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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섬이라도 하나 나타나라”

등록 2004-10-21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해경 역사상 가장 긴 3020마일 항해 8박9일 동승기… 경제속력 16노트에 낙담 뒤 선상생활 자구책 찾았지만</font>

▣ 말라카해협·랑카위(말레이시아)=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10월10일 오전 8시40분. 북위 06도24분942초, 동경 099도34분94초. 해양경찰청 소속 3천t급 경비구난함인 3005함(태평양 5호)은 타이와 국경이 인접한 말레이시아 최북단의 랑카위 군도 깊숙이 들어섰다.

열대 우림이 치렁치렁 우거진 100여개의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옅은 코발트색 바다 위에서 말레이시아 해경과 교신을 시도했다. “여기는 한국 해경 3005함. 말레이시아 해경 응답하라.” 몇 차례 교신 시도가 거듭됐지만, 통신실에는 침묵만 계속됐다. 남상욱 함장을 비롯한 승조원들 모두 긴장한 낯빛이었다. “지금쯤이면 마중 나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당장 이틀째부터 답답해지고…

20여분 뒤 통신실 스피커가 울렸다. “우리는 3005함보다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내려오라.” 남상욱 함장의 회항 명령이 떨어지고, 1시간 정도 남하한 10시10분. 수평선 끝에서 100여t급의 말레이지아 해경 선박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를 따라오라.”

말라카해협에서 첫 해적 대응 합동훈련 임무를 부여받고 인천항을 떠난 지 8박9일. 해경 역사상 가장 긴 항해로 기록될 3020마일을 남서진한 끝에 해경 3005함은 말레이시아 해경과 조우했다. 때마침 몰려든 열대성 기습 강우 스콜이 3005함의 열기를 식혔고, 독수리들이 주의를 맴돌며 우리를 환영했다.

10월2일 오전 10시30분, 인천항을 떠날 때 기자의 마음은 조금 설레었다. 8박9일의 긴 항해가 솔직히 부담스러웠지만, 해적 소탕 훈련을 취재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 최고의 휴양지로 꼽히는 랑카위섬까지 해경 함정을 타고 가는 이색적 경험과 무료할 때 책도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것은 뭍에서 꿈꾼 낭만적 공상일 뿐이었다. 이물에서 고물까지 길이가 100m를 넘는 비교적 큰 함정에 샤워실이 딸린 5평 남짓한 2인실 침실이 주어졌지만, 일주일 이상 불빛 한 점 없는 망망대해를 3천t짜리 거대한 쇳덩이 위에서 버텨내는 일은 지루하고 힘겨웠다.

항해 첫날인 10월2일 오후, 3005함에 탑재된 AS565MH펜더 헬기를 조정하는 김상묵 기장은 “중국 선박의 영해 침범 및 불법 어로 행위를 단속할 예정인데 함께 가겠냐”고 물었다. 육상에서 몇 차례 헬기를 탄 경험을 살려 “기꺼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뒷갑판 격납고에서 꺼낸 헬기의 프로펠러는 거센 바닷바람에 부러질 듯 기울었고, “안전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헬기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로 나서자, 승무원이 검은색 면장철을 들이밀며 서명을 요구했다. ‘본인의 의사에 따라 탑승하는 것’이며 ‘사고시 민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푸른 바다로 빨려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1시간 동안 한-중 공동어로구역을 순찰하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배에 착지하는 순간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파도와 조류의 흐름에 따라 흔들리는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며 함상에서 첫 밤을 보내고 갑판에 나선 3일 오전 7시. 제주도 남방 200마일 지점, 그저 수평선뿐이었다. 간혹 어선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벌써 답답함에 압도됐다. 책을 부여잡았지만 흔들리는 배, 격렬한 엔진 소음, 후끈거리는 열기, 바다가 내뿜는 밝은 반사광 때문에 몰두할 수 없었다. 이후부터 나는 함장실과 조타실, 기관장실, 갑판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길고 긴 8박9일을 하루하루씩 죽여나갔다.

항해 사흘째인 4일 불필요한 세탁과 샤워를 자제하라는 함장의 명령이 하달됐다. 정우진 부장은 “연안 해역에서 훈련할 때의 하루 소모량 13t을 기준으로 365t의 물을 싣고 왔는데, 첫날부터 20t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말라카해협까지 8박9일, 현지훈련 4박5일, 다시 8박9일의 귀국길, 20일간의 긴 항해에서 물부족 사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적도 가까워지자 엔진이 말썽

항해 4일째인 5일 3005함은 대만해협을 지났다. 아침마다 기대를 갖고 눈을 뜨지만, 수평선과 하늘뿐. 그나마 위성 텔레비전마저 먹통이 되자 답답함은 더욱 커졌다. 항해 닷새째인 6일부터는 아침식사 7시20분, 점심 11시30분, 저녁식사 5시30분 하루 세 차례 제공되는 취사반의 ‘짬밥’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며, 좀더 빨리 랑카위에 도착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다. 3005함의 최대 시속인 21노트로 항해할 경우 랑카위까지는 5박6일이 걸린다. 하지만 배는 시간당 16노트, 이른바 ‘경제속력’을 고집했다. 박종범 기관장은 “경제속도인 16노트로 항해하면 시간당 1300ℓ의 연료가 소모돼, 하루 평균 2천만원이 든다. 5노트를 더 높여 최대 시속을 내면 시단당 3200ℓ가 소모되고, 연료비만 4천만원이 추가된다.” 20일 항해, 무려 8억원의 경비가 절감된다는데 다른 선택은 없었다.

해경 승조원들은 이미 길고 지루한 시간을 알차게 죽이는 방법 몇 가지씩 깨우치고 있었다. 하루 8시간씩 3교대 근무를 서고, 남는 시간은 체육실에서 몸을 단련하거나 책을 읽거나 잠을 청한다. 갑판 위에서 허공을 향해 테니스 라켓을 한 시간씩 휘두르는 사람, 아령과 팔굽혀펴기로 시간을 죽이는 특공대원, 그 모습도 제각각이다. 선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대장금 채썰기대회'를 열고, 삼겹살이 나오면 한바탕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물론, 기가 빠질 만하면 훈련 상황이 전개된다. 8박9일 동안 기관실 화재 진압과 비상탈출 훈련, 해상 선박의 화재 진압을 위한 소화포 훈련, 해적 소탕을 위한 도상 훈련 등이 계속 이어졌다.

예측 못한 비상상황도 발생했다. 항해 7일째인 8일 배가 적도에 가까워지자 엔진이 말썽을 일으켰다. 수온이 30도까지 올라가자 25, 26도에서 최적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설계된 엔진의 냉각기능이 떨어지면서 제 속도가 나지 않았다. 기관실 승조원들은 비상이 걸렸고,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했다.

“제발 섬이라도 하나 나타나라.” “이제 정말 배라면 진저리가 난다.” 고개를 절래절래 뒤흔들 쯤인 10월9일 아침 7시10분, 전경들이 카메라를 들고 갑판 위로 뛰쳐나갔다. 드디어, 말라카해협 남쪽 진입로인 싱가포르 협수로에 도착했다. 아침 안개와 비구름 속으로 싱가포르의 고층빌딩 숲이 흐릿한 형체를 드러냈을 뿐인데, 3005함에는 생기발랄한 기운이 넘쳐난다. 배를 타지 않았다면, 먼 발치에서 보이는 도시의 형체만으로 어찌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조타실은 극도의 긴장상태다. “키 오른편 10도 잡아!”(남상욱 함장), “10도 잡기 완료!”(조타수), “전방 엘피지 상선 거리 1천야드. 소형 바지선 4.9노트로 움직이고 있습니다.”(임종대 조타장), “3도 더 왼편!”(함장)

함장과 조타장, 조타수, 전방 관측병 사이에 끊임없는 지시와 복창이 오간다. 남상욱 함장은 “실제 통항로 폭이 1.5마일에 불과한 협수로에 수십만t급의 상선과 소형 어선들이 밀집해 있어 자칫하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8시42분 3005함이 협수로를 통과하자, 함장은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반가운 섬, 선상에 생기 돌아

이제 눈앞에는 길고 긴 말레이반도가 펼쳐지며 인도네시아의 섬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승조원과 기자들은 “이제 해적이나 잡아볼까” “경찰 표식을 가리고 해적을 유인해 소탕하자”는 말을 주고받을 만큼 생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7명의 특공대원들은 어둠 속에서 소총으로 무장한 채 갑판에서 밤샘 경계에 돌입했다. 그렇게 해적들이 창궐하는 말라카해협에 도착한 것이다.

합동훈련을 마친 기자는 평균 시속 900km의 비행기를 타고 14일 오전 7시20분 인천공항에 내렸다. 비행기로 8시간 남짓 걸렸다. 그날 오후 4시, 3005함의 해경 승조원들은 외롭고 힘겨운 바닷길로 다시 8박9일 귀향 항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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