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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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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들 다 죽여버려”

등록 2005-09-01 00:00 수정 2020-05-03 04:24

1950년 7월 함안 물문 한센인 학살사건을 기억하는 세 노인의 증언
빨갱이로 몰린 주검 28구,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웅크려 죽은 채 발굴

▣ 함안=글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노인들의 머릿속에 깃든 학살의 기억은 혼미했다. 그들의 기억은 쉽게 언어화되지 못했다. 흥분한 목소리는 자주 제풀에 지쳤고,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엉엉 울었다.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이 눈까지 침범해 노인 대부분은 앞을 보지 못했다. 노인들은 “그들이 이유 없이 우리를 죽였다”고 말했다. 55년이 지난 뒤에도 노인들은 그들의 친구와 가족들이 왜 죽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의 이유는 간단할 수도, 복잡할 수도 있다. 어찌됐건 그들은 ‘문둥이’였다.

같은 말을 두세번씩 되물어가며 겨우 한뼘씩 진도가 나갔다. 그때 사건을 기억하는 노인은 이제 셋뿐이다. 당시 사건을 몸으로 견뎌낸 그들의 증언을 모아 55년 전의 학살을 재구성했다. 그들의 증언은 서로 보완적이기도 했고 어긋나기도 했다. 그때 사건을 들어 기록할 뿐인 기자가 그들의 기억 속으로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노인들은 쉽게 지쳤다. 노인들은 “꼭 우리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울었다. 1950년 7월 말 경남 함안군 함안읍 신음천 둔치에서 있었던 일이다.

“걸식을 했던 게 죄라면 죄다”

*이상열(83·함안군 함안읍 괴산리 득성농원 거주)

벌써 55년이 지났다. 6·25가 나던 해 여름이다. 내가 1923년생이니까, 그때 27살이었다. 소록도에 사는 송기선씨라고 이름을 들어봤나? 그 사람의 동생 2명을 포함해 여기서 28명이 학살됐다. 송씨의 큰 동생 이름은 차조이고 작은 동생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문둥이’였다. 나는 24살에 병에 걸렸다. 그 사건이 터졌을 때 혼인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경상남도 일대는 엉망이었다.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한센인들도 있고, 해방 이후 일본에 징용 갔다 귀국한 사람들도 많았다. 해방 조국에 돌아오면 좋은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발 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은 근심 걱정이 많다”며 ‘우환동포’라고 불렀다. 한센인도 많고, 우환동포도 많았다. 서로 섞여서 노숙하고 구걸했다.

함안에는 한센인 마을 두 곳이 있었다. 한 곳은 지금의 득성농원이 들어선 함안군 함안읍 괴산리였고, 다른 한 곳은 신음천이 흐르는 관동교 주변이었다. 두 마을 사이의 거리는 10리쯤 됐다. 우리는 득성마을은 ‘본부’, 관동교 주변은 일제 때 만든 작은 수문이 있다고 해서 ‘물문’이라고 불렀다. 본부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약을 나눠줬다.

1950년 7월 하순쯤이었다. 해거름이 되어, 물문 사람들이 개천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관동교 밑에 한 무더기, 물문 옆에 다른 무더기가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30m쯤 된다. 사람들이 개천 둔치에 작은 움막을 짓고 살았다. 나도 거기 있었다.

저쪽에서 지방 경비대(남조선국방경비대·1945년 미군정 아래서 창설된 국군의 전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국군으로 새로 편제됐다. 여기서는 그냥 군인이라는 뜻)라고 하는 사람들이 왔다. 6·25 이후 우리가 밀릴 때였다. 그때 유엔군이 함안에 와서 주둔했다. 국방 경비대, 경찰, 지방 청년단 이런 사람들이 몰려와 “환자들을 한곳에 모으라”고 윽박질렀다.

경비대장이 사람들에게 총을 줬다. 총은 M1이었던 것 같다. 군인들이 “왜 민폐를 끼치고 다니냐”고 우리를 몰아세웠다. 실탄은 아니었던 것 같고 공포탄을 막 쏴댔다. 무리 가운데 박일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김천 가서 죽었다. 그가 “분위기가 안 좋으니 빨리 피하자”고 했다. 나도 군인들 등쌀에 겁이 나 있던 터라 빨리 무리에서 도망쳐 본부로 향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어찌됐나 궁금해 본부 사람들을 모아 현장에 가봤다. 봇짐만 뒹굴 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무슨 일이 났다 싶었다.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누군가가 물어왔다. 나중에 들으니 생매장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확인되진 않았다.

전쟁이 확대됐고, 인민군이 몰려 내려왔다. 본부에 있던 한센인 83명도 부산으로 피난 갔다. 거기서 몇몇 한센인들이 그날 사건을 CIC(방첩대·지금의 기무사)에 신고했다. 1951년 2월께 CIC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CIC 사람들은 정보기관에 있어 권위가 셌다. 함안경찰서장이 나와 굽실대며 그들을 맞이했다. 엄익주와 김안식라는 사람이 수사를 했다. 엄익주는 김천이 고향이라 했고, 김안식은 서울 말씨를 썼다.

그때 주검 발굴 현장에 쫓아가 상황을 지켜봤다. 사람들이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웅크린 채 죽어 있었다. 주검이 반쯤 썩어 겨울인데도 냄새가 지독했다. 구덩이에 주검이 썩을 때 나는 시즙이 가득했다. 땅을 파내려가던 인부들이 “더 이상은 못 파겠다”고 작업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웅크린 채 죽어 있었다. 나중에 수사에 참여했던 사람에게 들으니 군인들이 죽일 때 “너희들 마지막 소원이 뭐였냐”고 물었다고 했다. 한센인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다. 한센인들이 울면서 “어차피 살기는 틀렸으니, 마지막으로 찬송 부르고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주검 28구가 수습됐다. 그 중에 여자가 8명이었고, 두세살짜리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CIC에서 주검마다 사진을 찍고 신원을 확인했다. 나이가 우리 정도 된 사람도 있고, 아이들도 많았다. 이상호 부부와 네살짜리 아들, 고성 출신의 공덕상 부부와 세살짜리 딸, 마산 출신의 서인철 부부와 한두살짜리 애기, 박태영의 동생과 송기선의 두 동생, 경북 영천 출신의 박삼석 등의 얼굴이 기억난다.

CIC가 함안경찰서에서 학살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심문했다. 심문은 밤새 계속됐다. 경찰들은 “우리는 군에서 시킨 대로 했다”고 말했고, 주변 주민들은 “우리는 잡역부로 동원됐을 뿐”이라고 혐의를 저마다 부인했다. 변명거리가 모자라자 “그네들은 빨갱이라 죽였다”고 말했다. 성경책 읽고 교회 다니는 빨갱이들도 있는가. 수사는 강도 높게 진행됐는데, 몇달 지나고 나니 아무 소식이 없었다.

머잖아 반격이 시작됐다. 여순반란에서 공비 토벌을 잘해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종원이 사건에 개입했다. 그때 그가 이 지역 경찰 책임자라고 했던 것 같다. 지방으로 연락을 해서 그 일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했다고 들었다. 이후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처벌받았는지 듣지 못했다. 빨갱이의 ‘빨’자만 나와도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떨어지던 시절이다. 그때 일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이 마을에서 사실상 금기였다.

그때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안석원이라는 노인인데, 2004년 7월에 죽었다. 그 사람은 입버릇처럼 “내가 죽으면 그때 일은 그만 다 묻히고 말 것”이라며 혀를 찼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그저 먹고사는 게 힘들었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그때 우리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걸식을 안 하면 못 살았다. 그게 우리 죄라면 죄다. 일이 터진 뒤에는 우리를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난다는 정서가 생겼다. 그러고 나서는 사는 게 좀 편했던 것 같다.

가족 단위여서 아기들도 많아

*이만조(76·득성마을 거주)

그때 나는 물문 너머 마을에 재가 환자(유리걸식하지 않고 자기 집에 사는 한센인)로 있었다. 나는 13살에 병에 걸렸다. 집에서 대풍자유라는 약을 먹었다. 음력 6월 보름 조금 넘었을 때였다. 우리 집은 사고 난 지점에서 20~3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저녁 해거름인데 갑자기 총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 ‘와다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나더니만, 사람들이 울고불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물문 손님’이라고 불렀다. 그때 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걸식하는 것 빼고는 죄가 없었다. 가족 단위여서 아기들도 많았다.

그 당시 본부에 곽만근이라는 분이 이장을 했다. 겁나서 이장과 사람들을 모아 여러 사람이 같이 갔다.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밤에 비가 조금 왔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라, 이름은 몰라도 얼굴을 보면 대번 알아봤다. 개천 둔치에 한센인들이 호밀을 키웠는데, 호밀의 키가 나만 했다. 얼마 지나 전선이 확대돼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다음해 집으로 돌아오니, 그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한다고 마을이 떠들썩했다. 그러더니 깜깜무소식이었다.

‘마을 유지 4명 처벌’ 선에서 마무리

*송기선(78·전남 고흥군 소록도 거주)

사건이 터졌을 때 23살이었다. 그때 함안 물문에 살았다. 금요일이 되면 본부로 가서 외국 선교사들이 주는 약을 타먹었다. 물문은 일제가 개천 옆에 있는 논을 보호하기 위해 뚝을 막고 물을 퍼올리던 곳이다. 그 앞에 작은 수문이 있다고 해 물문이라고 불렀다. 동생 차조·판조와 거기 살았다. 지금은 병 때문에 눈이 멀었지만, 그때는 눈도 보이고 건강했다.

어느 날 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이 밀려내려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민군이 오면 어찌될지 몰라 진주시 진양군 지수면에 사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올 결심을 했다. 열흘 만에 동네에 다시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어디 볼일 갔겠거니 했다. 방에 누워 뒹굴다 밖으로 나왔는데, ‘성한 사람’(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동네 노인이 오더니, “니네 동무들 모두 총 맞고 죽어서 저기 묻어놨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서 있는데,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어디 잘 묻어주라”고 말하고 떠났다. 울며 방방을 돌아다녀보니, 여기저기 성경·찬송가 책이 뒤집혀 있고 불 피우다 꺼진 냄비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 터졌구나 싶어 서둘러 본부로 향했다. 본부 사람들이 “군인들이 여기 와서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해줬다. 동생들의 행방을 물었다. 사람들이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이 두렵고 무서웠다. 본부에는 80명쯤 살았는데, 물문 사람들을 죽인 데 이어 본부에도 쳐들어올 것 같았다. 무서워 부산으로 피난 갔다. 거기 한센인 중에 CIC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부산 CIC 대장 엄익주 선생을 만나게 됐다. 우리가 울면서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다 죽이려 한다”고 했더니, “우리 민주법에는 그런 법이 없다”며 당장 조사에 나섰다. 마산 헌병대에서 조사를 나갔다. 1951년 2월께다.

며칠 동안 조사가 이뤄지더니 근처에 살던 성한 사람 유지 가운데 4명이 처벌을 받는다는 얘길 들었다. 그 사람은 물문보다 하류로 1km 떨어진 곳에 살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물 위에 산다고 해 ‘물 위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못 살겠다”고 여기 와 있던 군인들을 불러서 술 한잔씩 사면서 돈을 줬다. “좀 처리해달라”는 부탁했다고 한다.

저녁 지을 시간쯤에 와서 환자들을 작대기로 때려 구덩이 안에 밀어넣고 총을 쐈다는 거다. 마을 유지 4명을 처벌하는 선에서 사건을 덮었던 것 같다. 항의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전쟁통에 ‘문둥이’ 몇 죽이는 것은 죄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순반란부터 거창학살까지 여러 사건이 많았다. 성한 사람도 죽어나가는 판에 우리라고 무사했겠나. 군인들이 처벌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진주에 사는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 “차조와 판조가 죽었다”고 말했다. 여기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록도로 피했다. 혼자 된 어머니는 인천 사는 누님께 편지해 “모셔가라”고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소록도를 벗어날 수 없었고, 어머니는 8년 만에 죽었다. 이후 빨리 낫고 싶은 욕심에 약을 너무 많이 먹어 눈이 멀었다.



한센인 편견은 여전하다

일반인 700명중 35.7%가 “치료 불가능”, 34.3%는 “유전병”

학살의 시대로부터 반세기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한센인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사라졌을까. 대답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다.
한센인들의 자치모임인 한빛복지협회가 지난 4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플러스’에 맡겨 조사한 결과를 보면 그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조사 대상인 일반인 700명 가운데 35.7%는 “한센병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고, 34.3%는 “병이 유전된다”, 35.1%는 “전염성이 강하다”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르겠다”고 응답한 사람까지 합치면 절반이 넘는 국민이 병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갖지 못한 셈이다.
세 항목 모두에서 ‘그렇지 않다’고 정확하게 답한 이는 18.0%에 그쳤다.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은 ‘결핵균’과 비슷해 유전이 되지 않고, 리팜피신이라는 치료약 4알만 먹으면 전염력이 99% 사라진다. 지난해 1월 현재 등록된 한센인 수는 1만6801명이지만, 환자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성 환자는 3%인 518명뿐이다. 그 가운데 60% 정도는 집에서 생활하는 재가환자고, 전국에 흩어진 89개 정착촌에 사는 사람들은 30%쯤 된다. 나머지는 국립소록도병원 등의 의료 시설에 흩어져 있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의 악명

여순반란·보도연맹 사건에 개입했던 장본인, 한센인 학살사건도 무마

경남 함안의 ‘한센인 학살 사건’을 무마한 장본인이라는 증언이 나온 김종원(1922~63)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해방 이후 분단이 고착되는 혼란스런 해방 8년(1945~1953) 동안 무장공비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 개입해 악명을 떨쳤다. 전갑생 경남근현대사연구회 연구원은 “우는 아이에게 ‘저기 김종원이 온다’는 말을 전하면 당장 울음을 그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며 “여순반란과 보도연맹 사건 등 그가 개입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경북 경산군 중방면 380 일대에서 1922년 7월8일 태어난 그는 해방 이전 일본군 하사관으로 뉴기니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1946년 1월3일 육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참관해 소위로 임관됐고, 1948년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도로 사람의 목을 내리치는 잔인한 모습을 선보여 첫 악명을 떨쳤다.
이후 지리산 일대에 흩어진 빨치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백두산 호랑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는 1960년 5월21일치에 “1950년 8월25일 양산군 물금면 등 7개 면 주민 730여명이 공비토벌을 하기 위하여 주둔했던 김종원 부대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총살됐다”는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는 무식하고 단순한 성격이었던지, 웃지 못할 일화를 많이 남겼다. 1949년, 마산 16연대 부연대장 시절 마산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 운동장에 마산 시내 전 중학생을 집결시키고서는 기관총을 단 지프차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 “반민특위에서 나를 잡으러 오면 3초 안에 권총으로 모두 쏴 죽이겠다”고 말했다. 1950년대 초반 경찰국장으로 재직할 때는,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큰 고생을 한다는 말을 듣고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고 지시해 간부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는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국회 조사를 막기 위해 국군을 공비로 가장시켜 현장으로 가던 국회의원들과 군경검 합동조사반을 습격했다. 이 사실이 들통나 1951년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김종원을 이순신 장군에 비유해 “오직 애국충정뿐인 그가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고초를 지르고 있다”는 성명서 초안을 작성해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전북경찰국장·경남경찰국장·경북경찰국장·치안국장·경찰전문학교장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했고, 을지무공훈장·금성충무무공훈장·미국 자유훈장 등 수많은 무공 훈장을 탔다.
1960년 5월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서울지검에 구속됐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당뇨병에 걸려 석방됐으나 1963년 12월17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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