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경제 양극화 문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해묵은 성장-분배 논란 탈피해야 할 때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2005년을 맞는 참여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그 가운데 최대 현안으로 등장할 경제 양극화 문제와 남북관계 부문을 살펴본다. 경제 양극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참여정부의 운명이 걸린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남북정상회담 5주년을 맞아 6자회담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에는 어떤 성과가 있을 것인지 진단해 본다. 편집자
‘차디찬 윗목으로 온기를….’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각 부문의 양극화는 새해 경제에서도 최대 화두로 꼽힌다. 성장할수록 양쪽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는 터에 새해엔 전반적인 성장세마저 2004년만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아 ‘윗목’을 더욱 얼어붙게 한다.
윗목의 곤경은 방안 전체(경제 전반)의 온기(활력)까지 떨어뜨리는 ‘시장 실패’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정부 정책을 통한 교정의 필요성을 높인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관계자가 “양극화는 얽히고설킨 경제 정책 실타래의 핵심”이라고 밝힌데서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 관계자는 “대통령의 신년사나 (정부의) 새해 경제운용 계획에서 가장 큰 과제로 경제 양극화가 꼽힐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
정부가 경제 양극화에 주목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나, 해법을 찾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양극화를 독립적인 고민거리로 삼기보다는 성장을 통해 파이(몫)를 키우면 양극화는 자연스레 시장 기능에 따라 해결되는 종속변수쯤으로 여겼다. 재계의 성장 일변도 논리에 바탕을 둔 이런 논리가 허구적이었음은 무엇보다 지금의 경제 현실에서 잘 드러난다.
청와대가 지난해 11월 대통령직속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위원장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를 중심으로 별도의 연구팀(TFT)을 꾸린 것은 ‘정부 정책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자인한 것이다. 청와대 양극화 연구팀은 출범 직후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 노동연구원 등 외곽의 전문가들을 아우르는 협의체를 꾸려 지금까지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이와 별도로 청와대 정책실에서도 양극화 해법 찾기에 골몰해왔다. KDI는 이처럼 크게 두 갈래에서 마련된 양극화 해법을 모아 조율을 거친 뒤 지난 12월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이는 새해 경제 정책에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양극화 연구팀에 참여하고 있는 청와대 관계자는 “무슨 메가 프로젝트(거대 계획)나 대단한 책자를 내는 것보다 정책에 어떻게 반영할지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거창한 구상을 제시하거나 이벤트(행사)를 열기보다는 여러 정책의 수립·집행 때 경제 양극화 해소를 역점에 두도록 유도하는 쪽에 방향타를 맞추고 있다는 설명이다. 양극화의 완화를 위해서는 특이한 아이디어를 찾는 것보다 이미 제시돼 있는 숱한 해법을 현실에 적용하는 게 급선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푸는 데서 부딪치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해법의 부재보다는 ‘분배=성장 잠재력 훼손’으로 여기는 ‘성장-분배 논란’의 저급성이다. 양극화를 풀려면 다양한 분배, 재분배 정책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는 곧바로 성장 잠재력을 해친다는 논란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좌파 정책이라는 ‘색깔 시비’에 휘말리기까지 한다. 이런 인식은 특정 정치 세력에 머물지 않고 양극화의 피해자인 중간선 아래층의 뇌리에도 광범위하게 각인돼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분배 정책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 확충이 성장을 촉진한다는 것은 현대경제학에서 상식으로 통한다. 복지 정책을 중시하는 유럽 국가들은 물론,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미국의 학계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의 피터 린더트 교수를 비롯한 현대 경제사학자들은 소득 재분배가 성장에 도움이 되는 현상을 ‘공짜 점심의 수수께끼’(free lunch puzzle)로 부르고 있다. 각종 통계 검증 결과에서 분배 정책을 잘한 나라의 성장률이 높았다는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른바 ‘꿩 먹고 알 먹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소득을 몽땅 세금으로 거둬 ‘n분의 1’로 나누면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겠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무지막지한 재분배 정책은 없었다는 설명이 여기에 덧붙는다. 경제학계의 이런 흐름은 19세기 후반 이후 선진국에서부터 시설투자보다는 인적 자본의 중요성이 커진 것과 맥을 같이한다.
실제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실증 분석 결과, 불평등이 심한 나라의 성장률이 낮으며 재분배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쪽으로 잠정적 결론이 내려졌다. 하준경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박사는 “이런 결론에 간헐적으로 도전하는 세력이 있지만, 어떠한 실증 자료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주된 흐름을 형성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예전엔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즉 생산성이 높은 쪽으로 일자리가 이동했기 때문에 성장과 동시에 분배 문제가 해결됐는데 이젠 다르다. 1990년대 이후엔 제조업의 고용 창출 능력이 떨어지고 (생산성 낮은) 서비스업이 늘어나고 있다. 생산성이 높은 쪽에서 낮은 부문으로 고용을 방출하고 있기 때문에 성장할수록 분배는 악화되게 마련이다.” 하 박사는 “혁신을 이루는 위쪽(대기업 등)을 아래쪽(중소기업 등)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위쪽도 차츰 힘을 잃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교육 정책을 예로 들어보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도 제대로 교육을 받고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은, 기업쪽에서 볼 때는 양질의 핵심 생산요소(사람)를 공급받는 통로를 확보함을 뜻한다. 지금 우리 현실에선 사교육이 이런 통로를 막아놓기 있기 때문에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안전망이 기업 혁신과 보안관계
하 박사는 “분배 정책을 비롯한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기업 혁신 및 구조조정과 보완 관계를 이룬다”고 덧붙인다. 안전망을 갖춰야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이 약해지고, 리스크(위험)를 안는 경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는, 예컨대 직업을 선택할 때도 공공 부문이나 대기업 등 안정성 높은 곳을 우선순위로 두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인적 자본의 최적 배치와 어긋나게 된다는 것은 현실에서 검증되고 있다. 공무원직에 대한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다.
경제학의 고전적 견해는 ‘부유층의 높은 저축이 고투자 → 고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인 반면, 케인스주의에서는 ‘소비 성향이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야 소비 증가 → 생산 증가 → 투자 증가 → 고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정반대 경로를 제시한다.
KDI 관계자는 “부유층의 저축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과잉자본으로 부동 자금화하는 경우라면 고전파의 설명은 정책적 유효성을 잃고 만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부유층의 소비가 수입품으로 향한다면 부유층의 소득이 ‘적하효과’(아래쪽으로 떡고물이 떨어지는)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실태를 그대로 설명하는 대목이다.
현대경제학에서는 상식으로 돼 있는 ‘분배=성장 잠재력 확충’의 선순환 논리가 우리 사회에서는 좀처럼 먹혀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까지 우리 경제는 사람보다는 공장을 짓고 설비투자를 하는 물적 자본 확충을 통해 성장해왔다. 사람도 창조적인 아이디어보다는 노동 시간을 많이 투입하는 양적인 성장 방식이었다. 이런 성장 모습을 보이는 사회에서 분배 정책은 사람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소비’로 여겨져 ‘분배=성장 잠재력 훼손’이란 단순 논리가 득세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여유 시간 동안 학습을 하게 되고 경제적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따뜻하면서도 당연한 추론은 발을 붙이기 어렵다.
관건은 사회적 합의 도출
성장-분배 논란이 정치권을 넘어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돼 있는 것은 이런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의 제품이나 아이디어를 베끼는 낮은 수준의 발전 단계를 벗어난 우리 경제가 이런 인식에 계속 머물게 되면, 어떤 결과를 빚을까. 취약 계층을 도와야 한다는 고상한 인도주의 정신을 잠시 제쳐두고, 순전히 경제적인 논리로만 보더라도 양극화 해소를 위한 분배 정책은 절실한 실정이다.
535호(2004년 11월25일) ‘표지이야기’에서 다뤘듯, 양극화의 교과서적 해법은 빤하다. 양극화의 원인을 고스란히 뒤집어 산업 연관을 강화하고, 중소기업 혁신을 유도하며, 인적 자본을 육성함과 아울러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다. 청와대 양극화 연구팀의 해법도 이런 뼈대로 이뤄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청와대 연구팀은 이런 해법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단계에 와 있는 셈인데, 성장-분배 논란에서 보듯 분배 정책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강한 편이다. 이를 감안할 때 관건은 결국 ‘분배가 성장을 해치는 게 아니다’라는 공감대를 이루는 ‘사회적 합의 도출’이라고 볼 수 있다. 저소득층이 위로 올라갈 통로가 봉쇄되면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불안으로 이어진다는 당연한 상식을 확산해나가면 합의를 이뤄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의 조정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새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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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과 부의 불평등도가 높을수록 경제 성장에 짐이 된다는 견해는 이미 다양하게 제시돼 있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실증 분석 결과 소득 및 부의 불평등도와 경제 성장 사이에 반비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성장과 분배가 상충한다는 고정관념은 깨지기 시작했다.
지난 1994년 스웨덴의 저명한 경제학자 페르손과 이탈리아의 타벨리니는 56개국 자료를 이용한 실증 분석을 통해 최상위 20% 계층의 소득 비중을 7%(1표준편차) 늘릴 경우 평균 성장률이 0.5%포인트 하락한다고 밝혔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알레시나와 로드릭(1994) 교수는 토지 소유의 지니계수(불평등도를 나타나는 0~1 사이의 지수로, 클수록 불평등함을 뜻함)를 1표준편차만큼 늘릴 때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이 해마다 0.8%포인트씩 떨어진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페로티(1996)도 다양한 불평등도 지표와 경제 성장 사이에 음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분석 결과를 제시한 바 있다.
재분배 정책이 경제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적지 않게 나와 있다. 미국 뉴욕대의 이스털리와 노스웨스턴대의 로벨로 교수는 1993년 재분배 정책 지표들과 경제성장률 사이에 비례 관계가 있다는 실증 분석 결과를 제시했다. 미국의 경제학자 페르난데스와 로거슨은 1998년 미국의 전체 계층에 대해 학자금 이용 가능성을 완전 평등하게 할 경우 장기 균형 국내총생산(GDP) 수준이 3.2% 증가한다고 분석했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베나보우 교수는 2002년에 GDP 6%를 재분배에 사용할 경우(상위 30% 소득 계층이 하위 70% 계층을 지원하는 방식) 하위 계층의 인적 자본 투자 증가로 미국의 장기 경제성장률이 0.5%포인트 오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1998년 미국의 경제학자 포브스가 예외적으로 불평등도와 성장이 비례할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상당수 나라들을 분석에서 제외한데다 계수의 신뢰도 부족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불평등이 심한 경제일수록 성장률도 낮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으며, 재분배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데 폭넓은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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