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 상속 등 동일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처분이나 판결 내리는 법원과 검찰
▣ 곽정수/ 한겨레 대기업 전문기자 jskwak@hani.co.kr
“재벌의 변칙 상속·증여에 정면으로 제동을 건 최초의 법원 판결이다.”
삼성이 국세청을 상대로 낸 증여세 부과처분 취소 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부장판사 권순일)이 지난 11월25일 삼성에 패소 판결을 내리자, 최영태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은 큰 의미를 부여했다. 법원은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사건과 관련해 국세청이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 등 이건희 삼성 회장의 네 자녀와 이학수 삼성구조정본부장 등 임원 2명에게 443억원의 증여세를 물린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언론들로부터는 삼성이 지난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진행한 ‘세금 없는 대물림’ 작전을 둘러싼 변칙 상속·증여 논란이 다시 본격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대법원 ‘무죄’, 서울행정법원 ‘유죄’
그러나 법원은 불과 두달 전 전혀 상반된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2부(주심 김용담 대법관)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온 국민이 들떠 있던 지난 9월24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SDS의 BW 헐?발행을 총수 자녀 등에 대한 ‘부당 지원’으로 간주해 15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은 부당하다며, 5년간 끌어온 법적 공방에서 삼성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언론들은 재벌들이 총수의 2, 3세들에게 주식을 헐값으로 팔아 경영권과 지배권을 넘기는 부당 지원 행위를 공정거래법으로 차단하는 게 원천봉쇄됐다고 우려했다.
이 두 건의 판결은 모두 삼성SDS의 BW 헐값 발행이라는 동일 사건에 관한 것이다. 삼성SDS는 지난 99년 2월 당시 신종 금융상품이었던 BW를 발행했다. BW는 채권의 성격에다 주식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신주인수권)까지 붙은 주식연계채권이다. 당연히 BW를 발행할 때는 주식 인수가격이 중요하다. 당시 삼성SDS 주식의 장외 거래가격은 5만5천원 선이었다. 그러나 삼성SDS는 230억원어치의 BW를 이재용씨 등에게 팔면서, 321만여주의 주식을 주당 7150원에 인수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을 부여했고, 이는 즉시 헐값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장외 시세를 감안하면 이재용씨 등이 얻은 예상 자본이득은 1500억원에 이른다. 공정위가 이 사건을 문제 삼은 99년 9월 삼성SDS 주식의 장외 거래가격인 14만1500원을 기준으로 하면 예상 자본이득은 4천억원을 넘는다. 삼성SDS가 BW의 발행 조건만 제대로 정했으면 회사로 들어와야 할 돈이 엉뚱하게 총수 자녀들과 그룹 임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공정위에 패소 판결을 내려 삼성에 승리를 안겨주었고, 서울행정법원은 반대로 삼성에 패소 판결을 내려 국세청의 손을 들어주었다. 도대체 동일 사건에 대해 법원 판결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두 재판에 적용된 법률은 공정거래법과 상속·증여세법으로 서로 다르다. 그러나 수조, 수십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재산을 세금 없이 대물림하는 것을 문제 삼는 법 취지로 보면 전혀 다를 게 없다.
대법원도 삼성SDS 사건의 판결문에서 “이재용씨 등에게 BW를 (헐값에) 매각함으로써 부의 세대간 이전이 가능해지고, 경제력이 집중될 기반이 조성될 여지가 있다”며 문제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그같은 헐값 거래를 공정거래법상 부당 지원으로 제재하려면 법 23조의 ‘공정거래를 저해할 우려’가 입증돼야 한다고 까탈을 부렸다. 대법원은 ‘이재용씨 등이 (계열사로부터) 지원받은 자산을 다른 계열사에 투자하는 경우’를 공정거래 저해 우려 입증 사례로 예시하는 등 이례적인 친절까지 베풀었다. 그러나 이는 ‘재벌 봐주기’ 논리일 뿐이다. 대법원 설명대로라면 재벌 2, 3세들이 계열사 경영진의 부당한 도움으로 엄청난 자본이득을 얻더라도 그것을 다른 계열사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낳기 때문이다.
검찰은 6차례 “혐의 없다” 기각
헷갈리는 것은 법원 판결만이 아니다. 참여연대는 삼성SDS의 BW 헐값 발행 사건과 관련해 지난 99년 11월 이후 모두 6차례에 걸쳐 회사 경영진을 배임죄로 고발했지만, 검찰은 모두 “혐의 없다”며 기각했다. 참여연대는 이에 항의해 2000년 12월과 2002년 5월 등 두 차례에 걸쳐 헌법재판소에 검찰 결정을 취소해줄 것을 요구하는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냈지만 역시 각하됐다. 검찰은 당시 기각 이유로 “장외 시장에서 거래된 (삼성SDS의) 물량은 극소량으로 정상적인 거래가격으로 볼 수 없다”며 비상장사의 주식평가 방법으로는 법률적으로 상속·증여세법이 유일하다는 삼성의 주장만 전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이번에 서울행정법원은 이런 검찰의 주장과 180도 다른 판결을 내놓았다. 서울행정법원은 판결문에서 “당시 다수의 사람들이 장외에서 안정적으로 계속 거래를 했고, 이후에도 거래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한 점이 인정된다”며 “장외 시장에서 거래됐더라도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객관적인 가치가 반영됐다면 시가로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검찰의 삼성SDS 사건 처리는 굳이 법원 판결을 들먹이지 않아도 스스로 문제점을 드러낸다. 검찰은 지난해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계열사간의 워커힐 주식 거래와 관련해 “상속·증여세법 규정에 맞더라도 실제 기업 가치를 반영하지 않았으면 처벌할 수 있다”며 배임죄로 기소했고, 법원도 이를 인정해 1심에서 유죄를 인정했다.
재벌의 변칙 상속·증여 사건과 관련한 법원과 검찰의 갈지자 걸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삼성에버랜드는 지난 96년 10월 99억여원어치의 전환사채(CB·일정시점이 지나면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를 주당 전환가액 7700원이라는 조건으로 재용씨 오누이들에게 헐값 매각했다. 재용씨 등은 이를 모두 주식으로 전환해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의 대주주로 올라서면서, 사실상 삼성 전체의 경영권과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결정적 교두보를 확보했다. 국내 법학교수 43명은 2000년 6월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 경영진들을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사건 발생 7년이 지나도록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있다가 공소시효 만료를 코앞에 두고서야 여론의 눈치를 보다가 기소했다.
대법원도 지난 6월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 사건과 본질적으로 성격이 같은 삼성전자의 이재용씨 등에 대한 CB 헐값 발행 사건에 대해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삼성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하는 과정에서 이사회 회의록이 조작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유독 재벌만 만나면 ‘가자미눈’이냐
유독 재벌만 만나면 ‘가자미 눈’이 되는 법원과 검찰의 갈팡질팡식 행보 때문에 방어하는 삼성이나 공격하는 참여연대, 공정위, 국세청 모두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법원과 검찰 자신들도 헷갈리고 있는지 모른다. 본질적으로 성격이 같은 사건들에 대해 검찰이 어떤 것은 기소하고, 어떤 것은 불기소하고, 심지어 동일 사건에 대해 법원과 검찰이, 대법원과 하급 법원이 서로 취지가 어긋나는 처분과 판결을 내린다면 법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 법은 이미 법이 아니고, 판검사의 손아귀에 있는 ‘사유화된 법’일 뿐이다. 최영태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은 “경영자의 경영적 판단을 존중해 사적 자치의 재량권을 인정하더라도 총수 자녀에게 세금 없이 경영권과 지배권을 대물림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으면 보호해서는 안 된다”며 법원과 검찰의 일관성과 형평성 있는 법적용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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