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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부역’ 이대로 둘 것인가

등록 2005-04-05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배식 작업은 기본, 청소에 바자회까지…아이들에게 일을 나누는 발상의 전환 시급</font>

▣ 글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손을 닦고 온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언니들을 기다리고 있다. 3월31일 서울 도봉구 창2동 창림초등학교 2학년 7반. 5학년 7반 김다희·이나영·함진현(11)양이 국과 밥·반찬이 담긴 수레를 끌고 교실로 들어온다. 밥통을 열기 전 꼭 할 일이 있다.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야무지게 매고 선생님이 나눠준 비닐장갑을 낀다. 밥당번 김다희는 주걱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뜨거운 밥을 능숙하게 고루 뒤집어놓는다. 이제 준비 끝. 동생들이 내민 식판에 오뎅무침과 생선구이, 총각무, 김치찌개, 검은콩, 밥을 차례차례 올려놓는다. 15분 남짓 걸리는 배식이 끝나면 이제 당번들도 먹을 차례. 국이 좀 식었지만 괜찮다. 배식 당번은 재미있으니까. 오늘도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로 이기지 않았더라면 기회가 안 돌아올 뻔했다. 집에서도 이렇게 밥 푸고 반찬 놓는 일을 하냐고 물었더니 세명 모두 고개를 젓는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동생들한테 밥 퍼주는 일은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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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7반 담임교사 고승순씨는 “1·2학년생도 학기 초에 조금만 훈련을 하면 고학년 언니오빠들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밥 먹고 치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선 엄마들이 매일 학교에 와서 배식 당번을 했는데, 이렇게 아이들끼리 해결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비록 담임선생님이 맨 나중에 식은 밥과 국을 먹어야 하는 불편은 있지만요.”

5년 전 문을 연 이 학교는 지역 특성상 맞벌이 부부가 많은 편이다. 풀타임으로 일하는 엄마들만 따져도 40% 이상이므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수까지 합치면 그 비율이 훨씬 높다. 김원규 교장은 “다행히 학교에 엘리베이터가 있어 조리실에서 음식을 만들어 교실로 보내기가 편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돼요. 국이 뜨거우면 아이들한테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조리실에서 85℃ 이하로 식힌 뒤 교실로 보내고 있죠.”

선생님은 팔짱 끼고 이래라 저래라

1997년 초등학교 급식제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야 했던 어머니들의 고생은 끝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엄마들의 한숨은 그치지 않았다. 식당을 따로 갖추지 않은 학교에선 조리실에서 만든 음식을 교실로 날라 아이들에게 나눠줘는 배식 작업에 추가의 일손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학교에선 창림초등학교처럼 아이들끼리 스스로 돕는 것보다는 ‘엄마손’을 동원하는 방법을 택했다. 매달 담임선생님이 급식당번표를 만들어 각 가정에 보내는 식이었다. 혹 부모들이 시간이 안 될 경우를 고려해 어머니들의 휴대전화번호를 모두 적어 “당번을 바꾸고 싶을 때 서로 연락하라”는 친절한 안내를 써넣기도 한다. 아예 정 시간이 안 되는 분은 급식 도우미를 쓰겠으니 1만5천원을 내라고 공지하는 곳도 있다. 학급 정원이 30~40명인 경우 학부모 급식 당번은 1명당 1달에 1~2회 정도 돌아가는 꼴이다.

“엄마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면 일은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선생님들이 엄마들을 부리는 걸 너무 당연시하는 느낌을 받으면 기분이 상해요.” 1년 전 서울의 한 사립 초등학교에 첫째딸을 보냈던 이아무개(36)씨는 “선생님의 태도가 너무 야속해 학교에서 돌아와 울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엔 사립학교라서 은근히 기대도 했어요. 돈을 더 내는 만큼 교육 여건이 더 좋으리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 사립학교도 식당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1~3학년까지는 엄마들이 나와서 급식 당번을 했어요.” 엄마들의 급식 당번은 보통 국과 밥을 떠주는 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오후 수업이 없는 경우엔 학부모들이 남아서 청소까지 마쳐야 한다. “선생님은 팔짱을 딱 끼고 먼지가 낀 구석구석을 짚어가며 ‘이곳 이곳, 닦으세요’ 지시하고, 바닥에 껌이 붙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밀어서 떼세요’ 하는데 부아가 나더군요. 엄마들을 도대체 뭘로 아는 건가 싶어지고요.” 이씨는 마지막 당번을 하러 갔을 때는 맘먹고 담임교사에게 “선생님, 이 책상 좀 같이 들어주세요”라며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선생님이 얼굴을 찌푸리며 아구구구~ 무거워라 호들갑을 떠는데 웬지 우습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어요.” 결국 이씨는 틀어진 선생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해에 아이를 공립학교로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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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엄마와 전업주부 갈등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아이들이 크게 영향을 받는 1~2학년 때는 학부모들은 더욱더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다. “심하게 표현하면 아이가 인질, 엄마는 노예인 셈이죠.” ‘어머니 급식 당번 폐지를 위한 모임’의 공동대표 조주은씨는 “엄마는 아이들 다 먹인 뒤에 구석에 앉아 식은 음식을 먹거나 선생님 눈치를 보느라 쫄쫄 굶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왕 학교에 온 김에 아이의 학교 생활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선생님들은 대부분 그냥 일만 시키는 식이었어요. 엄마들도 기계적으로 반찬을 나눠줄 뿐이지 식단 평가 같은 급식 모니터링은 꿈도 안 꾸죠.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친구들은 저보다 학교에 더 자주 가고 자원봉사 일도 더 많이 해요. 하지만 그만큼 발언권을 가지고 학교 운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어요. 노동 동원도 문제이지만 학부모의 무상 노동에 대해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엄마손’은 급식 당번만 맡지 않는다. 녹색어머니회·명예교사·어머니회(자모회) 등은 ‘엄마손’을 조직하고 호출하는 장치들이다. 녹색 깃발을 들고 건널목에 서서 아이들의 등하교 길을 살피고, 바자회에서 국수를 삶게 만들고, 유리창을 닦게 하고, 여름내 선풍기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도록 한다. 이런 일이 잦은 만큼, 학교에 올 수 없는 맞벌이 엄마와 전업주부 사이의 골은 깊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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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맞벌이 엄마는 아예 자기는 청소 당번에서 빼달라고 선생님께 부탁했대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얄밉죠. 전업주부도 시간이 남는 것만은 아닌데요.” 가사들 돌보며 틈틈이 보습과외를 하고 있는 이아무개(40)씨는 “아이들이 1·2학년 때엔 급식·청소 당번 등으로 일주일에 두세번씩 학교에 가야 했다”고 말한다. “학부모 중엔 선생님이 청소 시킨다고 아이들을 늦게까지 붙잡아두면 학원 시간에 늦는다면 차라리 엄마들이 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교육감 방문 전날 또는 개학 전에 엄마들을 시켜 대청소를 하는 일 같은 것도 엄마들이나 선생님들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죠.”

올해 아들을 대학에 보낸 김아무개(51)씨는 “다시는 학교에 그토록 ‘충성’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평소 부지런하고 성격이 활달한 김씨는 아이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어머니회 일을 도맡아 했다. “청소·급식 당번은 물론이고 커튼 빨기·비품 갖추기 같은 것은 예사였어요. 고등학교 때가 가장 힘들었는데 야간 자율학습을 감독하는 선생님들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간식을 만들어 날라야 했죠. 물론 고마운 마음에 하긴 했지만 나중엔 ‘정말 남는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갖가지 학교일 중에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학교 운동부 지원’이었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지원예산이 따로 없다며 바자회를 열어서 후원을 해달라는데 그게 다 엄마들을 동원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이들이 일 하는 것도 교육이다

초등학생 아들 둘을 둔 권오석(39)씨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일을 좀 시키자”고 제안한다. 집에서 어린이도서관을 차려놓고 책읽기·글쓰기 지도를 하고 있는 권씨는 아내가 학교 가기 꺼려해 급식·청소 당번을 손수 도맡아왔다. 그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 말고도 밥먹기·청소하기 등을 통해 얼마든지 행복해지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눈 치우면 마음이 시원해지듯, 아이들도 먼지를 닦으며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것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스스로 음식을 차려 먹으며 씹는 밥알을 통해 여름 들판에서 일한 사람들의 땀도 생각할 기회를 줘야지요.”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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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노동력’ 인식을 폐지하라</font>

[인터뷰 | 어머니 급식 당번 폐지를 위한 모임 조주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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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혼자였다. 여성학자 조주은(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씨는 지난해 10월 인터넷 카페를 처음 열었다. ‘어머니 급식 당번 폐지를 위한 모임’(cafe.daum.net/momcry). “아들(4학년)과 딸(2학년)의 급식 당번이 돌아오면 제가 가거나 남편이 가거나 그도 여의치 않을 땐 시어머니께 2만원씩 드리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는 도와줄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다른 집은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지난해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부천·인천 기혼여성 제조업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조주은씨는 노동자 어머니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녀 문제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일하는 어머니들은 가장 곤란한 경우는 아이가 아플 때고, 그 다음은 어머니 급식 당번을 해야 할 때라고 답했다. “급식 도우미 비용 2만원은 노동자 어머니의 하루 일당과 비슷해요. 사무직 여성들이라면 점심시간에 대충 핑계대고 살짝 다녀올 수도 있지만 부품조립 라인에 하루 종일 매달려 있는 생산직 여성들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죠. 대부분 농촌이 고향이라 친정이나 시가에서 도움을 줄 수도 없고요.”
그는 학교에서 어머니를 급식 당번으로 쓰는 것은 ‘모든 아이들은 엄마가 있으며’ 그 엄마들은 ‘자식 사랑’을 위해 ‘엄마의 마음’으로 언제라도 아이를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박혀 있다고 지적했다. “궁극적으론 여성의 노동력이란 언제든지 아이·어머니의 이름으로 호출해낼 수 있는 ‘싸구려 노동력’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요. 사실 가정에서든 사무실에서든 공장에서든 일하지 않는 여성이란 없거든요.”
그의 목소리가 매스컴을 타면서 동지가 속속 모여들었다. 이미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이 문제에 깊이 공감한 임나혜숙(마산 문화방송 편성제작국장)씨가 손을 번쩍 들었고(공동대표), ‘아버지 급식 당번’ 권오석씨 같은 일꾼도 합류했다(카페운영자). 무엇보다 학교의 불합리한 현실을 알면서도 속만 끓여야 했던 엄마들이 반가워했다(‘폐지 모임’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보면 알게 된다. 갖가지 부조리·모범 사례들로 게시판이 북적대고 있다).
새 학기가 다가오면서 ‘폐지 모임’은 바빠졌다. 서울시 교육청에 어머니 급식 당번 폐지 의사를 묻는 질의서를 보냈고, 조주은 대표를 시작으로 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1인시위 3일째 교육청은 ‘폐지 모임’쪽과 면담을 했고, 이후 3월17일 각 초등학교에 ‘초등학교 저학년 배식 지도 공문’을 내려보냈다. 교육청의 배식 지도 공문은 1)학부모·지역사회·종교단체 등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거나 2)고학년 학생들의 봉사활동을 유도하거나 3)유급제 배식 종사 인력을 채용하거나 4)저학년이 자율적으로 하는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청이 배식 지침서를 내려보냈지만 실제로 현장에선 바뀐 게 별로 없어요.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대부분 학교에선 설문지 형태로 1)기존대로 운영 2)급식비 대폭 인상(50%) 3)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한다 등으로 대충 의견을 물은 뒤 ‘기존대로 운영’ 응답자가 제일 많다며 그대로 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학교에선 이렇게 학부모 반발이 심하면 ‘아예 급식 폐지하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죠.”
‘폐지 모임’은 4월6일 기자회견을 열어 급식과 관련한 일선 학교들의 부조리 사례를 발표하고 한부모가정·맞벌이부모·전업주부 등 다양한 범주의 여성들의 입을 빌려 ‘어머니 급식 당번에 관한 생각’을 들려줄 예정이다.
혹시 드센 엄마의 대외 활동 때문에 아이가 ‘다치면’ 어떡하냐고, 걱정 안 되냐고 인터뷰 말미에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조 대표는 답했다. “우리 아이는 내성적이고 평범한 애인데요…. 담임 선생님도 엄마가 이런 활동하는 거 알고 계세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교육환경 개선운동이니까, 선생님도 장기적 관점에서 이해하시게 될 거예요. 그렇게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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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r><tr><td colspan="5"></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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