킹레코드) 노찾사 시절부터 3집까지의 곡들을 추려낸 베스트 음반. “해석판이 원판을 능가하는 희귀한 예.”(음악평론가 박준흠) <광야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이등병의 편지>는 1990년 <겨레의 노래 1>(감독 김민기·제작 한겨레신문사)에서 전인권 버전을 듣고 군에서 죽은 큰형을 떠올린 뒤 여기 수록했다.
△ 1994: 4집(킹레코드) “만족스런 앨범”이라고 자평했다. 마흔에 오토바이로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꿈을 녹인 <바람이 불어오는 곳> 외에 <일어나> <서른 즈음에> <자유롭게> 등 수록.
△ 1995: <다시 부르기 2>(킹레코드) 한국 모던 포크의 대표곡들을 ‘김광석’식으로 부른 명반. 한대수의 <바람과 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 김창기의 <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 속의 친구>, 한동헌의 <나의 노래> 등 수록.

△ 1996: <노래 이야기>(삼성뮤직), <인생 이야기>(삼성뮤직) ‘학전’ 공연 중 92~95년과 95년분을 중심으로 담아낸 편집 실황 음반.
△ 1996: <가객 - 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문화뮤직) 추모 음반. 김광석, 권진원, 송숙환, 안치환, 노래마을, 류금신, 김영남, 박학기, 김현성, 이정열, 윤도현 등이 김광석의 노래를 부른다. 미발표곡 <부치지 않은 편지 #1, 2> 수록.
△ 1998: <김광석 1+2>(록레코드) 김광석 1·2집과 동물원 시절 노래를 추려서 수록.
△ 2001: <김광석 Anthology 1>(서울음반) 생전의 김광석 목소리에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를 덧입힌 색다른 추모 음반. 고 김광석과 가수들이 함께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박학기, 권진원, 김건모, 윤종신 등 참여.
△ 2001: <5TH CLASSIC>(서울음반) 김광석의 목소리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입혀 웅장한 느낌을 낸다.
△ 2002: <김광석 Live>(스타맥스) DVD 음반. 생전의 KMTV 슈퍼콘서트 실황과 8mm 테이프 공연 실황이 있다. 5.1채널이 아닌 PCM 스테레오.
△ 2002: (EMI) 베스트, 라이브, 미발표곡을 모은 세 장의 CD와 영상이 담긴 한 장의 DVD로 구성된 음반. 음질을 다시 손봤다.
△ 2005: <김광석 Best>(EMI) 최근 출시된 베스트 음반. 3·4집과 <다시 부르기 1·2>에서 대표곡들을 추렸다.




‘멀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김광석 사후 발매 음반을 둘러싼 유족 간의 저작권 분쟁

1993년 (주)킹레코드(현 신나라레코드)와 5억원 선지급 계약을 맺을 때,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건 김광석이 아니라 아버지 김수영씨였다. 김광석의 부인 서해순씨는 “29살이라 세금 문제가 걸려서였다”고 말하고, 형 김광복씨는 “이혼을 염두에 두고 조치한 것”이라 말한다. 1996년 1월 김광석이 죽은 뒤 신나라레코드가 계약서에 따라 로열티를 아버지에게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분쟁이 복잡해졌다.
1996년 4월17일 부인 서해순씨는 (주)킹레코드와 시아버지 김씨를 상대로 저작권사용료 청구권확인소송을 제기했고 양쪽은 6월 합의를 했다. 시아버지가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 대한 저작 인접권을 가지고, 부인 쪽은 이후의 라이브 음반에 권리를 행사하기로 했다. 이 합의엔 시아버지 김수영씨가 사망 뒤에 손녀 서연씨에게 권리를 양도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그 뒤 나온 음반 중 라이브 음반 <노래 이야기>(1996), <인생 이야기>(1996), <김광석 Live>(2002) DVD는 별 문제가 없다. 동물원 시절과 1집, 2집의 노래가 담긴 <김광석 1+2>(1998)도 유족과 무관한 조아무개씨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 <가객 - 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1996)는 동료 가수가 임의로 제작했으나 분쟁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2001년에 나온 <김광석 앤솔로지 1> <5TH CLASSIC>과 2002년에 나온 에 대해선 양쪽의 의견이 엇갈린다. 11월2일 서울 중앙지법 형사단독14부(부장판사 김진동)는 서해순씨가 제작한 음반에 대해 김수영씨측이 제기한 저작권 침해를 인정했다. 서씨가 임의로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서 노래를 뽑아썼다는 뜻이다. 서씨는 항소의 뜻을 밝힌 상태다.
<김광석 앤솔로지 1> <5TH CLASSIC>은 조금 더 복잡하다. 서해순씨가 자신이 애초 가지고 있던 ‘멀티(Multi) 테이프’(마스터링하기 전의 원본 상태로 노래 따로, 반주 따로 녹음된 테이프)에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걸린다. 서씨는 한 기획자와 계약을 맺고 멀티 테이프 안의 목소리 음원을 내줬다. 그 음원에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와 오케스트라 반주 등이 덧입혀져 두 개의 음반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음반엔 시아버지가 권리를 소유하고 있던 음반에 수록된 곡과 동일한 노래들이 있었다. 시아버지 측은 소송을 제기했다. 형 김광복씨에 따르면 “서해순씨는 ‘실제 음반에 수록된 목소리와 다른 트랙을 가져다 썼다’고 주장하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수는 보통 한 곡을 여러 번 녹음해 이 중 제일 잘 부른 걸 음반에 수록한다.
법무법인 한결 조광희 변호사는 “작사·작곡자가 가지는 저작권과 달리 ‘가창’이란 연주 형태를 지니는 저작인접권에선 노래할 때마다 제각기 달리 권리를 적용시킬 수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1996년 합의사항에서 말한 아버지의 권리는 세부조항이 없는 한 음반에 미수록된 연습용 트랙들도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게 타당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2004년 10월8일 김수영씨가 사망하면서 저작권 분쟁은 추가됐다. 1996년 합의 조항에 따라 손녀로 권한을 양도해야 하는데 김광석의 모친과 형은 1996년 합의한 바로 직후 김수영씨가 사후 권리를 자신들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을 유서에 담아 공증을 거쳤다며 양도 거부의 뜻을 소송에서 밝혔다. 그러나 12월7일 서울중앙지법은 서해순씨의 손을 들어줬고, 최근 서해순씨가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서 히트곡을 모아 발매한 <김광석 Best>는 적법성을 인정받게 됐다. 항소 여부에 대해 형 김광복씨는 “재판 결과를 검토하는 중”이라고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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