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정체성 강화와 내년 지방선거 승리 위해 대표·최고위원들 곧 총사퇴
내년 1월 새 진용… ‘거대한 소수 전략’ 원내 진출 1년여 만에 사실상 파산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그냥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릴 것인가, 전면적인 지도부 물갈이와 진보적 기치로 전면 승부할 것인가.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를 내걸고 원내 진출에 성공한 지 1년여, 요즘 민주노동당의 고민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차라리 시민운동을 해라?
“참여연대 수준의 구호도 못 외칠 것이라면 왜 민주노동당을 만들었냐. 차라리 그만두고 시민운동을 하면 될 것 아니냐.”(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지금처럼 보수 정당이 제기한 현안만 따라잡다가는 민주노동당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이제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등 당 소속 스타급 의원들이 병원 국유화, 토지기본법 재정, 무상교육 무상의료 실시 등 민주노동당의 강령과 이념을 분명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내걸고 정면승부해야 한다.”(민주노동당 서울지역 지구당 위원장)
원내 진출 1주년 기념 토론회, 최고위원회 출범 1년 평가 워크숍 등을 통해 반성과 새 출발을 거듭 다짐했지만 서울 여의도 민주노동당사에는 진보적 기치를 더욱 선명히 내건 정면승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한발 더 나아가 최고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당 지도부가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자질과 능력이 안 된다며 최고위원 총사퇴를 통한 지도부 전면 교체, 민주노동당의 첫 실험인 당직·공직 분리제도의 전면적인 수정·보완을 모색하는 움직임까지 구체화되고 있다.
“당 지도부라면 민주노동당의 역사와 강령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보적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자기 역할을 감당할 경험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당의 역사는 물론 당이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감도 없이 자기가 해온 방식대로 당을 운영하려는 최고위원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이런 최고위원들이 물러나고 판을 다시 짜야만 당이 살 수 있다.”(전직 한 핵심 당직자)
이런 요구는 한곳으로 모인다. 2012년 집권을 공언한 민주노동당에는 지금 시민단체나 양심적인 보수 정치인들이 외치는 수준의 양심운동만 있을 뿐,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할 정책적 청사진과 이념을 제시하는 진보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적 정책에 딴죽 거는 최고위원들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지지율 하락의 핵심 원인을 당직·공직 분리에 따른 최고위원회와 현역 의원단의 의사소통 부재, 보수정당 중심의 현실정치 지형과 현역 의원 10석이라는 소수의 한계, 국가보안법 폐지 등 정치적 구호에 매몰된 투쟁 전략 탓으로 돌렸다. 개선책도 당연히 그쪽에 집중됐다. 그러나 최근 당 안팎에서 좀더 본질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핵심 지도부의 진보적 감수성과 철학 부족, 당 강령과 진보적 대의를 실현하려는 고민이나 학습 없이 ‘거대한 소수 전략’만 외치는 오만함, 당 강령을 반영한 진보적 정책에 오히려 딴죽 거는 최고위원들의 자질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위기 원인 분석의 변화는 원내 진출 이전에 보여준 진보적 어젠다 설정을 위한 전투성은 상실하고,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수준의 정책적 현안 실현에 만족하는 쪽으로 길들여졌다는 나름의 반성에서 출발한다. 반성론의 근거가 된 실책은 지난 1년여 동안 수도 없이 축적됐다.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진보정당의 최고위원회가 한국과 일본의 첨예한 대립이 계속됐던 독도 문제에 대해 군대 주둔과 개발론을 대안으로 내걸었다 철회한 해프닝은 당 지도부의 진보적 감수성 부족을 웅변하는 대표적 사례에 불과하다.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훨씬 심각하게 지적하는 것은 참여연대 조세개혁실장 출신인 윤종훈 회계사가 당 정책연구원으로 추진했던 부유세 도입을 위한 조세개혁 프로그램이 최고위원들의 이해 부족으로 좌절되고, 윤 회계사가 당을 뛰쳐나간 사건이다. 한 최고위원은 “윤종훈 회계사가 당시 최고위원회에 보고한 1세대 1주택 양도세 폐지, 자영업자 간이과세제 폐지 정책은 민주노동당이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던 부유세 도입과 ‘부자에게는 세금을 더 물리고 서민에게는 복지 혜택을 확대한다’는 조세 형평성 제고로 가는 핵심 정책이었다”면서 “하지만 일부 최고위원들은 이 정책이 민주노동당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저 국민이 반발한다며 반대했고, 결국 윤 회계사가 ‘이 당에 진보가 존재하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태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17대 국회 출범 이후 정치권의 주요 화두였던 사립학교법 개정안, 집값 안정 대책, 언론관계법 개정안 등을 다루는 과정에서 드러난 민주노동당의 방어적 태도 역시 핵심적 한계로 지적받고 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의 경우 보수정당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사학재단의 공익이사 비율, 비리 재단 관계자의 사학재단 복귀 제한 시한 등을 놓고 논쟁을 거듭했다. 이 주제가 사학의 민주성 확보를 위한 주요 논쟁거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보수정당이 주도하는 이슈에 매몰됐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무상교육, 학교의 국립화를 지향하는 만큼 사립대학의 국립대 전환, 정부 재정에 의한 사립학교 인수, 대학 서열화 폐지 등 진보정당의 정체성에 걸맞은 좀더 진보적인 대안을 제기했어야 하는데, 사학을 말살하는 빨갱이라는 이념 공세를 우려해 문제 제기 자체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지난 한해 동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부동산 대책도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민주노동당이 역점적으로 내놓은 대책은 주택원가 전면공개였다. 그러나 이 방안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청와대 안에서조차 찬성론자가 적지 않지만 그 효과에 대한 확실성이 엇갈리는 대증요법이다. 민주노동당 안팎에서도 국민들에게 집을 좀더 싸게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춘 원가 공개 주장은 92년 대선 때 국민당 후보로 나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아파트 반값 공급론’과 원론에서 큰 차별성이 없는 대책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오히려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단순히 집을 값싸게 공급하는 대증 처방이 아니라, 모든 주택의 장기임대화, 토지공개념 도입 등 주택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따른 투기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치는 진보적 대안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비핵화 강령을 갖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핵무장 발언에 대해 아무런 비판적 의견도 제시하고 못한 채 침묵하고, 민주적 경제 체제를 지향하는 강령에도 불구하고 언론관계법 개정 과정에서 언론사 내부의 민주주의, 즉 편집권 독립을 실현하는 곳에 국가 차원의 이익을 부여하는 방안을 전면화하지 못한 것 등도 민주노동당의 정체성과 진보 감수성을 의심받게 한 사례로 지적된다.
"정치공학적 처신은 위험하다"
더욱이 최근 열린우리당과 연합해 윤광웅 국방부 장관 해임안을 부결시키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구상에 대해 검토 가능성을 열어놓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과 관련해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위협하는 행위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의 장석준 상임연구위원은 “역사 발전 속도가 급박한 한국에서 당장 국회의원 10석 이상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민주노동당이 소수로 반짝했다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중압감에 시달리는 것은 이해하지만, 열린우리당의 표를 빌리는 고도의 정치게임을 통해서 민주노동당의 몸값을 올리려는 정치공학적 처신은 위험하다”고 일갈했다. 장석준 연구위원은 “복지 확대, 비정규직 문제, 노동 유연화, 노동자 내부의 차별 문제 등에서 민주노동당과 함께 가면 실현할 게 있다는 진보적 메시지와 차별성이 담긴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집중하는 게 민주노동당의 현실 정치공학적 게임을 통해 당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이렇듯 당 강령에 충실한 정책적 의제조차 선도적으로 제기하지 못하면서 진보적 감수성과 철학을 의심받는 상태에 이른 원인은 무엇일까.
일단 핵심 당직자들 가운데는 객관적 현실, 주체적 역량의 한계를 탓하는 목소리가 많다. 김창현 사무총장은 “최고위원들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아무리 들어도 지나침이 없다”면서도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총선에서 공전의 히트작이고 구호나 내용도 옳지만 어떻게 민주노동당의 주장을 실현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고민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민주노동당이 국민들에게 10년만 고생하면 유토피아가 온다는 식으로 외치기만 할 경우 자칫 ‘공자님 당’이나 ‘폼만 잡는 바른생활 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어 좌고우면하는 것”이라고 나름의 고충을 털어놨다.
최규엽 최고위원도 “당직·공직 분리 원칙에 기초한 최고위원제 도입 초반의 시행착오, 과거 당의 지도급 인사 대다수가 원내에 진출한 데 따른 인재풀 부족, 거대 야당 중심의 정치판에서 10명의 현역 의원이 갖는 현실적 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 법제실장으로 상근하는 김정진 변호사는 “비록 덜 다듬어지고 완결성이 떨어졌지만, 부유세 도입 등 양극화 해소와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민생 현안에 관한 진보적 의제를 몇년간 꾸준히 제기한 결과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나타난 것”이라며 “초심으로 돌아가 보수언론과 보수 정치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정체성이 담긴 정책들을 계속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오히려 “참여예산제, 주민소환제, 부동산 등기부에 거래가격 기재 등 과거 민주노동당이 선도적으로 제안한 정책대안들이 기성 정당과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면서 “거대 정당에 맞춰 굴러가는 의사 일정 등 원내 진출 뒤 닥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부족, 과거 선도적 정책을 제시하던 민주노동당의 장점을 망각한 채 정책적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게 더욱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 밖에 진보정당의 지향점과 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최고위원 등 지도부와 당원들에 대한 당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 부족, 세 불리기식 당원 배가운동에 몰두하는 게으른 진보의 문제점도 위기 상황을 야기한 원인 목록에 추가됐다.
당직·공직 분리 규정도 오는 10월 개정
그 진단이 어떻든 현재 위기 상황을 돌파할 묘책을 찾아야 한다는 데는 민주노동당 구성원 누구도 이견이 없다. 최근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신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5월부터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로드맵 1단계를 제시하고 여론의 지지를 결집 중인 민주노동당은 최근 진보적 색채가 한층 강화된 정책 대안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지난 7월7일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의가 토지기본법 제정 등 보수정당과는 차별화된 진보적 부동산 대책을 제시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이 대표적이다. 김창현 사무총장은 “그동안 당이 제시한 분양원가 공개는 대증요법에 불과하다는 반성과 함께 토지공개념 강화, 주택공영화를 공격적으로 제시하자는 합의에 이르렀다”면서 “다만 과거 노태우 정부가 입안한 토지공개념 관련 법안들이 헌법 불일치 판결을 받아 폐기된 만큼 민주노동당은 헌법을 고쳐서라도 토지기본법을 제정하자는 대안을 제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편 진보적 감수성과 역량이 떨어진다는 당 안팎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아온 현재의 최고위원들도 조기에 사퇴하고, 지도부를 백지 상태에서 다시 구성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3명의 당 최고위원은 <한겨레21> 기자에게 “현재 최고위원들의 임기는 내년 6월6일까지지만 당의 정체성 강화와 내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조기에 포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면서 “내년 1월에 최고위원 선거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도 이미 핵심 당직자들에게 올 12월께 대표직을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내년 1월에 당 대표를 포함한 민주당 지도부가 전면적으로 새롭게 짜일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노동당 핵심 지도부는 또 특정 계파가 최고위원회의를 싹쓸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는 평가를 받아온 현행 ‘1인7표제’ 최고위원 선출 방식은 물론, 최고위원과 현역 의원 사이에 의사소통을 막고 당 지도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의 표적이 된 당직·공직 분리 규정도 오는 10월 중앙위원에서 개정할 방침이다.
일단 최고위원회 선출 방식은 1명의 당원이 여성후보 2명, 남성후보 2명에게 기표하는 ‘1인4표제’가 가장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7명의 선출직 최고위원을 특정 계파가 연합해 완전히 독식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당직·공직 분리 제도는 현행 제도 고수론과 분리 원칙은 지키되 현역 의원들이 당 핵심 지도부에 진출할 길을 열어주자는 개정론이 맞서고 있다. 개정론자들은 △당대표에 한해 당직·공직 금지 규정을 풀어 현역 의원도 대표를 맡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당 3역에 한해 금지 규정을 풀어 의원들에게 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직을 개방하는 방안 △사무총장을 제외한 모든 당직을 의원들이 겸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 3개 안을 놓고 의견을 수렴 중이다.
10석의 현역 의원이 진보 진영 전체와 결합해 정국을 주도하는 ‘거대한 소수 전략’이 원내 진출 1년여 만에 사실상 파산한 민주노동당에 최근 불어닥친 진보적 정면승부론과 다양한 변신 노력은 과연 지지율 하락의 수렁에 빠진 민주노동당을 살려낼 묘약이 될 것인가. 오는 10월 중앙위원회의 당직 선출제도 개선, 내년 1월 진용을 갖출 새 대표와 최고위원단 구성, 그리고 이들이 선택할 정책에 따라 그 성패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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