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타미플루’는 해방돼야 한다

등록 2005-10-26 00:00 수정 2020-05-02 04:24

조류독감 치료제에 대한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의 특허권 제한하는 ‘강제실시’ 논란…선진국 압력에 밀려 권리 행사 못하는 개도국에서 첫 선례를 보여주는 사건 될 것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가 특허권을 갖고 독점 생산하는 조류독감 치료제 ‘타미플루’는 바이러스 증식에 필요한 효소 작용을 차단하는 항바이러스제다. 각국은 벌써부터 타미플루 확보 경쟁에 나섰다. 전세계에서 수백만 정의 주문이 폭주해 타미플루가 공급 부족 사태를 빚고 있는 가운데 미국·영국·프랑스 등은 타미플루 사재기에 나섰다. 이럴수록 조류독감의 최전선에 놓인 가난한 아시아 개도국들의 약품 확보는 더욱 어려워진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로슈가 공장을 완전 가동해도 10년이 걸려야 전세계 인구 20%가 복용할 타미플루를 생산할 수 있다.

캐나다·미국·유럽은 늘 하는 일을…

국내 질병관리본부는 조류독감이 사람 사이의 전염병으로 번질 경우 국민 1500만 명이 감염돼 9만∼44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확보한 타미플루는 80만명분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타미플루에 대해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e)를 해야 한다는 국제적 압력이 커지고 있다. 보건의료단체연합도 “정부가 공급량이 절대 부족한 타미플루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무역관련 지적재산권(TRIPs) 협정의 강제실시권을 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제실시는 1995년에 발효된 TRIPs 협정에 들어 있는 조항이다. 사실 의약품 ‘특허’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높은 독점가격을 부과해 막대한 이윤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인 장치다. ‘공유지적재산권모임’의 남희섭 변리사는 “특허권이 법률 차원을 넘어 국제무역 질서에서 논의되는 것 자체가 다국적 제약사들의 저개발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독점이윤 추구 논리가 숨어 있다”고 말했다. 강제실시는 TRIPs 협정 제31조에 규정된 특허권 예외조항으로, ‘국가적 비상사태 및 공공·비상업적 목적인 경우 특허권자의 동의 없이도 특허발명을 정부(국영 제약사) 또는 정부로부터 승인을 얻은 제3자(민간 제약사)가 그 약품을 생산하도록 명령하는’ 조처다. 실시는 특허발명을 실제로 생산·보급한다는 뜻인데, 강제실시를 적용하면 국내 제약회사들은 제너릭(특허권 없이 제조할 수 있는 동일한 효능을 가진 복제약품)을 생산해 환자들한테 싼값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때 특허권자한테 적절한 보상으로 로열티(약품 가격의 3∼5% 정도)를 내야 한다.

국내 특허법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비상업적으로 특허발명을 실시할 필요가 있는 경우’(107조)에 강제실시권을 발동할 수 있는 조항을 두고 있다. 그러나 특허청이 이 규정을 실제로 적용한 사례는 한 번도 없다. 지난 2002년 노바티스가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에 대해 한 알당 2만5천원의 비싼 가격을 제시하면서 “이 약값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해버리겠다”고 위협하자 보건의료단체가 글리벡 특허에 대해 강제실시권 발동을 청구했는데, 당시 우리 정부는 기각 결정을 내렸다.

타미플루에 대한 강제실시는 개도국에서 의약품 강제실시의 대규모 첫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굵은 획을 긋는 사건이 될 수 있다. 강제실시권은 이 조항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느냐를 놓고 논란이 거듭돼왔다. 캐나다는 1969∼1992년에 613건의 의약품 강제실시권을 발동한 바 있고, 미국과 유럽연합에서 허가된 강제실시권도 수만 건에 이른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탄저균 소동이 일어나자 미국은 독일 바이엘사의 탄저병 치료제 가격이 너무 높다면서 바이엘사의 특허권에 대해 강제실시를 했다. 그러나 개도국은 강제실시권이 TRIPs 협정에 명시돼 있고, ‘TRIPS와 공중보건에 관한 별도 선언문’이 “모든 회원국은 강제실시권을 허락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음에도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개도국과 후진국이 실제로 강제실시권을 발동하려면 미국의 위협과 WTO 분쟁기구의 압력 및 제소, 엄청난 소송 비용과 무역 제재를 감당해야 한다.

남희섭 변리사는 “타이와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에서 의약품 강제실시에 나서면 미국 정부가 뒤에서 무역 압력을 넣는 사례도 흔하다”고 말했다. 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 TRIPs 특허 질서에 반대하는 국가들이 자국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들을 위해 강제실시권을 발동해 복제약을 싸게 또는 공짜로 공급하다가 세계무역기구로부터 제소당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인도의 최대 제약회사인 시플라는 최근, 로슈의 승인 없이 저가의 제너릭 조류독감 항바이러스제를 연말까지 상업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3국서 약 가져오는 ‘병행 수입’도 논란

보건의료단체연합 리병도 정책위원은 “타미플루 강제실시권을 발동하면 국내 민간 제약사가 6개월이면 생산라인을 갖추고 약품의 안전성 테스트까지 1년 정도면 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캐나다는 탄저병이 발생하지도 않았음에도 외국의 ‘시프로베이’ 특허를 무시하고 자국 제약사에 100만 정의 제너릭 강제실시를 지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식품의약품안전청 김영찬 의약품안전과장은 “타미플루 제조 능력을 확보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최근 국내 제약협회와 바이오벤처협회 등에 식약청이 공문을 보냈다”며 “그러나 이것이 강제실시권 발동 방침을 뜻하는 건 아니다. 각국에서 핫이슈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알아보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강제실시권이 발동되면 로슈가 과거에 우리나라에 타미플루 특허를 신청할 때 제출했던 제조공법을 민간 제약사에 공개해서 생산할 수도 있다.

강제실시권과 더불어 TRIPs 협정의 또 다른 논쟁거리가 ‘병행 수입’(강제실시로 생산한 특허약품의 제3국 수출)이다. 병행수입이란 로슈가 인도와 한국에 모두 타미플루 특허를 갖고 있는데, 인도의 제약회사가 강제실시로 만든 타미플루 가격이 더 쌀 경우 우리가 스위스 로슈 본사뿐 아니라 인도산 타미플루도 선택해 수입할 수 있는 조처다. 강제실시를 하더라도 단기간에 대규모 생산이 어려울 때는 제3국에서 싼 가격에 사들여와야 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우리 정부가 강제실시권을 발동해야 한다. 이 강제실시권을 인도에 양도하는 방식으로 약품을 수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TRIPs 협정은 강제실시로 생산된 약품은 “주로 국내 소비에 충당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과 WTO는 병행 수입을 허용하면 특허약품 가격이 전세계적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강제실시된 약품의 수출을 가로막고 있다. 그런데 의약품 생산시설조차 없는 가난한 아프리카·아시아 국가들은 강제실시 조항이 있더라도 이를 활용할 수 없다. 특히 강제실시로 생산한 특허 약품의 제3국 수출 허용은 국내에서 강제실시로 생산한 타미플루를 북한으로 싸게 수출하는 방안과 직접 맞물려 있다. 한편, 로슈는 조류독감 파동 직후 자신들만 타미플루를 독점 생산하겠다고 했다가 국제적 압력이 높아지자 다른 제약사에 하청생산을 주는 방식을 찾아보겠다고 입장을 점차 바꾸고 있다.



특허는 살인무기?

이윤에만 집착하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죽인다

사르트르는 “페스트는 계급관계를 심화하는 작용을 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면제해준다”고 말했다. 1600년대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 도시에 발병 소식이 전해지면 부자들은 황급히 그들의 시골 별장으로 도망쳤다. 오염된 도시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유폐돼 남아 있었고, 질병이 지나가면 부자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확실히 소독을 하고 나서도 가난한 여자 한 명을 몇 주 동안 그곳에서 살아보게 했다. 실험용 여자는 목숨을 걸고 모든 위험이 사라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향료가 금 1t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던 근대 초기,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향료 재배지역을 발견하면 일부만 남겨두고 다른 향료 재배지역은 몽땅 불태워버렸다. 남겨둔 지역에서만 향료를 재배해 막대한 독점이윤을 챙기고, 군대를 보내어 그 지역을 지켰다. TRIPs 협정에서 보호하는 특허권 중 선진국의 제약사가 후진국에 가서 민간 요법을 수집해 만든 약품인데도, 마치 자신들이 개발한 듯이 특허라고 선언한 뒤 후진국이 못 쓰게 하는 것도 많다. 이른바 ‘생물 해적질’이다.
특허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윤을 챙기고, 높은 독점 가격 때문에 ‘특허에 의한 살인’을 낳는 사례는 AIDS 치료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AIDS는 치료약이 있는데도 다국적 회사들의 비싼 약값 때문에 환자들이 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간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한 달 700달러’ 정책을 유지하고 있지만, 인도의 제약회사 ‘시플라’는 아시아·아프리카의 AIDS 환자들에게 ‘하루 1달러’만으로 약을 구할 수 있게 했다. AIDS 치료제 중 하나인 ‘스타부딘’의 경우 다국적 제약사인 오스트레일리아의 BMS제약이 한 알에 5달러를 고시했으나, 인도의 시플라사는 10센트를 고시했다. 무려 50배의 가격 차이에도 시플라는 이윤을 남기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것만 봐도 다국적 제약사들이 지적재산권 특허를 이용해 엄청난 독점이윤을 보장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국의 강제실시권 발동으로 특허약이 여러 군데서 생산된다면 가격도 내려가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도 확대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