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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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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관들에게 ‘대체복무’ 를

등록 2005-06-28 00:00 수정 2020-05-02 04:24

매년 입대 24만명중 10%가 보호·관심대상자, 45%가 부적응 우려
병사들의 의견 반영해 재배치·정신상담 청구할 수 있게 제도 정비해야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미군정 시기와 6·25 때 미국의 군사 고문관들이 우리나라에 파견됐다. 이들은 한국말이 서투르고 한국 실정에 어두워 여러 면에서 어수룩한 행동과 실수를 많이 했다. ‘고문관’은 어수룩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 됐다.(국어대사전, 금성출판사)

부적응자를 미워하게 만들지 말자

지난 2001년 경기도에 있는 한 사단에 근무하던 유선수(가명·21) 일병도 고문관으로 불렸다. 그는 고참들한테서 심한 괴롭힘과 왕따를 당했다. 하도 맞아 턱이 다 나갔다. 휴가를 나온 그는 부대에 복귀하는 게 두려웠다. 유 일병의 아버지는 자식을 데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뾰족한 답은 없었다. 탈영을 시킬 순 없는 노릇이어서 일단 유 일병을 설득해 부대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부대장을 찾아갔다. 부대장도 지휘 부담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단체생활을 힘들어하는 유 일병이 당시에 복무 부적응자로 판정받아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부대장은 언제 때릴지 몰라 고참들을 무서워하는 유 일병을 물차, 발전기, 양수기 등을 관리하는 급수병으로 재배치했다.

지난 6월19일 경기 연천 최전방 GP(감시초소)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동료 장병 8명을 숨지게 한 김동민(22) 일병도 부대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군 당국의 수사결과 발표가 나왔다. 김 일병은 신병교육대에서 ‘나의 성장기’에 “고참이 괴롭히면 자살할 것 같다”고 쓰기도 했다. 그는 이전 부대에서 고참에게서 욕설과 질책을 들은 뒤, 사고가 난 부대로 옮겨왔다.

군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몇몇 장병의 문제가 아니다. 군은 매년 입대하는 24만명 가운데 인성검사(KMPI) 결과 10% 안팎이 보호·관심대상자로 분류된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군 입영대상자의 45%가 인격 장애 요소 보유, 군복무 부적응 우려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면 입영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군대에서 고문관 되지 않는 방법’이란 글이 올라 있을 정도다.

군내 부적응자들은 종종 미운 오리 새끼로 취급받는다. 반대로 다른 장병들은 부적응자들에게 피해의식을 느낀다. <한겨레>가 최근 500명의 전역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예비역들의 16.4%가 군 인권의 진전을 가로막는 원인으로 “인권을 지킬 수 없는 문제 사병들의 증가”를 꼽았다. “군 문화의 근본 속성으로 인해 그렇다”(50.8%)는 응답 다음으로 높게 나온 것이다.

‘비전캠프’를 아십니까

그러나 부적응 병사들 자신이 더 큰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부적응 병사들은 동료들로부터 고문관이라는 놀림과 왕따,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은 물론,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겨레21>이 육군본부의 ‘사망사고 감소를 위한 환경분석 및 예방대책’을 분석했더니, 지난 2003년 이유가 밝혀진 군 자살자 65명 가운데 복무 부적응자가 16명에 이르렀다. 무려 25%가 복무 부적응으로 부대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끓은 것이다. 2002년에는 군 자살자의 34.5%가 복무 부적응이 이유였다. 김 일병은 다른 병사들을 향해 총을 겨눴지만,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이다. 남상덕 천주교인권위원회 운영위원은 “과거 많은 장병들이 어려움을 자기 목숨을 끓으면서 해결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반대로 향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군 부적응자들을 포함해 장병들의 병과 배치 및 근무지 재배치, 정신상담 청구권 등을 담은 군인기본법(권리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남상덕 운영위원은 “부적응 병사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해 복무 재배치라도 하면 어느 정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부적응 병사의 의사가 반영돼 전출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김 일병이 다른 GP로 전출될 때도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인 열린우리당 의원은 “군대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군대에 적응할 수 있게끔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군은 나름대로 지난 4월부터 기본권 전문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또 2003년 11월부터 복무 부적응자와 자살 우려자를 대상으로 소그룹 단위로 심리치료를 하는 ‘비전캠프’를 시행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군단과 사단 단위로 운영하되 2개월에 한 차례씩 3박4일 동안 진행된다. 2004년 6월30일까지 비전캠프를 시행한 결과를 보면, 복무 부적응 관심병사 3374명, 자살 우려자 450명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이들 가운데 현역 부적격자 판정이 내려진 경우는 1%(4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대부분 ‘부대 적응 관리’ 대상으로 부대로 되돌아갔다. 군은 최근 이들을 복무부적응센터를 만들어 집단 관리할 예정이다.

지금처럼 복무 부적응자들을 군대 내에서 관리하는 것은 사후 약방문 성격이 짙다. 근본적으로 징병대상자의 인성검사를 강화해 여과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현재 각 지방병무청에서는 징병대상자를 상대로 365개의 문항으로 인성검사를 한 뒤, 이상 판정이 나면 정신과 징병전담 의사와 면담, 과거 치료 경험 여부 등을 조사해 신체등급을 조정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군 부적응 예상자가 걸러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아무개(33)씨는 고교 시절 우울증 등으로 2년여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신체검사에서 면제 판정을 받지 못하고 고스란히 군 생활을 꽉 채워야만 했다.

90% 장병들의 생명을 위하여

또 입대를 하고 나서 신병훈련소나 배치된 부대에서 스스로 정상적 복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군복무 부적격자로 판정해줄 것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장병들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예방하자는 것이다. 이들에게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같은 대체복무를 허용할 수 있다.

논의되는 이런저런 대안들은 남용의 우려나 국민 정서, 군 인력 운용을 이유로 현실성 있게 고려되지 못하는 형편이다. ‘누군 하고 싶어서 하냐’ ‘이렇게 저렇게 다 빠져나가면 누가 군대에 가겠냐’ ‘옛날에도 다 했는데…’ 등 반론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복무 부적응자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당사자들의 양보할 수 없는 인권의 문제다. 동시에 나머지 90% 장병들의 안전, 더 나아가 생명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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