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보좌 못 했다고 보직교수 사퇴하는 게 말이 됩니까” 내부서도 자성 목소리 퍼져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이건희 삼성 회장 때문에 보직 교수들이 전원 사퇴하다니, 이건 자본에 대한 대학의 굴복이예요.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라는데, 학생들의 사소한 폭력 시비로 교수들이 사표를 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가난한 학생에겐 불편한 대학”
고려대 인문사회 계열의 한 교수는 4일 이건희 회장의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식의 파행과 관련한 학교쪽의 대응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이날 오후 수업시간에도 ‘이번 일로 삼성에 취직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학생들을 따끔히 혼내줬다고 말했다.
지난 5월2일 오후 이건희 회장은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운동권 학생’들로부터 봉변을 당했다. 100주년 기념관(삼성관) 건립비로 418억원을 기부한 이 회장이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러 학교에 왔다가 이를 저지하려는 학생들을 맞닥뜨린 것이다. 150여명의 학생들은 “무노조 경영과 노동탄압의 대표주자인 삼성 회장에게 철학박사를 줄 수 없다”며 막아섰고, 이 과정에서 삼성쪽 경호원과 교직원들,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다. 이 사건이 보수언론들에 의해 ‘폭력시위’로 집중 부각되자, 이튿날 어윤대 고려대 총장은 이 회장에게 사과문을 전달하고 부총장과 9명의 처장단이 ‘학생들을 잘못 가르친 죄’로 전원 사표를 냈다.
<한겨레21> 취재팀이 4~5일 이틀 동안 만난 고려대 교수들은 이번 사건으로 100주년 잔칫상이 망가질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총장의 구구절절한 사과와 보직교수 사퇴는 ‘오버’”라는 것이었다. 특히 인문사회 계열 교수들은 어윤대 총장의 ‘신자유주의적 학교 경영’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다. 학교쪽의 ‘오버’에는 기업을 ‘상전’으로 보는 어 총장의 대학관이 그대로 투영됐다는 것이다. “어 총장이 특유의 추진력으로 2년 동안 학교를 많이 바꿨지만 ‘학문의 전당’으로서 대학의 정체성이 훼손된 건 분명합니다. 대학은 건전한 시민을 육성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키워주는 곳이 돼버린 거죠.”
문과대의 한 교수는 보직교수 사퇴에 대해 교수협의회가 엄중히 항의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고려대가 아카데미적 진리 탐구를 추구하기보다는 자본주의를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경쟁력 향상에 ‘올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려대는 최근 2년 동안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어 총장의 뛰어난 ‘세일즈 능력’ 덕택에 2003년 870억원, 2004년 1200억원의 발전기부금이 들어왔다. ‘몰려드는 돈’으로 고려대 교정도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번에 건립된 삼성관뿐만 아니라 엘지-포스코관, 우당 교양관, 이명박 라운지 등 기부자의 이름이 박힌 건물과 홀이 촘촘히 들어섰고, 스타벅스와 던킨도너츠, 한 끼니에 6천~1만5천원인 스파게티 전문점도 입주했다.
학생 교육도 자본주의적 경쟁력 향상으로 방향을 확실히 틀었다. 어 총장의 ‘영어상용화’ 지론에 따라 신규 채용된 전임 교원은 한 학기 6학점 이상의 영어 강의를 해야 한다. 이미 올해 정규 과목 가운데 30%가 영어 강의고, 2010년에는 전체 강의의 절반이 영어로 이뤄질 전망이다. 지난해부터는 영문학과 등 국제언어학부 학생들은 8학기 가운데 1학기 이상을 현지 국가에 가서 해외연수를 받고 있다. 서창캠퍼스 정보소자학과는 지난해 삼성전자와의 산학협동에 맞춰 아예 ‘디스플레이·반도체 물리학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이러한 학교 재편이 모든 학생들한테서 환영받고 있는 건 아니다. 총학생회 관계자는 “학교가 자랑하는 엘지-포스코관 등은 기부자의 뜻에 따른다며 학생 자치활동 이용을 막기 일쑤”라며 “이공계나 법·공대 등 실용학문 쪽은 강의실이 남아돌 지경인데, 정작 문과대는 건물 하나만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제어문학부의 해외연수도 학교가 장학금을 지원하긴 하지만, 여전히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생활비 부담 때문에 가기 힘들어 휴학하는 학생이 나올 정도다. 부자 학생에게는 편하지만, 가난한 학생에게는 불편한 대학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100돌 기념사업비 55억원은 등록금으로 충당
지난 3·4월 총학생회는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등록금 동결투쟁을 전개했다. <한겨레21>이 입수한 고려대 내부 자료를 보면, 학교는 삼성관의 내부 인테리어 공사비에 47억원을 편성했고, 100주년 기념사업비 6억5천만원, 기념화보집 구입에 1억2천만원 등 100주년 기념 비용에만 55억여원을 책정했다. 이들은 모두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에서 편성된 돈이다. 고려대는 올해 등록금을 5% 인상했는데, 인상분 95억원의 절반이 넘는 액수인 55억원을 100주년 기념사업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변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는 이는 일부 교수와 학생운동권 등 극소수일 뿐이다. 경제불황과 청년실업 탓에 취직 경쟁력을 높여주는 대학이 고마울 뿐, 그 이면에서 대학을 포위하고 있는 자본에 무감각해진 탓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시위 학생들이 제시한 문제보다는 사소한 폭력이 주요한 논쟁거리가 됐다. ‘비폭력·평화적 100주년을 위한 고대인의 모임’의 이승준(국문과 3)씨는 “이건희 회장을 좋아하지 않지만 돈이 필요한 대학에 큰 돈을 기부했는데, 손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강수돌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자본이 대학을 잠식하면서 자본의 논리를 추종하지 않는 현실참여적 선비정신이 대학에서 사라지고 있다”며 “이번 사건을 통해 고려대에서 표면화됐을 뿐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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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4일 만난 이번 시위를 주도한 학생정치조직 ‘다함께’ 고려대 모임의 대표 서범진(철학4)씨는 “이번 시위를 폭력시위라고 매도하는 것은 보수언론의 여론몰이”라고 주장했다. 서씨는 “일부 학생들이 통제되지 않아 5분 동안 실랑이가 있었지만 즉각 이를 자제시켰으며 나머지 3시간 동안의 집회는 평화적으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왜 시위를 했는가.
이건희 삼성 회장은 무노조 경영을 고수해온 대표적인 기업가다. 삼성은 이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 삼성SDI 노동자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위치를 추적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우리는 이러한 일 때문에 명예철학박사 학위는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이 회장이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지 못하도록 총학생회와 함께 시위를 벌였다.
보수언론은 ‘폭력시위’라고 하는데.
행사장인 인촌기념관 앞에서 연좌하고 있는데 이 회장 일행이 도착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 회장 일행이 옆으로 돌아가려 하자 일부 학생들이 흥분해 그쪽으로 달려들었고, 삼성쪽 경호원과 교직원들과의 실랑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 회장에 대한 아무런 위해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폭력시위’라고 비난하는 것은 우리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호도하는 꼴이다. 언론도 삼성에 종속됐다.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가 하는 말이 ‘우리 주장을 자세히 실으면 삼성 광고가 줄어든다’고 하더라.
보직교수들의 사퇴를 어떻게 생각하나.
이건희가 기침하니, 파리가 날아간 꼴이다. 우리 대학이 얼마나 자본에 종속됐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학교가 책임졌으니 학생들도 책임지라는 것으로, 학교쪽이 징계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본다. 징계에 맞서 투쟁하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산학협동에 비판적인 ‘다함께’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않는데.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문제의식에 공감할 것이다. 기업이 대학을 지원하는 것은 분명히 어떤 대가를 노린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자신의 이름을 딴 건물을 고려대에 지었지만, 학생의 공공복리와는 먼 쪽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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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대쪽이 삼성의 심기를 사납게 했을까 노심초사(?)하고 학교 안팎이 시끄러워지자 이 회장이 직접 나섰다. 이 회장은 지난 4일 삼성그룹 홍보팀 이순동 부사장을 통해 전한 “모두 다 나의 부덕의 소치다”라는 말로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이 회장은 이어 “20대 청년기에 사회 현실에 애정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학생들의 의사표현 방식이 다소 과격한 점이 있더라도 젊은 사람들의 열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봉변을 당한 손님 처지인 이 회장이 오히려 ‘다 내 탓’이라며 학생들을 넓게 감싸안은 것이다.
물론 삼성쪽도 당일 학생들의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대학당국으로부터 미리 전달받았다. 지난 200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고대 특강을 저지당했던 일을 떠올린 것일까? 일부 회사 임원들은 참석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장은 “학위 수여식은 이미 정해진 일인데, 소수의 학생들이 그런다고 봉변당할까봐 안 가는 건 좋지 않다. 계란세례 같은 일에 대비해 내가 양복을 두벌 준비해서 가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학위를 꼭 받아야겠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회장은 왜 흔한 경영학·경제학 박사학위가 아닌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일까? “회장님은 서울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미 받았다. 경제나 경영학보다는 철학이 학문의 상위 아니냐. 회장께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신경영 철학을 펼치는 등 생활 패러다임을 많이 바꾸었고, 사람들의 사고를 개혁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학위를 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또 우리쪽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요구한 건 아니고, 고대에서 먼저 추천했다. 회장님은 고대 100주년 기념관을 지어주고 돈으로 박사학위 받는다는 소리가 나올까봐 처음에는 안 받겠다고 극구 사양했다.” 삼성그룹 임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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