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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운동권, 학생운동을 구출하라

등록 2005-10-20 00:00 수정 2020-05-03 04:24

“학생운동의 쇠퇴는 필연”이라 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선 사람들
과잉된 정치운동의 껍데기를 벗고 생활 속에서 살아있는 운동을 꿈꾼다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전두환·노태우 처벌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1995년은 ‘학생운동’이라는 나무가 마지막 단풍을 불태웠던 시기로 기록된다. 그해 가을 김영삼 정부는 광주특별법 제정을 발표했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위시한 학생운동은 이 투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100만 학도’가 호응했던 대규모 거리투쟁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총련은 이듬해 8월 연세대 통일대축전에서 고립돼 싸우다가 큰 실패를 겪었고, 그 뒤 학생운동은 낙엽과 같이 떨어졌다.

세계 최강이라던 한국 학생운동의 급작스런 침몰 이유에 대해서 각 정파의 해석은 달랐다. 한총련과 민족해방(NL)계가 주도 세력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의 관계자는 “한총련 운동만 하면 수배하는 정부의 광포한 탄압이 학생운동 쇠퇴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좌파에서 한총련의 극단에 서 있는 ‘다함께’ 관계자는 “지금은 평화적 시기다. 혁명의 시기가 오면 학생운동이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파 없는 골수 운동권

하지만 이와 달리 “학생운동의 쇠퇴는 시대사적 필연”이라고 말하면서 그 지점에서 새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신 운동권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학생운동의 소박한 희망을 찾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연세대 4학년 김고종호(99학번)씨는 오지랖이 넓다. 조선일보 반대 연세인모임, 총학생회 정보통신부장, <연세> 교지 편집장, ‘학벌 없는 사회’ 활동에서 총학생회 후보 출마 경력까지. 그는 혼자서 다양한 운동을 섭렵했다. 운동을 중단한 건 2001~2002년 공익근무를 하는 기간뿐. 성격유형지표(MBTI)는 그를 “민첩하고 독창적이며 안목이 넓고 다방면에 관심과 재능이 많다”고 설명한다. 민주노동당원인 그는 싸이월드에 ‘삶이라는 이름의 집짓기’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회원이 567명이다.

“1학년 때는 여기저기 빨빨거리고 돌아다녔죠. 그게 눈에 띄었는지 2000년 총학생회에서 정보통신부장을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총학생회 집행부를 했고….”

그러나 그는 정치조직 구성원은 아니다. 당시 총학생회는 좌파(PD·민중민주) 계열의 전국학생회협의회(전학협)가 집권했는데, 그는 정파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운동이 좋아서 했고, 조직 생활보다는 자유로운 운동이 더 체질에 맞았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전학협 총학생회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전학협 조직원 취급을 당했다. 운동권에서는 물론 심지어 판사에게까지도.

“하하! 사실 제가 2001년 민중대회 때 화염병을 던졌다가 구속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판사가 묻더라고요. 전학협 조직원이냐고. 난감했어요. 난 전학협이 아닌데. 하지만 아니라고 대답하면 옆에 서 있는 선후배들한테 미안하고….”

그는 문제를 느낄 때마다 탐구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운동권이다. 2001년 초에는 연세대 내부에서 기여입학제 논란이 일자, 논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탐구를 시작했고, 결국은 이 문제가 대한민국 학벌 구조와 연관이 있음을 깨닫고 ‘학벌 없는 사회’ 학생모임 활동을 시작했다. 공익근무를 마친 2003년부터는 연세언론출판협의회 일을 맡으면서, 거의 혼자 <언론비평>이라는 책을 내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시작된 동맹휴업

김고씨가 이때마다 느끼는 것은 학생운동의 문제였다. 직업적 활동가를 요구할 뿐 졸업 뒤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 전망이 부재한 학생운동, 단지 한두살 많은 선배들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학생운동. 그는 지난해 말 한총련에 염증을 느낀 학생들과 ‘새학생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연세대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서 학생들이 학생회에 원하는 바를 조사했고, 논란 끝에 2005년 총학생회 선거의 선거운동본부를 꾸리기로 했다.

“노무현도 경선을 해서 당선됐는데, 우리라고 못할 거 없잖아요. 그래서 원하는 학생들의 신청을 받아 200여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했어요.”

고학번 선배들이 과 학생회장들 중에서 일 잘하고 얼굴 잘생기고 연설 잘하는 사람을 찍어 ‘결의’시키는 기존 운동권의 풍경이 아니었다. ‘밀실후보’가 아닌 공개경선. 결국 김고종호씨는 ‘총학생회장 후보의 후보’로 나선 3명 가운데 1등으로 당선됐다. 그리고 그는 ‘그대! 상상력의 권력을’이라는 선거본부의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비권’이라고 했다. 아쉽게 떨어졌지만, 멋진 시도였다.

신 운동권은 정파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신 운동권은 △정치조직에 속해 정파운동을 하지 않으며 △선배가 후배를 점찍어 도제식으로 교육하는 주체 생산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스스로 다양한 영역에서 운동을 찾는다. 조직보다는 개인으로 활동하고 거대담론보다는 미시담론을 우선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2005년의 학생운동은 이러한 신 운동권과 정파 중심의 구 운동권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이른바 ‘자주적 학생회’로 면면히 내려오는 NL 계열의 주사파·노선대, PD 계열의 연대회의·학생행동연대·다함께 등 1980년대처럼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정파조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서울대에서 신 운동권은 세력화되기도 했다. 학내 언론사, 동아리, 생활협동조합 등 학생회가 아닌 영역에서 기반을 닦은 사람들이 모여 2년 동안 총학생회를 운영했다. 바로 2003~2004년의 ‘학교로’ 선본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비권’이라고 했지만, 이들은 한총련보다 더 뛰어난 운동을 했다.

2003년 4월2일 서울대 반전 동맹휴업은 지리멸렬한 2000년대 학생운동의 예외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당시 부총학생회장 홍상욱(99학번·4학년)씨의 말이다. “동맹휴업의 발단은 철학과의 한 학생이 총학생회 게시판에 올린 글이었어요. 1995년 전 대학에서 펼쳐졌던 전·노 처벌 동맹휴업을 회고하며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동맹휴업을 감행하자는 제안이었죠. 그래서 이 사람을 총학생회 운영위원회(각 단과대 회장들이 모이는 자리)에 불러다 의견을 들었죠. 토론 끝에 동맹휴업을 시도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동맹휴업 찬반을 묻는 전체 학생 총투표 준비에 들어갔죠.”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의 결정. 한총련 중앙에서 결정돼 지역총련, 각 대학 총학생회, 단대 학생회, 과 학생회로 ‘하달’된 뒤 총투표로 가던 기존의 동맹휴업과 다른 모습이었다.

더욱 혁명적이었던 건 총투표가 사이버상에서도 진행됐다는 점이다. 총학생회는 곧바로 서울대 포털인 스누라이프와 함께 총투표 시스템 개발에 들어갔다. 이틀 밤을 새운 끝에 총학생회 홈페이지에 개인 계정을 입력하면 인증 이메일을 받아 온라인으로 투표하는 시스템을 완성했다. 논의의 장이 열리자 정치에 무관심하던 학생들도 총학생회 홈페이지에 들락거렸다. 홈페이지는 파병 찬반을 논하는 토론 글로 가득 찼다. 학생사회에서 부재했던 정치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동맹휴업 당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는 4천명의 학생이 운집했고, 국회 앞 반전시위에는 2천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1995년 전·노 처벌투쟁 이후 이런 대규모 거리투쟁은 처음이었다.

‘몸대주기’ 투쟁에 대한 자각하다

사실 신 운동권은 그동안 조명이 안 돼서 그렇지 대학사회 도처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1990년 중반 이후 학생운동 쇠락과 함께 학생회·동아리에 대한 정파조직의 영향력이 급격히 떨어져, 전통적인 정파운동에서 이탈하는 학생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운동권 동아리도 사회과학·역사·풍물패 등 전통적인 주제에서 생태·환경·여성 등 미시 담론에 천착하는 조직으로 다양해졌다. 각각의 동아리는 주체성을 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홍상욱씨도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1학년 때 ‘현장좌파’라고 불리는 그룹에서 철거투쟁, 파업 연대투쟁 등 혹독한 민중연대 활동으로 제 몸을 담금질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학생인지 투사인지 구분이 안 갔다고 말했다.

“1980년대만 해도 학생 계층이 민중을 선도하는 기능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끌려다닐 뿐이에요. 민주노총에서 집회 협조 요청이 오면 가서 쇠파이프 들고 가서 막고, 철거투쟁이 있으면 용역들과 싸우고…. 우리가 주체적으로 계획해 운동하기보다는 그냥 몸 대주기일 뿐이었죠. 그러한 자각 끝에 내 주변인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운동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환경 동아리를 만들어 ‘그린 컵(자기 컵) 갖기 운동’을 학내에서 벌였다. 2학년 때부터는 서울대 생활협동조합에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환경·생태적 문제의식을 이어가 학생식당에 채식 식단을 도입하고, 학교 매점에 녹색구매 제도를 신설했다.

그가 부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으로 일했던 2003~2004년 총학생회는 이것저것 사업을 주도하기보다는 학생사회의 각 단체와 조직을 지원하고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매년 총학생회 정파에 따라 ‘노동문화제’나 ‘통일문화제’로 내용이 바뀌던 축제도, 학생들에게 스스로 ‘축제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게 했다. 이 모임은 상설화돼 다른 계열의 총학생회가 집권한 올해에도 축제를 주도하고 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이분법을 넘어

그렇다면 신 운동권이 예전의 학생운동의 활력을 복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건 소박하되 강력한 힘이지, 거대하고 통일된 힘이 아니다. 대규모 군중 동원을 꿈꾸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개인, 새로운 주체 시대를 기다린다. 학생회는 단순히 ‘네트워크 서버’의 기능을 갖고 각 부문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치투쟁의 경우도 고차원적인 통일운동이나 노동운동으로 비약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을 소통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운동을 상시적으로 벌이는 건 정치조직이나 각 부문의 단체들이다.

대학 인터넷 언론인 <유뉴스> 이민희 편집장은 그동안 ‘정치 과잉’이었던 학생회에서, 그 과잉의 부분을 민주노동당으로 떼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학생회는 이제 역할을 축소하고 대학사회의 교육·학문 등의 문제에 집중해야 돼요. 과잉된 정치운동은 당이 맡고, 그런 투쟁을 원하는 운동권은 당원이나 정치조직에서 일하는 거죠.”

물론 신 운동권이 발 붙일 만한 곳이 그리 넓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신 운동권이 세력화한 서울대 총학생회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아직까지 한국 학생운동은 정파에 따라 움직인다. 6천명 학생당원이 있는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만 해도 정파에서 자유롭지 않은 게 사실이다.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당운동을 모색하는 학생당원 모임’의 이기중(24)씨는 “진보적인 시민이 모여야 할 민주노동당조차도 다함께와 NL이 차례로 조직적으로 입당해, 당의 이름만 내세운 채 정파운동을 벌이는 곳으로 전락했다”며 “이 상황에서 정파에 얽매이지 않는 상당수 학생당원들은 활동할 의욕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학생운동의 위기는 10년 동안 운위됐다. 그동안 학생운동은 한총련과 몇몇 정파로만 표상됐다. 이러한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그동안 신 운동권의 희망을 무참히 밟아버렸는지 모른다.



학생운동은 왜 침몰했는가

‘열사-전사-어머니’로 이뤄지는 가족적 은유체계 지녔다는 분석도

시대를 호령하던 한국 학생운동은 왜 쇠락했을까? 이는 단지 수구언론과 공안기관의 ‘한총련 죽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사파’로 불리는 한총련 주류의 그릇된 노선 탓일까? 그도 아니면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시대적 결과일까?
진상우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집행위원은 두 번째 해답에 방점을 찍는다. 진 집행위원은 “아무리 천박하다고 하지만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는 봉건적인 북한식 사회주의보다는 진보적”이라며 “그동안 NL 중심의 학생운동 주류는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 집단주의적 사업방식 등을 버리지 않았으며, 지금은 전체 학생운동을 부여잡고 함께 침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한 학생운동 전문가는 “학생운동 주체들이 변화된 정세를 능동적으로 해석 못하고 고리타분한 자기논리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단과대 학생회장만 되면 수배가 되는 외적인 요인도 크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사회경제적인 변화도 쇠락 원인으로 꼽았다. 학생들이 민중을 위해 기득권을 내던지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청년실업난으로 토익책에 파묻혀야 하는 “학생 자체가 민중”인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김원(서강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씨는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이라는 책에서 문화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학생운동의 쇠락이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엘리트가 상정했던 ‘상상된 민중공동체’가 실제 학생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불일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상상된 민중공동체는 학생사회에서 민중 지향적 하위문화를 지배하며 다수의 활동가를 생산했지만, 1990년대 이후 운동 엘리트들이 관료화하면서 이 하위문화가 역동적인 ‘대중의 정치’가 아닌 ‘제도의 정치’로 포섭됐다고 주장한다.
김재은씨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성된 주체위치의 성별화에 관한 연구’라는 석사논문에서 학생운동을 포함한 민족민주운동이 ‘열사-전사-어머니’로 이뤄지는 가족적 은유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국가 폭력에 항거하는 저항형 자살(열사=상징적 아버지)과 이를 따라 투쟁하는 남성 주체(전사=상징적 아들), 그리고 열사를 상실한 고통과 폭압적 지배하에 있는 조국의 고통을 표상하는 여성 주체(상징적 어머니)의 상징적 동원이 운동의 원동력이 돼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에 대한 대항폭력은 필수적인 것이었고, 여성은 수동적으로 배제되거나 남성화된 전사가 되어야 했다.




“운동권·비운동권 모두 모여라”

[인터뷰/ 한국대학생연합 1기 김미숙 의장]

청년실업이나 등록금 등 교육문제에 역점 둘 것

새로운 총학생회 연대체인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1기 김미숙 의장(덕성여대 4)을 10월6일 서울 수유리 덕성여대에서 만났다. 한대련은 2003~2004년 추진위를 거쳐 올해 4월30일 본조직을 출범시켰다.
현재 가입 대학 수는.

=40개 총학생회가 가입돼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한총련과 중복 가입돼 있고, 비운동권 대학도 상당하다. 한대련은 한총련과 달리 단과대 학생회의 가입도 받는데, 11개 대학의 단과대 학생회가 가입돼 있다.
한대련을 결성하게 된 동기는.

=한총련이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기여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한총련의 이미지는 1996년 ‘연대 항쟁’에서 보이듯이 한총련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언론이 왜곡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총련의 흐려진 영상으로는 모든 대학생들이 함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사상·정견의 차이가 있더라도 운동권·비운동권의 대학생들이 모두 모여 활동하기를 원했다.
조직체계가 한총련과 똑같다. NL 운동권이 한총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선택한 우회로가 아닌가.

=조직체계는 한대련이 출범하면서 많은 단체의 규약과 강령을 분석해봤는데, 한총련 것이 가장 안정적이어서 채용한 것이다. 일부에서 ‘한총련 세불리기’ 아니냐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물론 한대련의 집행부도 한총련 출신이 꽤 있다. 하지만 한총련과 달리 모두 공개돼 있다. 한대련은 대학생의 단결을 위한 조직이다.
한총련 해소와 새 조직 건설 방침이 한총련 11기(2002년)에 추인됐다. 새 조직 건설의 한 경로로서 한총련 일부가 나와 한대련을 건설한 것으로 아는데, 얼마나 진척됐나.

=지난해 한총련 등 상층 중심으로 새 조직 건설 논의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한총련 해소는 한총련의 몫이다. 한대련은 그냥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좀더 많은 대학들이 한대련으로 모일 것이다.
한대련의 정치투쟁 수위는 어떤가.

=역점을 기울이는 건 교육 문제다. 청년실업이나 등록금 문제 등 운동권과 비운동권 모두 단결할 수 있는 사안이다. 현재 전국대학생교육대책위에 한총련, 연대회의 등과 함께 참가하고 있다. 물론 통일운동도 한다. 다만 한총련처럼 범청학련에는 가입하지 않고 있다. 6·15 공동위원회에서 활동해도 통일운동 하는 데 지장이 없다. 정치투쟁은 각 대학이 준비된 만큼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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