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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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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표 신남북 시대 열리나

등록 2005-06-28 00:00 수정 2020-05-02 04:24

박근혜 대표 제치고 유력한 대북특사 프리미엄 거머쥐어
위상 급등했지만 합의내용 이행력과 국내 정치력에선 아직 미지수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은 과연 ‘꿀’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

김 위원장은 6자회담 복귀 의사를 정 장관을 통해 밝힘으로써 그의 정치적 위상을 두둥실 띄워주었다. 정 장관은 남북 관계를 떠나 국제 외교 무대에서도 화려하게 데뷔하는 이익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6월21일부터 나흘간 서울에서 열린 15차 장관급 회담에서는 무려 12개항의 공동보도문에 합의하는 등 남북 관계는 6·15 정상회담 직후 분위기를 재연하고 있다. 장관급 회담에서 처음으로 남과 북은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최대 현안인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조처를 취해나가기로 합의했다. 바야흐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 주도의 신남북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양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도 물먹이다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는 정 장관이 표정관리도 힘들 정도로 남북 관계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그렇다면 김 위원장은 어떤 계산 아래 정 장관에게 이런 파격적인 성과들을 안겨주는 걸까. 김 위원장의 속내는 다소 복잡하게 비친다. 국내외 정치적 실리를 모두 겨냥한 다목적 노림수가 엿보인다. 김정일-정동영 면담이 더 눈길을 끄는 까닭은 이 두 사람의 만남이 김 위원장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사이의 미묘한 균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4월 중국을 방문해 후 주석을 북으로 초청했으며 후 주석이 이를 받아들인 바 있다. 후 주석은 방북을 약속해놓고도, 방문 시기를 미뤄왔다. 국제 사회의 눈과 귀가 중국이 과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쏠려 있는 탓에 후 주석으로서는 북쪽으로부터 뭔가 확실하고 긍정적 답변을 보장받지 않고서는 선뜻 평양에 날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김 위원장은 후 주석이 아닌 남쪽의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6자회담 복귀를 약속해버렸다. 꾸물대던 후 주석의 체면이 적잖이 구겨진 셈이다. 북한이 오는 7월 김 위원장이 밝힌 대로 6자회담장에 나온다면, 그 공은 순전히 정 장관에게 안겨지게 됐다.

김 위원장이 정 장관 개인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해서 큰 선물을 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남북 당국간 공조의 필요성 때문에 정 장관을 창구로 활용한 것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정 장관을 만나 주요 현안에 합의한 것은 역시 ‘정 장관 띄워주기’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정 장관이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라는 것을 김 위원장이 모를 리 없다. 그가 정 장관을 단순히 통일부 수장으로만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보 당국 관계자의 조심스런 진단이다. 핵 위기와 내부 경제난 악화 등 어려운 국내외 정세를 돌파하기 위한 막판 뒤집기를 시도하는 측면도 있으나, 김 위원장은 일단 정 장관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듯하다.

관계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여러 경로를 통해 정 장관의 대북 인식과 정책 성향, 국내 정치력과 위상, 다음 대권 주자로서 당선 가능성 등을 파악하려 애써왔다.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꼼꼼히 따져본 것으로 알려진다. 앞으로 본격적인 남북 화해협력 시대를 이끌어갈 동반자로서 그의 자질을 시험해보려는 뜻도 담겨 있는 듯하다. 극심한 보혁 갈등을 겪는 국내 정치적 지형을 비교적 소상하게 꿰뚫고 있는 북한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워 지켜보고 있는 대목은 정 장관의 국내 정치력이다. 정 장관이 민족 공조와 국제 협력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핵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정국이 꽉 막혀 있을 때 얼마나 돌파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김 위원장이 정 장관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다고 믿기는 아직 어렵다. 우선 그는 정 장관이 그와 약속한 합의 사항들을 얼마나 순탄하게 이행할지를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 남쪽에서는 각종 합의 이행 지체의 책임을 김 위원장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으나, 북쪽에서 보는 시각은 사뭇 다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의 정치력, 지도력의 부재가 미국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지도 못하고, 국내 보수 세력들에 밀려 주도권을 놓쳐 합의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고 본다. 6·15 공동선언 이행의 지체도 마찬가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 장관은 이제 시험대에 막 오른 셈이다. 김 위원장을 만나 주요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여유를 부리기는 이른 것이다.

정동영과 박근혜의 미묘한 경쟁의식

애초 김 위원장은 비슷한 차기 대권 후보인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에게 적잖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가 야당 대표이지만 남북 교류협력을 가로막는 여러 악법을 없애고 바꾸는 데 앞장서거나, 적어도 중간에서 훼방은 놓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박 대표도 당내 보수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 매체들은 한나라당과 보수파 의원들에게 욕을 퍼부었을망정, 박 대표 개인을 겨냥하지는 않았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박 대표와의 ‘절연’이 아직은 부담스럽다. 박 대표 역시 다음 대권 경쟁의 선두 언저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2002년 5월11일 방북할 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 대표는 정동영 장관 못지않은 환대를 받았다. 환영만찬에 북쪽 대남 부문 실세들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김용순 노동당 중앙위 비서를 비롯해 이번 김정일-정동영 면담을 이끌어낸 막후 실세인 림동옥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도 함께 얼굴을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이례적으로 박 대표를 ‘여사’로 부르게 하고, 대표적인 실세들을 내보내 깍듯이 예우하게 했다. 그리고 박 대표를 직접 만나서 굵직굵직한 남북 관계 현안들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그때도 1시간의 단독 면담에 이어 2시간 동안의 만찬이 이어졌다. 박 대표는 동해안 철도 연결이나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6·25 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국군의 생사 확인과 금강산댐 남북 공동조사단 구성 등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받아냈다. 김 위원장은 정 장관에게 언급한 것처럼 “적절한 시기에 (답방)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말도 했다.

박 대표는 김 위원장 면담 이후 일약 남북 관계 해결사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김 위원장은 이번 정동영 장관을 만나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박 대표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김 위원장이 박정희에 대해 독재한 얘기는 하지 않고, 좋은 얘기만 하더라.” 정 장관이 6월20일 박 대표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전한 말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정 장관이 애초 김 위원장의 박정희 평가 대목을 공개하지 않다가 나중에 마지못해 밝힌 점이다. 박 대표가 방북 결과를 보고하겠다고 면담을 요청한 정 장관을 애써 만나려 하지 않고 물리친 점도 눈에 띈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경쟁 의식이 엿보인다. 박 대표는 북핵 문제와 남북 관계의 꼬임새가 이어진다면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대북 특사를 자임할 요량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참여정부가 그를 대북 특사로 수용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말이다. 어쨌든 박 대표쪽으로서는 정 장관이 선수를 침으로써 김 위원장과의 면담 이후 누려온 유력한 대북 특사 프리미엄을 잃게 됐다.

발을 헛디디면 천길 낭떠러지

정 장관은 김 위원장과의 면담 이후 거침없는 행보를 내딛고 있다. 이번 15차 장관급 회담에서 그는 처음으로 원형으로 좌석을 배치하는가 하면, 공동보도문을 프레스센터에서 북쪽 단장과 함께 읽고, 북쪽 대표단을 청와대까지 데려가 노 대통령을 예방케 했다. 명실상부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몫을 톡톡히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김 위원장과의 합의 이행 주체로 우뚝 섬으로써 남북 관계에서 당분간 그의 위상은 누구도 넘보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남북 관계는 예기치 못한 난관에 의해 언제든 난파될 수 있다는 점에서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합의사항들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풀어나가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과거 역사가 말해주듯 남북 관계에서 정 장관이 발을 잘못 헛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당장 북쪽과 합의한 주요 사항들에 대한 국내 지지 기반을 넓혀나가면서 민족 공조와 국제 협력의 조화를 이루는 것도 발등에 떨어진 뜨거운 감자다. 그는 일찍이 겪지 못했던 시험대에 올라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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