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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은행의 ‘계급’은 두개

등록 2005-01-07 00:00 수정 2020-05-03 04:23

노동부가 노조의 진정 받아들여 성차별 시정 지시… 비슷한 업무 해도 임금·배치·승진 차별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가정을 해보자. 당신이 어느 회사의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해 입사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회사 내에 귀족·평민 같은 계급이 있고 게다가 귀족은 남자, 평민은 여자들로만 채워져 있다. 계급은 채용에 그치지 않고 임금·배치·승진의 차별로 이어진다. 어떻게 하겠는가. 팔자려니 하고 살 것인가, 회사를 그만두거나 옮길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

간접 차별의 전형적 형태

요즘 같은 시절에 그런 회사가 어디 있느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있다. 그것도 작은 회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하나은행이다. 노동부 서울지방노동청은 이같은 주장을 담은 하나은행 노조의 진정을 받아들여 6개월간 조사를 벌인 결과, 성 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판단 아래 이를 시정하라는 지시를 최근 내렸다. 회사쪽은 이에 불복해 법원으로 이 문제를 가져가려 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시작된 인사제도를 둘러싼 노사간 분쟁은 해를 넘겨 법정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서울지방노동청은 지난해 12월24일 시정 지시를 하면서 △행원A와 행원B를 분리 채용하는 과정에서 행원B(전담 텔러) 모집시 연령을 24~25살 이하로 제한해 군필 대졸 남자가 지원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해 결과적으로 여성만 채용해 FM/CL(Floor Marcketing/Clerk) 직렬에 배치했고 △여성이 대부분인 행원B(1610명 중 1573명, 97.9%)와 남성이 대부분인 행원A(241명 중 여성 20명, 6.8%)에 대해 임금 체계를 달리해 행원B는 행원A의 65.8% 수준으로 임금 차이가 발생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노동부는 또 “특정 성이 다른 한 성에 비해 현저하게 많은 사실이 인정되고 그 특정 성에 대해 불이익을 준 측면이 보여지는바, 이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근거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나 정당성의 입증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채용과 배치·임금에서 남녀간의 차이가 존재하고, 직렬에 따른 차이일 뿐이지 성 차별이 아니라는 회사쪽의 입증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부는 하나은행의 인사제도가 간접 차별의 전형적인 형태라는 노조쪽 주장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서울지방노동청의 이같은 결정은 1987년 만들어져 2001년에 전면 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가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은 동일하게 적용하더라도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남성 또는 여성이 다른 한 성에 비해 현저히 적고 그로 인해 특정 성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고 그 기준이 정당한 것임을 입증할 수 없을 경우 차별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 제정 초기에는 차별하려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는 직접 차별 행위에 대한 규제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의도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행위의 결과로 성 차별 효과가 발생하는’ 간접 차별에 대해서도 규제를 강화했다. 또 차별 여부에 관한 입증 책임을 사업주가 부담하도록 했다.

한번 정해진 신분 바뀌지 않아

사실 하나은행의 인사제도는 은행 업무에 정통하지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단 은행 업무가 단순하지 않아 여러 갈래가 있고 또 성 차별적 요소가 있는 제도를 차별 의도가 있거나 결과적으로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은행이 1991년 투자금융회사에서 은행으로 업종을 전환한 뒤 여러 은행을 통합하는 과정을 겪어왔기 때문에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하지만 추려보면 핵심은 간단하다. 같은 행원이 같은 공간 내에서 같거나 비슷한 업무를 하면서 차별을 받고 있느냐 여부이다.

서울지방노동청은 이번 결정에 앞서 하나은행의 영업점과 본부 부서 몇 곳을 방문해 행원A와 행원B를 면담하는 등 실태 조사를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행원A는 고객마케팅, 여신 심사, 리스크 관리 등 고차원적인 업무 분석 능력과 창의성이 요구되고, 행원B는 예금·대출 상담 및 입·출금, 여신 및 외환 오퍼레이션 등 일반사무 보조업무에 해당한다는 은행쪽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다. 현장 조사를 해보니 본점 부서에서는 업무 내용에 차이가 있었지만, 영업점에서의 행원A(종합직)와 행원B(FM/CL 직렬)의 업무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고 관련자들은 전했다. 즉, 은행쪽의 설명대로 행원B가 행원A의 업무를 보조하는 데에 그치거나 행원B의 업무가 단순반복적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은행 노조의 핵심 관계자는 “은행 업무는 단절적이지 않고 하나의 흐름이 있다. 특히 한 자리에서 모든 업무를 해결하는 원스톱 서비스 도입 등 은행의 구조가 급격하게 바뀐 이후 영업점에서 전통적인 업무 영역이 무너졌고, 종합직과 FM/CL의 업무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서류상 한쪽은 ‘여신업무’, 다른 한쪽은 ‘여신업무 전반’하는 식의 구분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은행쪽은 이에 대해 채용 단계에서부터 분리해 모집하고 채용 이후에도 별도의 인사 시스템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행원B 채용시 지원자의 여성 비율이 높고 대부분 여성이 채용돼 결과적으로 FM/CL 직렬에 여성 근로자들이 근무하고 있을 뿐 의도적인 성 차별은 아니라는 것이다. 임금에 대해서도 회사쪽은 2002년 외부 컨설팅 업체의 직무 가치·성과에 따라 임금이 산정됐고, 당시 행원B의 업무인 FM/CL 직렬의 직무가치가 최하위로 나타나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채용 과정에서 응시자들에게 채용 뒤 ‘미래’에 대해 상세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데다, 한번 정해진 신분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번 행원B가 되어 FM/CL 직렬에 배치되면 행원A의 종합직(가계·기업영업 등 48개 직렬)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하고, 승진도 종합직과는 별개의 라인을 타고 올라간다. 노조쪽은 종합직(행원A)이 행원에서 과장급인 책임자로 승진하는 데에 6년 안팎이 걸리는 반면, FM/CL(행원B)은 19년이 걸린다고 했다. 행원 단계의 차별은 책임자로도 이어진다. 행원A는 지점장급인 관리자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은 ‘책임자 A·B’로, 행원B는 경영관리쪽으로는 갈 수 없는 ‘책임자 C’로 진급한다. 그러다 보니 하나은행 출신만 따져보면, 행원은 대부분 여성인 반면 관리자급 465명 중 여성은 18명에 불과하다. 서울노동청은 “행원A, B의 책임자 승진시 승진 인원, 승진 경로 및 대우상의 차이를 두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남성 근로자에 비해 여성 근로자를 불리하게 대우한 것”이라며 시정하라고 지시했다.

“너희는 쟤들과 다르니까…”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되기 이전 금융업계에는 ‘여행원제도’(여성분리채용제도)가 있었다. 하나은행의 인사제도는 복잡하게 설계되고 그럴듯한 이름으로 바뀌긴 했지만, 여행원제도가 변형된 것뿐임이 노동계의 지적이다. 하나은행 노조의 최호걸 부위원장은 “하나은행이 분리직군을 고집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여성들을 저임금으로 묶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회사쪽은 소수인 종합직에게 ‘너희는 쟤들과 다르니까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특권 의식을 불어넣는다. 분리직군이 없어지고 FM/CL 직렬이 폐지되지 않으면 여성은 여성대로 차별받고, 남성은 남성대로 도를 넘는 노동 시간과 강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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