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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구호 졸업, 구조 개혁으로

등록 2005-10-06 00:00 수정 2020-05-02 04:24

10여년간 긴급식량 지원해온 국제 구호단체들의 활동 중단시킨 북한 당국
올해 농사 풍년에 인권문제 거론하는 미국에 대한 강한 불신감까지 작용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국제사회의 식량 지원은 더 이상 필요없다.”

북한이 백기를 거둬들였다. 지난 10여년간 긴급식량 지원활동을 펴온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 구호단체들에게 사실상의 지원활동 중단 조처를 내린 것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완전 중단은 아니다. 남쪽이나 중국 등 양자간 식량 지원은 그대로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식량원조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는 북한 당국의 태도는 눈여겨볼 만하다. 북한 지도부는 뭔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내밀하게 신발끈을 바짝 동여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낱알 보관할 장소 없어 애태울 지경

북한은 지난 1995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식량난에다 가뭄, 홍수가 겹치자 끔찍히도 아끼던 자존심을 내팽개치면서 국제 사회에 공개적으로 구호를 요청하는 백기를 흔들었다. 그 뒤 열해가 흘렀다. 긴급구호의 역사치고는 좀 길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만큼 북한은 뿌리 깊은 식량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북한 당국은 식량 증산을 올해 최대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올인’을 하다시피 했다. 다행히 남쪽 등에서 수십만t의 비료를 지원받은 것에 힙입어 올해는 보기 드문 풍작을 기대하게 됐다고 한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는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해 모든 역량을 농사에 총집중·총동원해 농업생산에서 좋은 작황이 마련되었습니다.” 북쪽에서 남쪽 대북 지원 비정부기구(NGO)에 보낸 감사 편지의 한 대목이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한 인사도 “북쪽 당국자들은 노동당 창건 60돌 기념일인 10월10일께 식량 배급을 정상화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북쪽 관계자가 그동안 1인당 하루 평균 300g 수준이던 곡물 배급량을 올 초부터 250g으로 줄였지만, 올 10월10일을 기해서는 정량인 500~700g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고 귀띔했다. 올해 북한 농사가 성공작이라는 평가는 다른 데서도 확인된다.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한 기업인은 “북한에 올해 곡물 수확량이 크게 늘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면서 낱알을 보관할 장소나 그릇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업인에 따르면 북한이 생산한 알곡을 제때 거둬 탈곡한 뒤 보관하기 위한 마대 등 포장용기가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알곡 손실률이 많게는 30%에 이른다는 전문가의 견해도 있다. 어쨌든 올가을 북한 들판에는 풍년가가 흘러넘칠 듯하다.

그렇다면 올 풍년이 내년, 내후년에도 이어질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조심스러운 전망을 한다. 특히 국제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식량 지원 수용 중단 결정이 너무 때가 이르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얀 에겔란트 유엔 긴급구호조정관은 9월23일 “북한 당국의 식량원조 거부는 너무 이르고, 갑작스러운 조처”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0년간 북한의 식량 사정이 좋아지기는 했으나 2250만 인구 가운데 7%가 기아 상태에, 37%가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한마디로 북한이 만성적인 식량난에서 탈출했다고 선언하기에는 이르다고 얘기한다. 권태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최근 북한의 식량 생산이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최소 영양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아직도 국제 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해에도 긴급구호 차원의 식량은 안 받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 북한도 식량만 날라주는 국제기구는 더는 평양에 붙잡아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한때 긴급구호 식량을 북한에 나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WFP도 이제는 지원 동력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다. 올해 북한에 지원하기로 한 식량 지원 규모는 50만4천t이지만 지금까지 북한에 전달된 것은 17만t에 그친다. 더구나 이 가운데 10만t은 한국 정부가 제공한 것이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우호적 결별’을 고려할 만하다. 북한 당국이 더 곤혹스러운 것은 이들이 갈수록 적은 양의 식량을 제공하면서도 식량 배급 감시활동은 강화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WFP는 모니터링 요원 등을 계속 늘려 60여명의 인력이 북한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당국은 오는 11월30일까지 WFP의 식량 지원과 모니터링 활동을 종결하라고 요구했다.

북한은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에 인권 문제를 은근히 연계시키는 것도 못내 부담스럽다. 유엔 산하 국제기구와 NGO들이 노골적으로 인권 개선을 식량 지원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압박을 넣고 있다고 판단한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마커스 놀란드 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는 “북한의 식량난은 인권 유린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며 “북한 당국이 외국의 식량 원조를 악용한다”며 눈을 부릅뜨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분배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식량 창구의 단일화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발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앤드루 나치오스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처장은 9월26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나와 “한국 등 주변국들이 북한의 불안정을 바라지 않는 차원에서 대규모 식량 지원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나라들이 WFP 등을 통해 식량을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대북 식량 지원도 WFP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식량 배급에 대한 감시를 거부하면 더는 식량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뒷받침하고 강화시켜주는 발언이다.

식품공장 개발 등 다른 지원 요청

이처럼 북한이 유엔산하 국제기구나 국제 NGO들의 식량 지원을 거부하는 데는 미국에 대한 강한 불신감도 자리잡고 있다. 원조 방식을 둘러싸고 북-미간의 신경전이 또 한번 불꽃을 튀기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식량 지원 중단 조처를 대미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는 듯하다. 최수헌 북한 외무성 부상은 9월22일 식량 지원 수용 중단 조처를 밝히면서 그 배경으로 올해 식량 생산이 늘어난데다, 미국이 식량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도적 지원을 중단할 것을 코피 아난 사무총장에게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북한이 모든 외부 지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식량만 갖다주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식량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달라고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긴급구호 차원에서 벗어나 구조개혁에 역점을 둔 개발 지원에 역점을 두어달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제기구들도 북한 수요에 부응하는 지원 방식으로 코드를 전환할 태세다. 에겔란트 조정관은 “유엔 산하 기관들과 민간 차원의 구호기관들이 북한을 설득해 학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몇몇 식량원조 프로그램은 개발계획 명목으로 변경해 계속 원조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제니퍼 파멜리 세계식량계획 워싱턴 주재 대변인도 북한쪽과 WFP 기구의 가능한 ‘역할 변화’에 협의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이 보도했다. 그는 WFP의 북한 내 역할이 식량 배포에 국한되지 않고, 식품 공장 등 개발 원조로 불릴 수 있는 다른 프로그램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북한 원조 방식을 둘러싼 새로운 논쟁이 한반도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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