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관광사업 7돌을 맞아 왕년의 주역들이 털어놓는 그때 그 비사들
관광객들이 지폐뭉치 던지자 북한주민들 극도로 분노해 도로변 철조망 설치
▣ 금강산=글·사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금강산 관광사업에 얽히고설킨 얘기는 ‘전설’에 가깝다.
7년 전 첫 관광길을 개척한 현대 사람들 가운데 지금도 현장을 지키는 이는 몇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전설은 자욱한 새벽 안개가 날이 밝으면서 흩어지듯이 차츰 잊혀지고 있다. 한때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두 형제의 비극적 운명과 우애를 그린 <태극기 휘날리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남북 병사의 총격 사건을 추리극 형식으로 그린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7년 전인 1998년에 금강산 관광길을 처음 열기 위해 휴전선을 넘었던 현대 직원들의 흥미진진한 얘기는 가끔 이런 영화의 재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물론 이들은 아직도 말을 아끼고 있다. 현대의 대북사업이 ‘진행형’이고,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은 터라 터놓고 축배의 잔을 들 때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관광 7돌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 만에 금강산을 찾은 이들이 조심스럽게 털어 놓은 비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칫 빛이 바래질 뻔 했던 금강산 관광의 가치를 다시 일깨워주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D-90, 유언장 써놓고 떠나다
애초 금강산 유람선의 첫 출항 예정일은 1998년 11월18일이 아닌 9월25일이었다. 그해 6월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지나 북녘 땅을 밟는 세계적인 이벤트를 연출했다. 정 회장은 평양과 원산시, 그리고 금강산과 묘향산을 둘러본 뒤 6월22일에 금강산 관광개발 원칙에 관한 의정서를 맺는다. 자연스레 언제 첫 배를 띄우느냐가 관심거리였다. 금강산 관광을 위한 계약서에는 유람선 관광 시기와 관련해, “양쪽은 본 사업의 원활하고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제1차 유람선 관광단 출발을 본 계약서 작성일(6.22)로부터 90일 안에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적혀 있다.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9월25일을 D-데이로 잡았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실무자들은 다들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3개월 안에 어떻게….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현대아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묘하게 흥분된다고 말한다. “현대가 불도저처럼 전세계 오지 땅들을 무수히 개발해왔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더라고요. 더구나 금강산 지역을 자세히 보여주는 지도 한 장을 구할 수 없을 만큼 정보도 없어 외국 회사가 찍은 위성사진들을 직접 사서 참고했지요.”
현대 사람들은 지금도 첫 유람선을 띄우기 전 ‘수개월’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살 떨리던 시기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맨 땅에 머리를 부딪히는 꼴이었죠.” 더구나 금강산 관광에 합의한 다음날인 6월23일에는 동해안에서 북한 잠수정이 발견돼 세상을 발칵 뒤집고 있었다. 한 해 전에 남쪽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국회 간담회에 나가 “소떼를 100번 주어도 잠수정을 또 보낼 것”이라고 말해 국민들을 더 긴장시켰다. 7월12일에는 동해안에서 무장간첩들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어렵게 합의한 금강산 관광사업이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 강인덕 당시 통일부 장관은 “북쪽의 사과가 전제돼야 금강산 관광이 재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첫 유람선 출항 일자는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만 감돌았다. 세부적인 부속 합의서들이 줄줄이 차질 없이 맺어져야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 순탄치 않았다. 현대 실무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도 배는 띄워야 했다. 그런데 막상 금강산 현지로 건설인력 등을 보내려 하니, 다들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속된 말로 인질로 잡혀 못 돌아올 수도 있겠다 싶었죠. 누가 선뜻 나서겠어요.” 김아무개 현대아산 고문의 말에는 한때 남몰래 애태웠던 속앓이가 그대로 묻어난다. “제발 함께 가달라고 사정사정했어요. 적어도 1년 안에는 돌아온다고 설득했지요. 그런데 솔직히 직원들을 몇 명이나 데려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실제 6개월 동안은 아무도 휴가를 가지 못했죠.” 처음 금강산 땅을 밟았던 직원들은 다들 유언장 비슷한 것을 써놓고 현지에 들어갔다.
30년차 현장소장 “중동보다 더 했다”
어쨌든 7월 초 금강산 시설공사 현장팀(토목 7, 건축 12 등 모두 19명)이 급히 꾸려지고, 휴게소, 공연장, 출입국사무소, 화장실, 매점 등 편의시설 기본설계가 확정됐다. 7월28일에는 3개 관광코스와 장전항 등에 대한 현지 답사와 측량이 이뤄졌다. 김보식 초대 금강산사업소 소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캄캄한 밤에 금강산 현지에 도착했지요. 건설인력들을 이끌고 갔더니 마음 편히 자고 먹을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깥 허허벌판에 텐트를 치고 잤지요. 먼지 구덩이 속에서 밥을 해먹고, 식수가 없어 빗물을 그릇에 담아 밥을 해먹었어요.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밥에 모레가 씹혀 이빨이 부서지기도 했지요.” 첫 유람선을 무사히 띄우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간 직원들은 토목, 건설을 비롯해 현지에서 부닥치는 모든 일들을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사실 현대건설 직원들은 중동 사막을 비롯해 세계의 산간 오지를 안 가본 데가 없다. 그런데 금강산은 중동의 사막에서 일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다들 혀를 내두른다. “내가 해외 건설 현지 사무소장으로 이곳저곳을 많이 다녔지요. 중동 사막뿐 아니라 아프리카 등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곳을 안 간 곳이 없습니다. 풍속도 다르지, 말도 안 통하지, 그렇다고 술을 먹고 회포를 풀 수가 있나. 그래도 견딜 만했습니다. 북한의 금강산은 이런 중동 나라들에서 일하는 것보다 두세 배는 더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현대건설에서 30년 동안 잔뼈가 굵은 김보식 전 소장의 말이다.
기초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니 이번에는 남쪽 관광객을 실어나를 버스를 마련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북쪽 당국에 버스를 보내줘야 남쪽 동포들을 실어나를 게 아니냐며 현대 사람들이 재촉하자 큰 바지선 두 척에 20대씩 모두 40대의 버스를 보내왔다. 그런데 막상 큰 바지선이 왔으나 배를 정박시킬 데가 마땅치 않았다. 당시 금강산 장전항 주변은 해군 군사시설 외에는 전부 산과 구릉지대라 쓸 만한 부두가 없었던 것이다. 남북한 실무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고민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북쪽의 금강산총회사 관계자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근처 해군기지밖에 배를 댈 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한 대로 북한 군부가 상업용 선박에 부두를 빌려준 사례가 없다고 펄쩍 뛰었다. 남북의 실무자들이 모여 밤샘 회의를 했지만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양쪽 윗선에 문제 해결을 요청했고 북한 해군이 상부의 지시를 받아 잠수함 기지 내 부두를 내주는 용단을 내렸다. 이 덕분에 간신히 바지선을 대고 버스 40대를 내릴 수 있었다.
운전사 일당, 우여곡절 끝에 10달러로
그런데 골칫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북한 당국이 버스만 보내고 운전사는 따로 보내주지 않은 것이다. 현대 사람들은 9월25일 이후 쏟아져들어올 남쪽 관광객을 생각하며 현기증까지 느꼈다. 현지에 토목, 건설 등을 위해 파견된 20여 명 가운데 버스를 몰 수 있는 사람들을 급히 골라냈다. 기껏해야 다섯 명 정도가 그럭저럭 버스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적은 수로 버스 40대를 한꺼번에 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북쪽 당국이 또 운전사를 보내왔다. 그런데 이들은 금강산에 오자마자 다짜고짜 운전사 한 사람당 60달러씩의 일당을 달라고 요구했다. 또 지루한 협상이 시작됐다. 당시 협상을 담당했던 현대 임원의 말이다. “우리는 일당은 못 주고 대신 수고비를 주겠다고 버텼지요. 그랬더니 북한은 30달러로 낮추더라고요. 그것도 안 된다고 했더니 나중에는 20달러를 달라고 하더군요. 결국 열심히 일하는 조건으로 하루에 1명당 10달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북한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30달러는 받아야겠다고. 그래서 한참이나 티격태격 언쟁을 벌였으나 협상은 타결되지 않았어요.”
이때 북쪽에서 제시한 일당의 근거가 흥미롭다. 북한은 남쪽 운전사가 하루에 60달러를 받으니 우리도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들은 당시 남쪽 고속버스 운전자의 평균 월급이 200만원인 것으로 미리 파악하고 하루 60달러를 요구한 것이다. 또 나중에는 중국인 운전사가 외국에 나가 일할 때 최소 30달러의 일당을 받는다고 주장했고, 러시아에서는 운전사가 20달러를 받는다며 더는 내릴 수 없는 한계선으로 20달러를 제시한 것이다.
현대 사람들은 북한 군인들을 고용해 부두를 세우고 관광도로를 닦았다. 북한 군부 산하의 금강총회사가 군부 인력 동원을 맡았다. 현대에서는 초기에 인민군 600여 명을 데려다 일을 시켰다. 북쪽에서 가장 정권에 충성하는 군인들과 남쪽에서 가장 상업적인 재벌회사 직원들이 함께 일하다 보니 서로 얼굴을 붉히며 충돌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쏠 테면 쏴보라”며 군 총부리를 잡고 밀고 당기는 풍경도 낯설지 않았다는 게 당시 현장에서 일했던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이들은 9월25일 유람선의 첫 출항일에 맞춰 일을 마무리짓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질주했으나 준비가 미흡해 첫 출항일은 11월18일로 미뤄졌다.
금강산 현지 공사의 절정은 10월 중순께 각종 자재와 장비를 실은 바지선 6척과 터그보트 7척, 그리고 준설선과 준설장비 11척이 장전항에 도착했을 때라고 현대 사람들은 얘기한다. 덕분에 10월18일 장전항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현장 사무소도 세워졌다. 이때 장전항에는 24척의 크고 작은 남쪽 배들이 환한 불을 밝히며 철야 작업을 했다. 이 때문에 고성읍에 사는 북한 주민 수백 명이 생전 처음 보는 진풍경에 밤을 설친 것으로 전해진다.
남쪽 관광객한테 해코지 할라?
관광세칙이 타결되고 11월14일 시범운항을 거쳐 마침내 11월18일 800여 명의 관광객을 실은 현대 금강호가 장전항에 아무런 탈 없이 도착했다. 물론 그 뒤에도 금강산 관광길의 거친 파고는 이어졌다. 12월18일에는 북한 잠수정이 동해에 또 나타났고, 1999년 6월20일에는 금강산 관광객인 민영미씨 억류사건이 불거지는 바람에 봉래호, 풍악호, 금강호 운항이 중단됐다. 그가 6일 만에 석방됐으나 6, 7월 베이징에서 열린 차관급 회담이 결렬되면서 금강산 관광길이 막히다 열리는 수난이 되풀이됐다.
적지 않은 관광객들은 금강산 관광도로 양옆으로 빈틈없이 둘러쳐진 울타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북한 주민들과 남쪽 관광객을 가르는 인공 울타리가 거부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현대아산 관계자들에 따르면 처음에는 금강산 관광도로를 따라 울타리가 쳐지지 않았다. 현대 직원들은 24시간 어디나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북한 당국이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현대 직원들은 “왜 길을 막느냐”고 따졌고, 남북 주민 접촉에 따른 부작용이 염려되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듣는다. 처음 북쪽은 5m 간격으로 울타리를 2개나 치겠다고 했다. 현대 쪽에서 그러면 오히려 주민들의 농작물 피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더니 뜻밖의 답변이 나와 다들 당황했던 것으로 이들은 기억한다. “우리 인민들이 남쪽 관광객들을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사실 처음 북한 주민들이 현대 직원들을 비롯해 남쪽 관광객들을 쳐다보는 눈초리는 그리 곱지 않았다. 물론 손을 흔드는 것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북쪽 관계자들은 남쪽 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고 지나가도 주민들이 창문을 향해 돌멩이를 던질 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들을 보호하려면 5m 간격의 울타리를 두 줄은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북한 현지 주민들을 분노케 했을까. 금강산 첫 관광길에 나선 많은 남쪽 관광객들은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담뱃값속에 1달러, 5달러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넣어서 주민들을 향해 던지곤 했다. 일부 이산가족들은 북쪽에서 보기에 극히 부담스러운 사연을 적은 쪽지들을 주민들의 손길이 닿을 만한 곳이면 어디나 쑤셔놓았다. 북쪽 실무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한 다발의 달러 뭉치들과 쪽지들을 현대와의 회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게 일상사였다. 북쪽 관계자들은 “우리가 거지냐”며 크게 반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금강산 관광 7돌을 기념하는 행사가 어김없이 11월18일에 현지에서 열렸다. 7년 전 목숨을 걸고 관광길을 열었던 왕년의 주역들도 여러 명 눈에 띄었다. 그들은 금강산 관광이 개성공단, 남북 도로·철도 연결 등 남북 관계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한 사업들을 가능케 했다고 입을 모은다. 금강산 관광의 뱃길이 오늘날 남북 간의 물적·인적 교류의 큰 물꼬를 트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라는 얘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9월30일 오전 10시30분부터 12시10분에 걸쳐 현대가 만든 고성항 방파제, 본선 부두, 해상호텔, 온정각 문화회관, 온천장 등을 둘러봤다. 특히 그는 금강산 장전항 등대 옆 구릉지대에 올라가 고성 읍내를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는 진심으로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이 잘되기를 바랐던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의 대북사업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잘살게 되기를 소망했던 셈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여기가 우리 땅입니까, 현대 땅입니까. 아무래도 현대 땅이라 해야겠지요.” 김 위원장은 무슨 의미로 이 말을 던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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