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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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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개성냄비를 보고 싶다

등록 2005-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국-EFTA 협상에서 ‘한국산과 동일 관세’ 협의 중… FTA 선례 되면 ‘남북경협 세계화’에 도움

▣ 제네바=윤석준/ 자유기고가 semio@naver.com

지난 1월18일부터 사흘간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한국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사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제1차 협상이 열렸다. 이번 협상에서 양쪽은 상품무역, 통관절차 및 원산지, 서비스·투자, 지적재산권·정부조달 등 모두 11개 분야별로 협의를 벌였다. 1차 협상임에도 사전 준비한 협정문 초안을 토대로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돼 이미 양쪽간 상당 부분에서 의견 접근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EFTA 회원국들인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공화국과 한국의 산업 구조가 경쟁관계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품목에 대한 양허 제외 및 이행기간 설정만 합의되면 큰 이견 없이 올해 안에 협상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 제품, 고율 관세의 딜레마

이번 한-EFTA FTA 협상은 칠레, 싱가포르에 이어 세 번째 FTA가 될 전망이다. 한국은 또 올해에는 캐나다, 인도, 미국, 멕시코, 일본, 동남아국가연합(ASEAN) 등과 협상을 벌인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150여개의 지역협정이 발효된 상황에서 한국은 다소 때늦게 FTA 대열에 뛰어들었다. 정부의 숨가쁜 행보에 대해 일각에서는 “너무 서두르다 보니 국내 산업의 피해를 면밀히 검토하지 못하고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국민들에게 ‘FTA의 모범답안’으로서 한-EFTA간 FTA를 보여주려는 것이 당국의 속내이기도 하다. 한-칠레 FTA 체결 과정에서 농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야 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한-EFTA의 FTA 협상은 국내 산업의 피해가 미미하고, 양쪽 교역의 양적·질적 측면이 모두 의미 있는 수준이기 때문에 자유무역협정의 가시적인 효과를 보여줄 수 있다.

특히 한-EFTA간 FTA는 남북경협과의 연관성 때문에 눈길을 끈다. 개성공단 전략물자 반입 문제와 함께 가장 큰 난제가 원산지 규정 문제다. 북한은 국제적으로 테러지원국, 무기확산국으로 지정돼 있어 미국, 일본, 유럽 등 주요 수출 대상국가들한테 정상무역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 원산지 제품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최고 수십배에 이르는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고 있다. 원산지가 북한산인 제품들은 생산단가가 저렴하더라도 이들 세계 주요국 시장에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산 제품에 견줘 가격경쟁력 면에서 뒤떨어져 수출이 어렵다. 품질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이나 일본에 견줘 북한산 관세율이 조금 낮은 유럽쪽으로 수출하는 방법을 모색해볼 수도 있으나, 이것도 극히 일부 품목에 한해서만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있는 정도이다. 따라서 FTA 양자간 통상 협상을 통해 개성공단 생산 제품에 대해 한국산(Made in Korea)과 동일한 특혜관세를 부과하도록 합의를 도출해나가는 과정은 향후 개성공단 제품(Made in DPRK(Gaesong))의 수출 길을 열어주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지난해 한-싱가포르의 FTA 협상 타결시 양국은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을 싱가포르에 수출할 때 한국산과 동일한 관세 특혜를 적용키로 원칙적으로 이미 합의한 바 있다. 이번 협상에서도 한국은 개성공단 생산 제품에 대한 특혜관세 부여를 EFTA쪽에 요청해놓은 상태다. EFTA쪽에서 일단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니 기대를 갖고 지켜볼 일이다.

FTA와 남북경협 사업의 조합은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다. 그간 남북경협은 남북한이라는 좁은 틀에서 사업 추진 전략을 수립해왔다. 그간 남북경협 사업의 중요한 축을 이뤘던 임가공 사업은 생산요소의 투입은 남과 북에서, 그리고 판매시장은 남한 내수시장을 염두에 두어왔다. 대규모 남북경협 사업의 물꼬를 튼 금강산관광 사업 또한 이러한 남과 북이라는 국내적 사업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북핵 문제라는 근본적인 사업외적 환경도 자리잡고 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남북경협 사업자들은 고작 미국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한 내수시장 탈피, 패러다임 바꾼다

그러나 이제 ‘남북경협 제2기’를 열어가고 있는 개성공단 사업은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장기적으로 2천여만평의 대규모 공단이 성공적으로 건설되고, 입주업체들이 본격적인 생산 및 판매 활동에 들어가는 문제는 단순히 국내적 관점, 혹은 기존 관점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개성공단 사업의 추진을 위한 전략을 세울 때 과거 중국의 경제특구 개발을 많이 참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계경제 환경이나 국제사회에서 중국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북한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공단 개발의 기술적인 부분을 빼고는 이제 더는 유용한 사례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원산지 규정 문제를 FTA를 통해 해결해나가는 한국 정부의 전략은 매우 시의적절해 보인다. 앞으로 이는 개성공단 추진 전략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주요 통상 강대국들과의 FTA에 앞서 진행되고 있는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싱가포르, EFTA 등과의 FTA 협상 과정에서 우선 개성공단 제품의 특혜관세 부과를 합의해내는 것은 앞으로 통상 강대국과의 협상에서도 좋은 선례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EFTA는 세계 최대의 경제블록으로 부상한 유럽연합(EU)과 사실상 동일한 경제권에 속하기 때문에 이번에 개성공단 제품에 대한 선례가 EU와의 FTA 협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도 있다. 개성공단 사업을 비롯한 남북경협 사업이 아직 해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의 정·재계와 학계가 미국쪽에 편향돼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유럽에서의 남북한 관련 정보의 부재나 왜곡은 심각한 수준이다. 단적인 예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EFTA FTA 1차 회의가 다가오자 스위스의 한 유력 일간지에서는 특집기사로 한국 경제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현지 대학의 한 한국경제 전문가의 올 경제전망은 기껏해야 ‘북한 붕괴시 유입되는 난민들로 인한 남한의 경제적 부담’을 논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또 지난 한해 동안 프랑스와 독일의 영향력 있는 주요 언론들에 개성공단 관련 기사들이 현지 특파원들의 르포 형식으로 몇 차례 실렸으나 내용상 수정돼야 할 오류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 정부나 사업 주체들은 이를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한심할 정도의 한반도 정보 부재

이런 해외 주요 언론들의 기사는 현지 학자들의 한반도 연구자료나 정책 입안자들의 정책 결정시 주요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우려스런 일이다. 경제통합론 분야의 세계적 학자인 제네바대학의 커슨 프라이스 교수는 최근 세미나에 참가한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개성공단 관련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면서 “한국이 유럽에서 지리적으로 먼 나라이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아직 전쟁 중인 두 나라가 이렇게 흥미로운 경제협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면, 사업 추진 과정에서 필요한 국제적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정부든 사업가든 해외(유럽)의 유력 인사들과 학자들에게도 적극 홍보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기업은 물론 지방정부의 로비활동이 모든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럽 현실에서 외교통상부의 협상 능력 하나로, 혹은 입주 기업의 개별적 역량으로 유럽 내에서 개성공단 상품의 판로를 열어보려는 한국의 안이한 태도는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는 다소 의아스럽게 비친다.

개성공단 시범공장들이 하나하나 순조롭게 생산에 돌입하고, 이후 1단계 사업 100만평에 공장들이 입주할 무렵이면, 한-EFTA의 FTA 협상도 완결되어 발효 단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개성공단 제품에 대해 남한 제품과 같은 특혜관세 부과가 합의된다면 머지않아 유럽에서도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유럽에서 개성산 ‘통일냄비’를 구입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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