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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 노무현을 쏘다

등록 2005-08-18 00:00 수정 2020-05-03 04:24

[도청 테이프의 미래]

호남 지지율 반토막난 열린우리당에 비해 한나라·민주당은 수렁탈출
“테이프 진실 까발리자”는 정면승부론 거세지면서 불똥 어디로 튈지 몰라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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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청 파문의 본질인 정계·언론계·재계의 추악한 커넥션을 규명할 YS 정권 당시 권력형 도청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불법을 시정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무현 대통령이 음모의 주역으로 몰린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 그저 허탈감과 분노를 느낄 뿐이다.”(열린우리당 수도권 한 의원)

“현 시점까지 도청 파문의 최대 피해자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다. 국정원의 고해성사로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이미 정계를 은퇴하신 분이다. 하지만 도청 파문과 아무 관련도 없는 노 대통령의 호남 지지율은 반토막 났고, 민심은 계속 동요한다. 불법 도청의 추악한 진실은 덮이고, 정치 게임만 존재하는 황당한 현실에 직면했다.”(청와대 한 핵심인사)

YS 정권의 불법 도청 전담부서 미림팀과 그들이 생산한 도청 테이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시작된 불법 도청 파문. 숨가쁘게 달려온 20여일을 최일선에서 지켜본 여권 핵심 인사들은 “본전도 못 찾았다”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현재까지의 대차대조표를 뽑아보면 최대 피해자는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진단이 주류를 이룬다.

연일 DJ 칭송하는 여권 핵심 인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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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림팀의 불법 도청, ‘이상호 X파일’이 언론에 알려진 초기만 해도 여권은 상대적으로 느긋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재계와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구여권 세력의 추악한 커넥션, YS 정권 시절 안기부의 공작정치를 규명할 폭탄으로 작용하기를 내심 기대한 때문이다. 그러나 공운영 전 미림팀장 집에서 274개의 불법 도청 테이프가 발견된 뒤 언론과 정치권, 검찰이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 공개 및 도청 테이프에 담긴 불법 행위에 대한 조사의 적절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면서 정치적 공방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특히 8월5일 국정원의 불법 도청 조사 결과 발표는 이번 파문을 완전히 정치적 진실게임으로 뒤바꿔놓았다. 국정원의 고해성사 과정에서 DJ 정권 시절 도청 사실이 공개되자 민주당은 김대중 정권과 단절하기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음모론으로 몰아갔고, 도청 파문은 여권을 겨눈 부메랑이 된 것이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DJ의 분노를 달래고, 동요하는 호남 민심을 추스르는 데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8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진정성을 해명했던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거의 매일 “DJ를 겨냥한 음모는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DJ쪽에서 본말이 전도됐다며 심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10일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자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더욱 다급한 모습이다.

여권 핵심 인사들은 연일 DJ를 칭송하며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DJ 정권의 질적 차별론을 설파한다. 음모론을 주창해온 민주당의 지역주의적 속성을 성토하는 데도 열을 올리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화·민주·인권·개혁의 지도자다. 가까이서 본 영웅은 없다고 하는데, 내가 본 김대중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존경심과 경외감이 두터워지는 특이한 지도자이시다.”(전병헌 열린우리당 대변인) “어떻게 평생 인권을 위해 살아온 DJ와 YS 정권을 공동 비교할 수 있냐. DJ는 정말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분노를 이해한다.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민주당의 태도는 DJ는 물론 민주화 세력과 참여정부에 대한 모독이다.”(최재천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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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파문이 좀체 가라앉지 않고, 여권 안에서는 김승규 원장을 비롯한 국정원 책임론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온다. “국정원이 고해성사를 한 것은 좋았는데, YS 정권의 정치공작적 도청과 합법적인 감청 과정에서 일부 불법 정보가 흘러들어온 DJ 정권의 감청을 동일하게 취급한 것은 분명 국정원의 실수다. 문제가 있었다.”(우상호 의원)

국정원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5일 국정원 보도자료와 김만복 기조실장 회견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 뒤 국정원 간부회의에서 불법 도청 근절을 지시했고, 수시로 원에 와서 그 점을 강조했는데 손쉽게 정보를 수집하던 과거의 타성에 벗어나지 못한 일부 직원이 김 전 대통령도 모르게 불법을 저질러 누를 끼친 데 상당히 송구하다는 취지를 밝혔다”면서 “40여명의 전·현직 국정원 직원이 검찰에 불려갈 각오를 하고 과거의 악행을 털고 가자며 완전히 발가벗는 결단을 한 국정원에 책임을 돌리는 게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무제한 진실게임의 국면으로

여권의 분란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적지 않은 정치적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불법 도·감청=한나라당’의 등식으로 고전하던 한나라당은 노무현-DJ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일단 수렁에서 빠져나왔다. 오히려 여권의 분란을 부추기며 ‘청와대 도청 테이프 2월 인지설’로 역공을 펴고 있다. 민주당도 호남 지역 지지율이 열린우리당을 앞서는 등 적지 않은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 시점의 대차대조표일 뿐이다. 진실게임으로 내몰린 여당 안에서 274개의 도청 테이프가 담고 있는 진실을 나오는 족족 낱낱이 까발리자는 정면승부론이 거세지면서 앞으로 도청 파문이 어디로 옮겨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닥친 때문이다. 우상호 의원은 “처음에는 신중론이 강했지만, 이제 더 이상 손해 볼 게 없는 만큼 완전히 까발리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다”고 전했다. 청와대의 한 핵심 인사는 “이제 그 누구도 도청 파문의 앞길을 예측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다. 과도하게 남의 약점을 잡고, 정치적 노림수로 제기한 음모론이 DJ까지 삼키면서 이제는 무제한 진실게임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앞으로 어느 누구도 보호할 수 없고,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나오는 대로 낱낱이 밝혀내는 것 말고 해법이 없다”고 말했다. 검찰이 쥐고 있는 274개의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이 밝혀지고, 관련 수사가 진행되면 그 화살이 YS를 향할지 DJ를 향할지,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 수렁에 빠질지 열린우리당이 빠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진실게임 경쟁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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