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할아버지가 남긴 찌개를 먹다니…

등록 2005-11-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실로 믿기 어려운 헌신성으로 한국 한센인을 도와준 일본의 변호사와 시민들
함께 참여한 한국인 변호사가 밝힌 ‘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 차규근/ 변호사·한센병 소송 지원 변호단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도쿄 지방재판소 103호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과 변호인단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소를 확신하며 판결을 기다렸던 원고 변호인단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도쿄 지방재판소 민사3부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한마디 판결 선고만 남긴 채 무엇에 쫓기는 듯한 태도로 법정을 황망히 빠져나갔다. 통역자들은 소록도 원고들에게 판결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 난감해했다. 근엄한 표정으로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던 법원 직원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일본 사법부의 양식을 믿고 기대했건만, 모두가 깊은 실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원래 대만 쪽 소송이 비관적이었는데…

모두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어찌해야 할지 몰라하던 그때 낭보가 전해졌다. 소록도 판결 30분 뒤에 선고된 대만 낙생원 판결에서 민사38부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모두들 기쁨에 겨워 환호를 떠뜨렸다. 소록도 사건을 담당한 민사3부 재판부와 달리 민사38부는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조금은 차가운 재판 진행을 했다. 그 때문에 소록도 사건이 패소한 상황에서 민사38부의 낙생원 판결을 비관적으로 예상했던 게 사실이다.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원고 변호단들도 다시 기운을 내어 긴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재판부의 판결 요지를 바로 입수해 분석작업에 돌입했다.

낙생원 승소 판결을 내린 민사38부의 판결 요지는 간단하고 명쾌했다. “비록 국회 논의 과정에서 식민지 시대 한국 소록도와 대만 낙생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며 법과 고시에도 명시적인 규정이 없기는 하지만, 국가의 잘못된 차별과 격리 정책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한센병 병력자에 대한 전면적인 해결을 위해 제정된 보상법의 취지에 비춰볼 때 명시적으로 소록도 요양원과 낙생원 요양원을 배제하는 규정이 있지 않는 한, 이를 보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견줘 소록도 패소 판결을 내린 민사3부의 판결 요지는 지극히 모호했다. “소록도 요양원을 보상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규정이 없는 한 이를 보상법의 적용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도 적절치 않기 때문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장난이란 말인가! 그제야, 판결 선고 뒤에 재판부가 왜 아무런 설명도 없이 황망히 법정을 빠져나갔는지 이해되었다. 그러나 민사3부 판결도 완전한 패소는 아니었다. 정부가 해당 고시에 소록도가 포함되는 것으로 명확하게 하면 보상법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판 전야, 지원 시위 긴급 회의도

원고 변호인단과 헌신적인 일본의 지원자들은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후생노동성을 에워싸고 후생노동성 장관과 면담을 요구하면서 고시의 명시적인 개정을 통한 즉각적인 해결을 강력히 요청했고, 결국 판결 이틀 뒤 원고들은 후생노동대신과 법무대신을 만나, 요구사항을 직접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10월28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소록도 문제를 검토 중”이라며 “좋은 결론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원고 한센인들과 변호단은 일본 정부가 조만간 바람직한 결론을 내놓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한센병에 대해 부모·자식 사이의 관계조차 부정되는 천형이라고 말한다. 한센인들이 인간성 회복을 위한 투쟁에 분연히 일어서게 된 것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한센인 인권 회복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한 60여 명의 일본 변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호인단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도쿄대 대학원생 이광휘씨는 일본 변호사들의 헌신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 통역으로 일하면서 일본 변호사들과 함께 소록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 식사를 했거든요. 소록도 할아버지 한 분이 찌개를 드시고 남기게 됐는데, 일본의 여자 변호사 구보이가 그 찌개를 먹더라고요.” 이씨는 처음 소록도에 방문한데다, 한센병에 대해서도 잘 몰랐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과 편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이씨는 그 모습을 본 뒤 깊은 감동을 받았고, 한센인에 대한 두려움과 편견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한국인과는 달리 찌개 하나를 놓고 같이 먹는 습관이 없는 일본인이, 그것도 미혼의 여자 변호사가 한센병으로 얼굴이 온전치 못한 소록도 할아버지가 침까지 흘리면서 먹다 남긴 찌개를 태연히 먹다니! 그 뒤 이광휘씨는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소록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녀와 같은 심정으로 일하고 있다.

일본 변호단뿐만 아니라, 일본의 시민들도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의 헌신성과 따뜻함으로 원고들을 지원해주었다. 지켜보고 있노라면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오게 하는 이런 일본인들이야말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가 아닐까? 일본 시민들은 재판이 진행될 때마다 재판소 앞에 모여 지원 시위를 했다. 일본 내 여론을 환기시켰다. 일본 시민들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재판은 원만히 진행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재판 하루 전날에는 따로 회의를 열어 재판 당일 어떻게 지원 시위를 할 것인지 회의하기도 했다.

오카야마에서 사무실 닫고 날아오다

원고 변호단 중 한 사람인 시미즈 변호사는 도쿄가 아닌 오카야마시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소송에 참여하기 위해 도쿄에 오게 되면 그는 며칠이나 일을 못하게 된다. “이렇게 며칠씩 사무실을 비우면 업무에 지장이 많지 않으신가요?”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경색된 한-일 관계가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바람을 가진 것이 필자와 시미즈 변호사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일본 정부의 현명한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