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카드’ 질러 놓고 사면초가 몰린 김정일의 고민… 준전시 체제의 평양은 ‘중재자’ 기다리나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는 핵을 품에 안고 탈출구를 찾고 있다. 물론 지금 그가 던진 승부수가 자신과 정권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더는 물러설 수 없는 구석에 몰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지난 2월10일 핵 보유 선언 이후 취하고 있는 잇따른 핵 무력 시위는 이전과는 다른 긴장감과 절박감이 잔뜩 묻어난다. 그는 지금 미국에 굴복하느냐, 아니면 정면 승부를 거느냐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미국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갈 데까지 가겠다’는 의지로 읽히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성공이 보장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5년의 구애작전 뒤 부시에게 절교 선언
국방위원장이라는 자리는 나라의 국방은 물론 정치, 경제 역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게 돼 있다. 김 위원장은 지금 군 통수권자로서 핵 문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는 지난 수십년간 질질 끌어온 미국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고 공존의 기반을 마련하느냐, 아니면 자멸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물론 그가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평화로운 공존이다. 통일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대외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두어왔다. 일찌감치 미국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절감한 셈이다. 미국만이 자신의 체제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 위원장이 매우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는 지적이다. 그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직접 대화를 왜 그토록 갈구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간혹 만난 남쪽 인사들에게도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미국에게 결코 특별히 대우해달라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당사자는 결국 우리와 미국이기 때문에 직접 만나 협상하자고 요구한 것이다. 남한 등 주변국도 중요한 이해당사자들이기는 하나, 미국은 아니지 않느냐. 결국 핵심 결정은 미국이 하는 거고, 그래서 우리는 바로 미국과 통하고 싶다는 거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과 만나주는 것 자체를 거창한 보상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는 김 위원장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다. 전통, 권위, 가족적 가치, 종교적 신념을 강조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과 측근들은 자신들이 독재자로 여기는 북한 지도자 김정일을 친절하게 다루는 것처럼 국민들이나 지지자들에게 비치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는 ‘폭정’을 종식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것을 최고의 국정 목표로 세워놓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강경책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애매모호한 정치적 고려보다는 선명하게 독재자와 협상을 거부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것을 선호하는 셈이다. 김 위원장은 부시 행정부와 물리·화학적 공존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입’이라 할 수 있는 <노동신문>이 지난 5월10일치에서 밝힌 논평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부시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신문은 ‘불망나니 무리와는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부시 대통령을 “무고한 인민들의 피가 묻은 손을 내흔드는 세계 최악의 파쇼 독재자” “특등 전쟁 미치광이” “히틀러 2세”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은 과연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의 손에는 쓸 카드가 거의 없어진 듯하다. 2001년 1기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5년째 구애작전도 펴고, 달래도 보고, 어르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온갖 수단을 끌어다쓴 터다. 올 초에 터져나온 핵 보유 선언과 본격적으로 핵무기 수를 늘려나가려는 시도는 거의 마지막 카드로 봐도 무리가 없다. 김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정보당국의 관계자들도 드러내놓고 얘기는 못하나 지금 그의 ‘핵 질주’를 멈출 수 있는 제동장치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실리추구형… 자멸 부르는 전쟁 원치 않아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5월11일 영변 5MW 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천개를 끄집어냈다고 밝혔다. 다음 단계로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재처리에 들어갈 것이다. 핵실험 또는 핵탄두를 실어 멀리 보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의 시험발사라는 다음 수순도 거침없이 밟아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2·10 성명’을 통해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으며, 핵무기고를 늘려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5월10일치 <노동신문> 논평에서는 “우리는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그 어떤 압박공세를 가하든 자기가 택한 길을 따라 사소한 편차도 없이 곧바로 나아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은 이 말들을 행동으로 착착 옮기고 있는 셈이다.
김 위원장의 이런 행동은 물론 다목적용 시위로 읽힌다. 미국과의 극적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용과 더불어 실제 미국의 군사행동을 막기 위한 억지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인 셈이다. 최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기업인은 “지금까지 10여 차례 다녀왔지만 지금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 적이 없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한다. 평양 현지에 살다시피 하고 있는 유럽에 사는 동포는 “실제 주민들은 고도의 경계태세를 갖춘 준전시 상태에 살고 있다”고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남쪽의 한 비정부기구(NGO) 관계자에게 귀띔했다. 그렇다면 김 위원장은 전쟁을 탈출구로 생각하는 걸까. 정보 소식통들은 대개 이런 질문에 손사래를 친다. 전쟁 직전의 분위기를 조성할 수는 있어도, 전쟁 행위 자체를 전략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전쟁은 곧 그 자신의 정치적 생명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 전쟁은 피하면서도, 핵 무력 시위로 자신의 생존을 확보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6·15 정상회담 이후 김 위원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남쪽 인사들은 하나같이 그를 매우 영리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즉, 자멸적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는 분석이다. 한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는 “그는 자기가 손해 볼 행동은 하지 않을 사람이다. 매우 실리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핵을 갖고 벌이는 생존게임도 결국은 자기가 살자고 하는 행동”이라고 잘라 말한다.
문제는 김 위원장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움직일 것이냐는 점이다. 특히 핵실험은 전쟁 행위는 아니지만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가져올 수 있다. 더구나 핵실험은 중국도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리빈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 5월11일 “중국은 북핵 실험을 용인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우리 처지에서도 한반도 평화 유지와 비핵화는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이 실제 핵 실험까지 강행할지는 의문시된다. 핵 실험은 곧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의 외교 및 협상 단절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핵을 안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부시 행정부 내 구석구석에 포진해 있는 전쟁 기술자들에게 침략의 구실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핵 실험은 미국의 북침 구실로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중 왕자루이 “미국이 먼저 한마디만”
김 위원장의 고민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이런 사정은 지난 2월 평양을 방문해 김 위원장을 만난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5월10일 한국 여야 의원단을 만나 김정일 위원장이 핵 보유와 핵 폐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 같다고 말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지금 미국과의 타협이 자신과 정권 생존의 최선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상대방이 콧방귀도 뀌지 않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그의 딱한 처지다. 부시 행정부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국내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정면돌파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미국에 일방적으로 굴복하는 것은 곧 50년 넘게 지탱해온 유일지도체제의 종말을 뜻한다. 군부 등 권력을 떠받치는 지지세력의 급격한 이탈과 반격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내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개혁·개방 부작용에 따른 주민들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남북 관계도 지지부진하다. 식량증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온 남쪽 50만t 비료도 손에 넣지 못하고 있다. 결국 국내 불만세력을 억누르기 위해서도 주민들의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고,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집안 단속을 하고, 단결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타협의 여지를 아예 원천적으로 봉쇄해 핵 실험과 개발을 부추기는 미국의 부시 정권이 못내 야속하다. 6자회담에 복귀할 최소한의 명분을 주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이 가득하다. 왕자루이 부장은 “김 위원장은 미국과 접촉을 실현하려 하지만 부시 행정부가 ‘폭정의 전초기지’란 표현에 대해 먼저 해명해야 한다고 말해, 회담 복귀를 위한 일정한 명분을 미국으로부터 얻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즉, 김 위원장은 폭정의 전초기지와 같은 오명을 쓰고는 결코 회담에 나갈 수 없으며 미국과 어떤 형식으로든 상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물론 한국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의 전략적 결단만을 되뇌고 있다. 진정 북한의 핵무장을 원하지 않는다면 ‘말 한마디‘로 실마리를 마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에게 선택의 여지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핵 포기를 다그치는 미국과 이에 동조하는 일본, 그리고 어정쩡하게 동참하고 있는 한국의 자세는 북한의 핵 개발을 부추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속내를 비교적 정확하게 읽고 있는 왕자루이 부장은 “6자회담 재개를 위해서는 미국이 먼저 해명해야 한다”며 “북한에 (회담 복귀의) 명분을 줄 수 있는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부시 행정부가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부시 행정부는 평양에 특사로 가겠다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제안까지 뿌리친 터다.
제3의 중재자는 후진타오?
핵 실험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피하고 싶어하는 김 위원장은 이제 실오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3의 중재자’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을 전쟁 직전에 평양에 초청해 막후 중재를 요청했듯이, 이번에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비슷한 구실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북핵 문제와 관련한 전략적 결단의 시점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체면을 살려줄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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