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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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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개발 부담에서 벗어나고파”

등록 2005-08-03 00:00 수정 2020-05-03 04:24

북한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돌려 비용 탈출 하고 싶지만
미 강경매파와의 상호 불신으로 6자회담 큰 성과 어려워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부시 대통령과 두 손을 마주 잡고 밤새워 춤을 추고 싶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언젠가 평양을 방문한 의회 관계자에게 이렇게 노골적인 구애를 편 적이 있다. 극단적인 미움과 애정은 종이 한장 차이라고 했던가. 그에게 미국은 철천지원수이자 연애의 대상이었다. 이런 태도는 일찌감치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워싱턴을 향해 보냈던 메시지이기도 하다. 김일성 주석은 지난 1980년 처음으로 미국 정치인인 스티븐 솔라즈 당시 미 하원 외교위 아태소위원장을 만난다. 당시 한반도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1979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고, 80년에는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혼란의 극치를 달렸고, 북한에 의한 ‘제2남침설’이 언론 지면을 뜨겁게 달궜다.

‘김일성-솔라즈 대화록’에서 시작된 염원

그러나 정작 김일성 주석은 솔라즈 의원을 만나 북-미 관계 정상화 문제를 논했다. 1990년대 말 미국에서 외교문서 관련법에 의해 공개된 ‘김일성-솔라즈 대화록’은 눈여겨볼 만하다. 지금 베이징에서 박진감 있게 펼쳐지는 6자회담과 특히 이 틀 안에서 진행되는 북-미 양자 접촉에서 북한의 전략은 무엇이며, 그들이 진실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김일성 주석의 발언은 지금도 김정일 시대 외교의 핵심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김 주석은 솔라즈에게 북-미 관계와 관련해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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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먼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면서 문제를 풀어나가자. 이 문제가 풀린다면 다른 문제들도 모두 풀릴 것이다.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평화협정 체결이 급선무다.” 나아가 김 주석은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한지 비교적 솔직하게 설명한다. 당시에는 북-미보다 남북간 사이가 매우 나빴던 게 지금과 다른 점이다. 그는 “북과 남은 현재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에 있다. 따라서 군사비 지출은 미국과 남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다. 남한은 미국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나라는 없다”면서 우리는 군사비 부담을 다른 어느 나라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지금의 북한 지도부가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아붓는 핵 개발 및 유지비에 얼마나 큰 부담을 갖고 있는지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같은, 평화도 전쟁도 아닌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런 군사비 부담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 부러워할 나라도 없고 더욱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이처럼 오래전부터 북-미 관계 정상화를 꿈꿔왔다. 7월26일부터 베이징에서 진행된 6자회담에서 북-미간 최대 쟁점도 핵폐기와 관계 정상화의 순서와 조건에 맞춰진 듯하다. 미국은 북한의 ‘선 핵폐기, 후 관계 정상화’를 요구했고, 북한은 그 반대다. 김계관 북쪽 수석대표는 기조연설에서 “조선(한)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최고 수뇌부의 확고한 의지다. 미국의 핵 위협이 제거되고, 조-미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모두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앞서 지난 7월2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와 <조선신보> 기사, 그리고 24일 <노동신문> 논설도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체제 구축을 집중 거론했다. 특히 북한 외무성의 대변인 담화는 눈길을 끈다. 대변인은 “조선반도에서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게 되면 핵 문제의 발생 근원이 되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 정책과 핵 위협이 없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히 비핵화 실현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쪽의 속내를 명징하게 드러낸 셈이다.

초보적 원칙도 정권 바뀌면 휴지조각

평화협정의 체결 혹은 관계 정상화는 멀고 먼 길이다. 남쪽 수석대표인 송민순 차관보는 7월27일 이와 관련해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지향점이기 때문에 당장 관계 정상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에 대해 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미사일, 인권 개선 등을 거론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의구심은 미국 부시 행정부가 진정으로 관계 정상화를 원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쪽 수석대표는 관계 정상화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조건이 까다롭다.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관건이나, 과연 그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보수세력들이 ‘악의 축’으로까지 규정한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지지할지는 점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는 중국을 포위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 추진하는 이 거대 프로젝트의 명분은 ‘현존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다. 북-미 수교를 통해 북한 위협이 제거된다면 부시 행정부의 핵심지휘부를 구성하는 강경매파들의 설 땅은 없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평화협정 체결이나 관계 정상화는 미국 내의 정권 교체 뒤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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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6자회담에서 공동발표문 등의 형식으로 북-미간에 초보적인 합의가 이뤄진다 해도 이의 영속성은 기대하기 힘들다. 양자간에 근원적인 불신을 해소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합의는 최근의 핵 위기를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강경 보수파들 사이에서는 “북한에는 정권 유지가 가장 중요하며, 긴장 완화를 위한 제안은 그들의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하다”는 식의 뿌리 깊은 불신이 존재한다. 이는 북한의 강경 세력들이 품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미국이 자신들이 요구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는 한 믿을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와 어렵게 맺었던 각종 합의들이 부시 정권으로 바뀌면서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된 현실을 생생히 지켜본 이들이다. 이번 6자회담에서 김계관 북쪽 수석대표가 기조연설에서 ‘평화공존을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 구축’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따라서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한꺼번에 폐기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번 6자회담에서 참가국들은 최초로 ‘공동문건’ 작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문건에 북한의 핵 폐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 문제가 어떤 식으로 담길 것인지가 최대 관심사다. 미국 부시 행정부도 이라크 전쟁이 오히려 미국과 미 국민의 안전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비판 여론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북한을 상대로 더는 전쟁을 치를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북한 핵 개발을 마냥 앉아서 지켜볼 수도 없다. 북한과의 일시적인 타협이 불가피한 셈이다. 힐 미국쪽 수석대표는 4차 6자회담이 극적인 출구를 마련할 가능성은 낮지만, 유관국들이 ‘공통된 원칙들’에 대한 성명에 합의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북한도 첫 단계 행동원칙에는 합의할 자세다. 빈사 직전의 경제 숨통을 조금이라도 틔워놓으면서 다음 기회를 엿볼 요량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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