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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실탄에 쓰러진 한국 농민들

등록 2005-12-27 00:00 수정 2020-05-02 04:24

홍콩경찰에 연행된 뒤 경찰견 사육장·대형버스 등에서 알몸수색
인권침해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 기고

▣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홍콩 도하개발어젠다(DDA) 각료회의 무산을 위한 원정시위 참가자 신청을 받았는데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에서만 신청자가 1300명이 넘었다. 전농은 희망자들을 조정해 900명으로 축소시켰다. 그 외에도 전국여성농민 100여 명, 한국가톨릭농민회 100여 명,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에서 100여 명 등 1200여 명의 농민 투쟁단이 꾸려졌다. 누가 억지로 동원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신청자들이었다. 경비 100만원에 7박8일의 일정이란 농민들에게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그럼, 왜 농민들이 이렇게 기를 쓰고 세계무역기구(WTO) 저지에 나섰을까? 왜 이렇게 농민들이 한사코 DDA 저지에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지난해 쌀협상은 미국의 압력과 횡포에 백기를 들어버렸고, 이번 국회 쌀비준은 미국의 호령 앞에 무릎을 털썩 꿇어버림으로써 쌀마저 지키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왜 DDA저지에 물불 안 가렸나

바로 우루과이라운드(UR) 10년의 세월 동안 우리 농민들의 삶은 세계화의 바람 앞에 ‘개방농정’이란 이름으로 농업 죽이기 정책으로 돌아왔다. WTO를 앞세운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농촌 사회에서 상생의 원리를 통한 생명산업의 가치와 회생은 불가능함을 깨달은 농민들은 너도나도 홍콩 각료회담의 무산과 저지투쟁에 팔을 걷고 나섰던 것이다.

국내의 쌀 협상 국회비준 문제와 전국의 130여 시군청 앞 벼 야적투쟁, 국회비준 반대시위 과정에서 경찰에 의한 농민사망 사건 등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홍콩 투쟁에 1천여 명이 결의를 모았다는 것은 그만큼 사생결단의 의지를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WTO를 거부할 수 없는 대세라 하지만 한국 투쟁단은 거부하지 않을 수 없는 대세로 간주하고 홍콩 각료회의를 향해 온몸을 던지겠다는 각오와 결기들이 대단했다.

그러나 홍콩에 도착했을 때 현지 언론이나 사회적 분위기, 홍콩의 시위문화는 우리 한국의 시위문화와 격차가 너무 컸다. 때문에 투쟁 대표단의 고민과 어려움은 컸다. 국제 농민조직 대표들과 많은 논의 끝에 비폭력 평화적 시위의 원칙을 정했고, 가능한 한 한국 투쟁단, 특히 농민들의 강력한 의지가 잘 드러나면서도 홍콩의 시위문화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태의 전술과 방법들을 모색해 시위를 펼쳤다.

12월13∼16일 바다에 뛰어들기에서부터 삼보일배까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홍콩 시민들이 보여준 지지와 성원들은 우리의 예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시민들은 빵과 음료, 잼과 김치, 김밥 등 많은 식료품들을 전달해줬고 모금한 돈을 전달해주는가 하면 가게에서는 한국 농민임을 확인하면 받았던 돈마저 되돌려줬다. 시내 곳곳에서 박수를 받았고, 저녁의 촛불집회에는 더 많은 홍콩 시민들이 참여하거나 구경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엔 한국 시위대에 악의적이었던 언론도 호의적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집행부 대표들은 비폭력 평화적 기조를 유지하는 결정을 내렸으나, 길거리 행진에서 경찰이 상여 행진을 저지하는 데서 대오를 이탈해 산발적 투쟁으로 터져나와 결국 평화적 시위 기조를 지킬 수 없게 됐다.

홍콩 경찰의 과잉대응은 비폭력 원칙을 정한 농민 투쟁단을 흥분시켰고, 그 결과 일부 시위자는 주변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뜯어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볼 수 없던 고무실탄 70여 발이 시위대를 향해 발사됐고, 5∼8명이 고무실탄에 맞아 쓰러졌다.

한국 농민 100여 명이 연행됐고, 연행된 시위자는 비인격적 대우를 받아야 했다. 소변을 보는 것도 통제했고, 알몸 수색을 위해 수용된 장소도 경찰견 사육장, 대형버스 등이었다. 4인 기준 콘크리트 방에 이불도 없이 16명을 수용하기도 했다. 통역도 없이 신원조사를 했고, 지문날인을 강요했다.

돌아와보니 폭설로 하우스가 무너지고…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은 여성 농민 151명이 18일 석방됐지만 경찰서로 연행되는 과정에서 인권을 침해당한 여성 농민은 홍콩 경찰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쉽게 잊지 못하고 있다. 홍콩 경찰은 다음날인 19일 11명을 기소하고 829명의 남성 시위자를 석방했다. 그러나 구속된 11명을 접견한 나로서는 홍콩 경찰의 기소 사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11명 가운데는 천식 환자로 시위대 후미에만 있었던 사람, 심장질환자, 심지어 비디오 촬영 담당자 등 전혀 폭력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구속됐다. 구속의 원칙이 뭐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서에서 뜨거운 물이 공급되지 않아 씻기도 어려웠고, 음식물과 의류의 반입이 제한됐다. 병원에 가서도 통역이 없어 진료를 받기 어려운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더구나 그동안 확인되지 않은 고무실탄에 다친 강승규씨를 발견했다. 고무실탄에 다친 사람이 2명 이상 있었으며, 그들은 ‘시위 적극 가담자’로 분류되는 것이 두려워 사실을 숨기고 귀국했다.

홍콩 투쟁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농민 모두가 청와대 앞 농성장을 방문했다. WTO라는 반농업 회담을 저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 농업을 회생시키기 위한 투쟁 또한 절박하기 때문이다. 폭설로 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져내리고, 쌀값 폭락은 개선될 기미가 없다. 더구나 쌀협상 국회비준 저지투쟁에 나섰다가 2명의 농민이 경찰 폭력에 아까운 목숨을 잃었지만 정부는 전혀 책임지지 않고 있다.

농민은 국내에서도 싸우고 홍콩이라는 이역에서도 싸워야 한다. 목숨과 같은 농업을 지키고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 쉽게 대안이 마련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지만 정부가 농민에게 더 적극적으로 신뢰를 줄 수 있는 모습을 보이길 희망하고 있다. 전용철, 홍덕표 농민을 죽인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농업의 근본적인 회생을 위한 정당, 정부, 농민단체의 3자 협의기구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오늘도 꽁꽁 얼어붙은 혹한 속에서 농민의 타들어가는 절박한 심정은 청와대 앞 노천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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