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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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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나오거나, 귀신 나오거나

등록 2005-01-25 00:00 수정 2020-05-02 04:24

드라마관광 시대, 세트장은 ‘상품’이 되고 있나…이미지 판매만 아니라 체험 관광 돼야

▣ 문경·양주=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백두대간과 조령산 마루를 넘는 험준한 고개, 문경새재. 1월19일 문경새재 골바람이 칼날처럼 아렸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새재 1관문 주흘관을 드나드는 등산객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주흘관에 들어서자 계곡 왼편으로 왕건세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조령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사이, 봉우리처럼 맺힌 문경읍 상초리 용사골 2만여평 땅에 들어선 왕건세트장은 2000년 준공 당시 가장 큰 야외세트장으로서 기대를 모았던 곳이다. 한국방송이 야심차게 기획한 고려사 연작 <태조 왕건>이 인기를 얻으면서 세트장도 함께 떴다. 1999년만 해도 40여만명에 불과하던 문경새재도립공원 입장객이 세트장 개장 뒤인 2000년에는 250만명을 넘어섰다. 세트장 터를 내주는 대가로 10년 뒤엔 땅과 세트장을 기부채납받기로 한국방송과 계약을 맺은 문경시는 입이 귀에 걸렸다. 도립공원 안에 있는 왕건세트장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늘면서 공원 입장료 수입도 수백억원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2000년 절정기에 올랐던 드라마가 막을 내린 뒤 관광객도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2001년 200만명이었던 입장객은 2002년 150만명, 2003년 90만명으로 줄어 지난해엔 80만명이 다녀갔다. 처음으로 시도된 고려시대 사극 야외세트라는 가치가 빠르게 추락한 것이다.

을씨년스런 <태조 왕건> 세트장

이날 가족과 함께 세트장에 온 조영인(32·교사·전북 정읍)씨는 “문경새재에 오기 위해 멀리 정읍에서 왔다가 세트장에 들렀다. 너른 터에 우뚝우뚝 솟은 건물들이 번듯해 보였는데 와보니 자세한 안내판도 없고 사람 기운이 하나도 없어 빈집처럼 방치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적어도 건물마다 촬영 장면에 대한 설명이라도 붙어 있어야 할 텐데 <태조 왕건>을 재미있게 보고 나서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다시 올 마음이 나게 하려면 관광객에 함께할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할 것 같다.”

드라마 관광 시대가 열렸다. <겨울연가>의 도시로서 남이섬 공원 입장객 수입만으로 지난해 10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 춘천시의 성공 신화를 보자면 적어도 양적인 면에선 그렇다. 한국관광공사가 아시아 지역 관광박람회인 ‘2002 타이베이 국제여전’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선호하는 한국 관광지로 서울(28%)에 이어 드라마 촬영지(25.5%)를 꼽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높아진 수요만큼 좀더 정교한 드라마 관광 전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촬영지나 세트장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인기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개장한 대장금 테마파크는 체험 프로그램을 덧붙인 최초의 드라마 테마파크로서 참고할 만하다.

1월18일 경기도 양주시 만송동 MBC문화동산을 찾았다. 문화방송은 지난해 12월 <대장금>을 촬영한 야외세트장을 테마파크로 만들어 재개장했다. 2천평 터에 지어놓았던 수라간·대전·대비전·퇴선간(상궁 처소에 딸린 부엌)·옥사·객사·사옹원 건물들을 그대로 활용하고 수라간·퇴선간에는 음식 재료와 식기를, 옥사에는 형틀을 놓는 등 촬영에 쓰인 200가지 이상의 소도구를 벌여놓았다. 궁중의상과 수라상에 오르는 방짜유기에 담긴 12첩 반상도 재현했다. 이곳엔 <대장금>에서 감찰 내시로 출연했던 이경원(42)씨가 내시복을 입고 매일 관광객을 맞으며 분위기를 돋운다. 대만의 남쪽 도시 가오슝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진원신(22)은 “<대장금>이 대만에서 여러 차례 재방송됐기 때문에 내용을 대부분 알고 있는데 역시 수라간이 제일 재밌다”고 말했다. 졸업 여행차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 온 그는 “대장금을 몇번씩 본 친구들도 있어 기대가 컸다고 말했다. 그는 대장금 테마파크 방문과 김치 만들기 체험에 곁들여 에버랜드 스키장 등을 돌아보는 데 4박5일의 일정으로 45만원을 냈다.

<대장금> 체험 위주 프로그램

대장금 테마파크는 드라마 세트장으로는 처음으로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을 덧붙여 만들어진 곳이다. <허준> <상도>를 촬영한 초가집 위주의 야외세트장에 맞붙어 지어진 <대장금> 세트장은 드라마 종영 뒤엔 간간이 퀴즈쇼·재연 프로그램 같은 소품 촬영을 해왔을 뿐 별다른 쓰임새가 없었다. 그러던 중 <대장금>이 대만에서 인기가 치솟자 스키 여행을 위해 한국에 오는 대만 관광객에 초점을 맞춰 지난해 10월 공사를 시작해 두달 만에 테마파크로 단장한 것이다. MBC문화사업부 조복행 부장은 “일본·말레이시아·베트남에서도 반응이 좋고 홍콩도 1월24일 방영을 앞두고 있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손님들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을 연 지 두달이 채 못 되는 지금까지만 보자면 출발은 순조롭다. 하루 150~200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꾸준히 들고 있고 주말에는 국내외 입장객을 합쳐 3천명 정도가 찾고 있다. 주로 여행사 단체관광으로 오는 대만인들은 30~50분 정도를 머물며 인물 사진을 찍는 데 그친다면, 혼자 또는 두세명이 맘먹고 찾아오는 호기심 강한 일본 마니아들은 매서운 추위를 서너 시간씩 견뎌가며 수라간 집기들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고 노트에 기록한다. 이곳에서 가이드를 맡고 있는 김태진(24)씨는 “<대장금> 때문에 한국으로 유학온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경쟁 치열, 지자체 투자액 늘어

하지만 대장금 테마파크가 인기에 떠밀려 서둘러 개장한 탓에 이같은 마니아들의 인기를 지속적으로 충족시키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우선 처음부터 테마파크를 염두에 두고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촬영을 목적으로 한 세트장이기 때문에 관람객의 동선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촬영 장면에 필요한 공간들을 집약시켜 얽어놓았을 뿐이다. 건물을 이루는 재질도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서 비바람에 더러움이 쉽게 탄다. 기와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합성플라스틱을 잇댄 것이라거나 두터운 돌담 같지만 실제론 얇은 가벽이다. 세트장이라는 한계 때문에 더욱 자주 꼼꼼하게 손을 봐줘야 하는 것이다. 또 음식 만들기·궁중의상 입어보기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다른 박물관·한옥마을들과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세트장 시설에 각종 관광 프로그램을 덧붙이고 규모도 대형화하면서 드라마를 유치하려는 지자체가 ‘감수하는’ 몫도 커졌다. 지자체들끼리 경쟁이 치열한 만큼 판도 커진 것이다. 비록 세트장으로서의 인기가 급속히 사그러들고 있지만, 비교적 초기에 세트장을 유치한 문경시는 매우 ‘행복한’ 축에 속한다. 초반에 짭짤한 입장수익(성인 기준 1900원)을 챙겼을뿐더러 땅 말고는 방송사에 별다른 지원·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경시는 시유지 2만평을 내주고 세트장 건립비는 한국방송이 모두 댔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세트장들은 해당 지자체들이 적게는 1억~2억원에서 많게는 10억원 이상까지 제작비를 지원하고 있다. 문화방송 미술센터 강석구 차장은 “요즘엔 촬영만을 위한 세트장이 아니라 종영 뒤 영상 테마파크 같은 상설 관광단지를 계획하기 때문에 지자체가 일정 부분은 ‘투자’로 여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관광모자론’ 제기

하지만 ‘투자’가 곧 수익을 창출하지는 않는다. 우선 드라마가 떠야 하고, 적어도 드라마 붐이 일고 있는 동안 관광객이 꾸준히 들어야 한다. 또 관광객들이 빠지고 나면, 처치곤란한 세트장 또는 드라마 반짝특수로 무분별하게 들어선 음식점·술집밖에 남지 않는다. 상업주의로 황폐해진 풍경은 드라마 속에 등장했던 고즈넉한 분위기를 낼 수 없다. <겨울연가>의 장소 섭외를 맡았던 유영집씨는 “처음 장소 섭외를 맡을 때만 해도 아름다웠던 마을들이 드라마가 뜨고 난 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변해 발길을 돌리는 일이 많았다”고 말한다. “지금 남이섬은 <겨울연가>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은 이전에도 <애인>처럼 유명한 드라마들을 많이 찍었을 정도로 구석구석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은 곳이다. 하지만 가령 <그대 그리고 나>나 <천국의 계단>을 찍은 바닷가 지역들은 유일한 아름다운 볼거리가 깨끗한 바다와 해변이었는데, 여기에 펜션·콘도·음식점·술집이 들어오면 그나마 볼거리도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관광 전문가들은 한류 관광이 지속적으로 성공하려면 특정한 한 지점의 이미지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체험 관광 상품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른바 ‘관광모자론’이라는 것인데, 지역의 이미지를 높이고 외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모자를 쓰고 관광객을 맞지만 모자를 벗고 난 뒤에는 일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내시’에서 ‘안내원’으로

대장금 테마파크에서 안내를 맡은 탤런트 이경원씨…일본 진출의 꿈도 키운다

“사옹원이란 곳은 궁중의 음식 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입니다. 저기 손수레 보이죠? 저게 바로 강덕구가 술항아리를 운반하던 겁니다. 강덕구는 궁중에 술을 대는 일을 했기 때문에 민간인인데도 자유롭게 궁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죠….”
“다음 장소는 대비전입니다. 대비전이란 임금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입니다. 저기 놋대야에 담긴 옷고름 보이시나요? 요리경연대회를 앞둔 연생이가 시제를 미리 맞춰본다며 옷고름을 태웠죠. 그 장면 바로 여기서 찍었습니다.”
가이드의 손길을 따라 40여개의 눈동자가 재빨리 움직였다. 외국인이 이해하기엔 낯선 용어와 빠른 설명이 계속됐지만 진도를 따라가는 데는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설명을 듣는 동시에 재빠른 동작으로 포즈를 취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대장금 테마파크를 찾은 외국인들이 드라마 속 장면만큼 친근감을 느끼는 존재는 극중에서 감찰 내시로 출연한 탤런트 이경원(42)씨다. 극의 후반부인 42~54회에 출연해 장금이의 가슴을 얼어붙게 하는 날카로운 눈매로 왕명을 수행했던 그는 만나보니 의외로 온화한 인상이었다. 테마파크가 개장한 이래 매일 이곳으로 출근해 내시 분장을 하고 테마파크 입구에 서서 관람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있다.
“배우가 왜 연기는 안 하고 안내를 하고 있냐고 동료들이 타박을 주지만 저는 이곳의 일이 너무 흥미로워요. 한류 열기로 드라마 제작 환경이 좋아지면 배우들도 더 많이 필요해질 테고 다양한 배우층도 생겨날 겁니다. 결국 우리가 일하는 여건이 좋아지는 거죠.”
몇년 전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고 일본어를 공부했던 그는 일본 관광객과 언론을 맞는 일을 주로 맡고 있다. “<대장금> 방영에 맞춰 에서는 테마파크에 와서 생중계를 했지요. 그 외에도 10곳이 넘는 일본 주요 일간지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어요. 이곳에 있으면 한국 드라마가 얼마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어요. 테마파크 안내를 맡으면서 저도 일본에 얼굴을 알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한-일 수교 40돌이 되는 해. 이에 맞춰 <대장금>을 소재로 한 뮤지컬·패션쇼·음식 페스티벌 등이 일본에서 열리기로 돼 있다. 이 가운데 패션쇼에 출연할 예정인 이씨는 “오랜 무명의 꼬리표를 떼고” 일본으로 진출할 꿈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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