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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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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여, 화상과 더불어!

등록 2005-10-05 00:00 수정 2020-05-02 04:24

세계화상대회를 계기로 들여다본 한국 화교들의 차별받은 일생
세금은 똑같이 내면서도 한국인이 될 수 없었던 왕문영씨는 말한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똑같이 세금 내고 의무를 이행하는데… 외국인으로 여기지 말고, 같은 동포로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우대’를 바라는 게 아니라 ‘똑같이’ ‘대우’해달라는 겁니다.”

서울 은평구 신사동 자택에서 시작해 연희동 한성화교중·고등학교로, 또다시 찻집으로 옮아간 3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왕문영(54) 한성(서울)화교협회 부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격앙된 모습은 아니었어도 지천명을 훌쩍 넘긴 화교의 고단했던 삶의 토로에는 한국 사회에 대한 섭섭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박정희는 지독했다

이 땅의 화교라면 으레 겪어야 했던 신산한 삶을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7년부터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중국 산둥성 농촌 출신인 아버지가 서울 신당동에서 쌀, 보리, 콩 따위의 곡물 도매상을 하던 시절이었다. 본래 음식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곡물 도매로 전환해 화교 운영의 고량주 공장, 간장·된장 공장을 거래처로 삼아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거래처 중의 한곳이 ‘사자표 짜장’이었다.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이 온(집권한) 다음 화교 경제가 많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동해고량주’가 생기면서 아버지 거래처인 화교 배갈(고량주) 공장이 세무사찰로 두들겨맞았다고 합니다. 세무사찰을 연거푸 당한 거래처가 대금 결제를 못해주니 아버지 사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요.” 이 때문에 그는 한성화교중·고등학교 2학년(고등부)을 끝으로 학업을 접고 이듬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정부 지원을 한푼도 받지 못하는 화교학교의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당시 한성화교중·고등학교는 서울 명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북 포항의 친척집으로 보내진 그는 ‘중흥관’이란 중국 음식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만 17살 때였다. 그는 이때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36년을 중국 음식점에서 보냈다. 그동안 일급 조리사, 주방장, 음식점 주인으로 신분을 한 계단씩 높였으며, 지금은 은평구 신사동의 5층 건물 주인으로 부동산 임대업을 하고 있다.

청년 왕문영이 포항 생활을 1년 만에 접고 서울에 와서 몸을 맡긴 곳은 중화요리점인 아서원(雅敍園).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들어섰던 아서원은 1907년께 산둥성 푸산현 출신의 서광빈(徐光賓)이 설립해 1970년 문을 닫을 때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화교 경영 요리점이었다. 총 수용능력이 900여명에 이르고, 자유당과 공화당 정부 인사 등 정객들의 사교장으로 각광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기붕 국회의장, 장기영 부총리, 김철호 기아그룹 회장 등이 고객 명단에 올라 있었고, 중화민국의 대표적 석학인 린위탕과 쑨원의 아들이자 대만의 행정원장을 지낸 쑨커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아서원에서 기초 기술을 익힌 그는 1978년 일급 조리사로 서울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의 오픈(개업)에 합세했다. 후덕죽(56) 신라호텔 상무(조리담당)가 그의 입사 동기다. 왕 부회장은 서울 여의도 63빌딩 중식당인 ‘백리향’ 오픈 때(1985년)는 주방장이었다. 요리사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셈이다. 화교조리사협회 2대 회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고문으로 있을 뿐 아니라 2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세계중국조리경진대회 심판(평심위원)인 데서 그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63빌딩 중식당은 인기가 좋았습니다. 특히 88올림픽을 전후로 유명해졌지요.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가 된 63빌딩을 찾아온 외국 손님들한테서 아주 좋은 평을 들었습니다. 본래는 56층을 둘로 나눠 일식, 중식당을 뒀다가 중식당을 57층으로 옮겨 전체를 쓰게 했습니다. 장사가 잘돼 룸(방) 예약을 할 수 없을 정도였거든요.”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는 왕 부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중국집이여,밥을 팔지 말라”

조리사로서 쌓은 이력을 발판 삼아 그는 2000년부터는 여의도 맨해튼호텔(지금은 렉싱턴호텔) 중식당을 임대해 지난해 2월까지 경영한다. 전성기 때는 일꾼 16명을 거느릴 정도로 장사는 그럭저럭 잘됐다고 하니 신사동에 빌딩을 장만한 여력은 여기서 비롯된 듯싶다.

그가 화교 출신 조리사로선 비교적 성공한 축에 들게 된 배경에는 아서원에서 쌓은 기초 경력뿐 아니라 타고난 요리 솜씨가 깔려 있었다. 곡물 도매상을 하기 전 중국 음식점을 경영하며 생업을 꾸렸던 부모님의 요리 솜씨가 그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늘 공부하는 습관’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젊은 시절 제 주머니에는 늘 책 한권이 꽂혀 있었습니다. 잡지, 수필, 소설을 읽고 어쩌다 음식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줄을 쳐가며 읽기도 했습니다. 대만 등 해외에서 나온 음식 전문 잡지를 정기구독해 모방하고, 나름의 메뉴를 개발했습니다.” 사회 변천에 따른 고객들의 새로운 요구를 맞추기 위한 노력이었다. “자기계발 없이는 훌륭한 조리사가 될 수 없고, 중도 탈락하고 맙니다.”

생업에 뛰어든 지 3년 만인 1971년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4년 동안 고급 요리의 기초를 차근차근 닦은 것도 훗날 큰 힘이 됐다. 신라호텔 중식당 개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도쿄 신주쿠, 신바시 지역에서 조리사로 일한 배경 덕이었다. 현재 50대 전후에 이른 고급 중식당의 조리사들 가운데 80%가량이 일본에 갔다왔을 정도로 당시 ‘일본행’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기인 후덕죽 신라호텔 상무도 그런 예다.

그러나 그에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던 일본행은 자발적이었다기보단, 한국 사회의 ‘차별’을 피해 새로운 기회를 찾아나선 고행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동남아 지역에서처럼 화교가 한국의 경제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여겨 여러 가지 차별 조처를 시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화교들 사이에는 1960~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화폐 개혁도 현금 위주로 거래하는 화교 경제인들의 돈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얘기까지 퍼져 있을 정도다.

“박통이 온 뒤 중국집에서는 밥을 못 팔게 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해도 너무하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보리밥은 팔게 하되 그것도 일주일에 두번, 수요일·토요일에는 못 팔게 했습니다, 허허.”

물가 안정의 명분으로 자장면 값을 꽁꽁 묶은 것도 중국 음식업의 불황을 부추겼다. 당시 자장면 값이 설렁탕 값의 1.5배였는데, 지금은 거꾸로 뒤집힌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됐다는 게 왕 부회장의 설명이다. “자장면 값을 묶어놓으니까 질이 낮아질 수밖에요. 열 그릇에 고기 2근을 넣던 걸 반근으로 줄이고 물을 부어 양을 늘리는 식이었지요. 연세 든 분들은 자장면 맛이 옛날만 못하다고 하는 게 이 때문입니다. 60년대 초반 이후로 질이 낮아진 겁니다. 짬뽕도 그렇고….”

일본의 지문 날인 탓할 자격 있나

중국 음식점을 중심으로 화교 경제가 급격히 위축된 1960년대 후반 이후 화교들의 대응은 대략 세 가지 모양새를 띠었다. 경제 기반을 갖춘 이들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지로 이민을 갔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만으로 옮아갔다. 당시만 해도 대만 정부는 한국을 떠나온 화교들에게 지원금을 주어 정착을 유도했다고 한다. 그도 저도 아닌 이들은 주로 일본으로 건너가 삶의 터전을 새로이 일궜다. 왕 부회장의 가족도 그런 경우였다. 사업 실패 뒤 일본으로 건너간 그의 아버지는 지난해 타계하기까지 줄곧 일본에서 살았으며, 형제자매들도 지금껏 모두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왕 부회장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에 화교들이 뿌리를 내리는 전형적인 모습과 만나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중국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것은 일제시대인 1911년. 당시 부친의 나이는 16살이었다. 부친의 형제자매가 8명에 이를 정도로 식구가 많아 고향 땅인 산둥성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요릿집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고향에 땅을 장만하는데, 이게 결정적으로 조국을 등지는 빌미가 됐다. 1940년대 후반 중국 대륙의 적화 시점에서 지주 집안으로 몰려 토지를 몰수당하는 바람에 집안 모두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때 고향을 같이 떠난 그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중에 미군 폭격으로 생긴 상처를 이기지 못해 1·4후퇴 피난길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화교들은 대체로 공산당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것도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해졌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반공교육을 받아 한-중 수교로 대만 정부가 철수할 때는 슬픈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은 대만 정부나 중국 본토 정부나 다 하나로 여겨집니다, 허허. 대만에서 민진당의 집권 뒤 독립을 부르짖으면서부터 화교 사회에서는 대만대표부(주한)에 되레 거리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고 1남1녀까지 둔 왕 부회장의 국적은 여전히 대만이다.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을 가질 수 없고, 나이가 들어도 경로우대증을 갖지 못하는 등 갖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영주권 제도가 생겨 5년마다 한번씩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던 게 그나마 개선된 점이다. 예전엔 등록 갱신 날짜를 깜빡 잊어 벌금을 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 동포의 지문 날인으로 한참 문제가 됐는데, 그 훨씬 전부터 화교들은 외국인 등록 때 지문을 다 찍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제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일 한국인 동포는 사법고시를 통과해도 검사 임용이 안 된다고 난리를 치지만, 화교들은 한국의 사법·행정고시에 아예 응시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에서 화교들을 정당하게 대우해줘야 일본의 재일동포가 받는 차별대우에 대해서도 떳떳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항변이다.

가장 큰 걱정은 자식들의 앞날

“한국 정부가 경제위기를 겪은 뒤 화교 자본을 유치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는데, 화교에 대한 차별을 줄여나가는 게 정당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라 공평한 경쟁의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교육세를 내는데 아무런 교육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신체 부자유자의 장애인 등록도 불가능합니다.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을 몇달 동안 한국에 머무는 사람들과 똑같은 외국인으로 취급하는 게 온당합니까?”

임대료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데는 별 지장을 받지 않게 된 왕 부회장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자식들(1남1녀)의 앞날이다. 딸은 면세점에 취업해서 한시름 놓았는데, 한양대를 나와 효성 관련사에 잠시 몸담았던 아들은 아직 마땅한 일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한다. 내년 4월쯤 베이징에 한국인들의 입맛을 겨냥한 음식점을 열 준비를 하는 건 이런 자식 걱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앞으로 10년은 더 일해야 한다’는 왕 부회장은 평범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가 화교임을 실감한 것은 손수의(孫樹義) 한성화교중·고등학교 교장과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때뿐이었다.



한국 화교, 90%가 산둥 출신

서울·인천에 절반 거주, 세계적 주류인 광둥 출신은 1%

화상(華商)은 동남아시아, 미국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중국계, 곧 화교 기업인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중국이 1980년대 들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두각을 드러냈으며 1990년대 이후부터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3천만명에 이르는 화교의 80% 정도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몰려 있다.
한국 화교는 19세기 말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중국인과 그 후손이며 대부분 대만 국적을 갖고 있다. 법무부 ‘출입국관리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 화교 수는 2002년 기준 2만2699명으로 나타났다. 실제 거주하는 사람은 이보다 적은 1만8천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런 격차는 법무부 발행의 외국인등록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유학 등의 이유로 실제 생활은 국외에서 하는 데서 비롯됐다. 화교의 절반 이상은 서울, 인천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밖에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 주로 터를 잡고 있다.
한국 화교는 중국 산둥성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특징이다. 주한 대만대표부가 2002년 말 한국 각지 화교협회 호적인구 통계를 바탕으로 출신지를 조사한 결과, 산둥성 출신이 90%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허베이성 출신 3%, 둥베이(옛 만주) 출신 2%였다. 세계 화교의 주류를 형성하는 광둥 출신은 1%에 못 미쳤다.




“비즈니스 전에 친구가 되자”

중화경제권과 실질적 협력범위 넓히는 세계화상대회

세계화상대회는 전세계 화교 경제인들의 교류와 협력을 위해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제안에 따라 1991년 싱가포르 대회를 시작으로 2년마다 열리고 있다.
대회 개최지는 싱가포르, 타이, 홍콩 세 나라 경제인들의 모임인 3개국 중화총상회에서 결정한다. 2차 대회는 홍콩에서 개최됐으며, 10월10~12일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 대회는 8차. 2003년 서울 개최가 결정되기까지 일본(고베), 마카오, 영국과 경합을 벌였다.
민·관 합동기구인 제8차 대회조직위원회(위원장 원국동)는 이번 모임을 한국에서 개최하게 된 배경에 대해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한국의 이미지를 홍보하고 한국과 화상의 무역·투자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한류 문화의 확산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먼저 친구가 된 뒤 비즈니스를 하는’ 중화권 상거래 문화를 감안할 때 전세계 화상들과 인적 교류를 강화할 경우 중화경제권과 실질적인 협력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대회에는 미국 IBM PC사업부를 인수한 롄샹그룹의 류촨즈 회장, 하이닉스반도체 TFT-LCD 부문을 인수한 BOE그룹의 왕둥성 회장을 비롯해 2500여명의 각국 화상들이 참석해 정보기술(IT) 분야 등에 대한 협력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우리쪽에서는 국내 화교 300여명과 김재철 무역협회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양덕준 레인컴 사장 등 200여명이 참석한다고 대회 조직위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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