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망매가’에서 ‘그날이 오면’까지… 노르웨이에서 낸 시인 에를링 키텔센과의 대화
▣ 오슬로=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서산대사가 바이킹을 만났다. 스칸디나비아 문학이 한국 문학을 만났다.
“이제 닭 울음소리 한번 듣고 나니 대장부 일이 다 끝나버렸네.” 서산대사가 쓴 ‘오도송’(悟道訟)의 한 구절이다. 이 깨달음의 시가 노르웨이어와 함께 한글 제목으로 표지디자인되어 오슬로 서점가에 깔렸다. 노르웨이의 대표적 시인 에를링 키텔센(Erling Kittelsen·58)이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의 직역을 바탕으로 시역 출판한 이다. 이 시집엔 월명(月明)의 ‘제망매가’(祭亡妹歌), 최치원의 ‘가을밤, 비 내릴 때’(秋夜雨中) 등 고전시 93편에 박목월의 ‘나그네’,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김남주의 ‘그날이 오면’ 등 현대시를 포함해 총 120편이 엄선돼 묶였다.

한국 문학의 해외 출판이 새삼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번 경우는 뭔가 특별한 느낌을 준다. 천년의 시기를 아우르는 한국 시의 역사적 작품들이 노벨문학상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에서 처음으로 환생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특별함이란 먼저 번역자들의 치열함에서 빛난다.
박노자와 인연… 2년간 치열한 시역 작업

에를링 키텔센 시인은 이 책을 위해 박노자 교수와 무려 2년 동안 150여 차례 만남을 가졌다. 박노자 교수는 고전시의 한자들에 일일이 음과 뜻을 붙여주고 역사적 배경을 일러주며 작업을 했다. 번역자들의 목표는 “노르웨이 말로 진짜 시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한국의 시가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외국 출신의 가장 정통한 한국 학자와 신뢰받는 세계문학 시역자의 환상적 결합인 셈이다. 박노자 교수의 학문 깊이야 재론할 게 없거니와, 키텔센 시인 역시 최고의 지명도를 지닌 작가이자 번역가이다. 1970년 시집 (野禽)으로 데뷔한 이후 장편소설과 희곡, 풍자적 동화 등 장르를 넘나들며 30여권의 창작 저서를 낸 그는 90년대 이후 아랍어, 페르시아어, 슈메르어(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언어), 우르두어(파키스탄 다수 주민의 언어), 중국어, 라트비아어 등 비서구권 시작품을 번역하는 데 몰두해왔다. 레바논과 말리에서는 아랍어와 밤바라어로 그의 희곡이 연극무대에 올려진 바 있다.
고 김남주 시인의 부인 박광숙(54)씨를 초청해 한국시 낭독회를 연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키텔센 시인은 시와 투쟁이 하나된 김남주 시인의 실존적 선택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은 노르웨이 현지에서 키텔센 시인을 만났다.
- 한국 문학과 처음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하다.
= 2년 전 한국의 사물놀이 악단이 노르웨이 국영 음악연주협회(Rikskonsert) 초청으로 온 적이 있다. 그때 동양 시문학에 몰입해 있던 나에게 한국의 명시를 번역해 낭독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나는 기초번역을 위해 노르웨이에서 유일한 한국학 전공자 블라디므르 티호노프(박노자)를 찾았다. 시 몇편 번역하다 보니 한국의 시에 여지없이 반해버렸다.
- 의 시 감별력이 놀랍다. 빼어난 시들만 골랐는데, 시를 고른 기준 같은 게 있었나.
= 노르웨이인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한국적인 독특한 정서와 메시지를 먼저 골랐다. 개인적으로는 최치원의 작품 ‘가을밤, 비 내릴 때’ 같은 걸 좋아한다.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秋風唯苦吟)/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世路少知音)/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窓外三更雨)/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燈前萬里心).” 현대시 중에선 자성적이며 지적인 내용이 대단히 응축된 황지우 시들이 인상적이었다. 김남주의 시에도 아주 많이 공감한다.
- 많은 외국시들을 번역했는데, 한국시만의 고유한 느낌이 있을 듯하다.
= 한국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매우 고차원의 압축된 철학적 고민이다. 오랜 화두의 참구 끝에 깨달음이 오듯, 시인이 시상을 어렵게 오랫동안 인내심을 갖고 찾은 듯한 감이다. 그리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투시하여 사진을 찍듯 인간의 마음과 사물을 간단명료하게 잘 표현한 시들이 많다. 한국시는 족집게다. 제일 아프거나 중요한 부분을 딱 짚어준다.

- 왜 당신은 90년대 이후 비서구권 시번역에 몰두하고 있는가.
= 고대 스칸디나비아어에 가장 가까운 것은 아이슬란드어다. 스칸디나비아 고전작업도 나에겐 대단히 중요하다. 노르웨이 문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문화를 이해하려면 다른 문화와의 대화가 필수적이다. 특히 멀리 있는 문화와의 대화가 더욱더 필요하다. 서구에 없는 게 타자의 시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려는 노력이다.
- 당신은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데 한국시를 번역했다. ‘시역의 테크닉’을 듣고 싶다.
= 중요한 것은 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과 접촉할 수 있는가 하는 ‘감’이다. 다시 말해, 본인의 시상이 떠오르는가 여부다. 따라서 그 단어의 정확한 직역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역은 새로운 ‘창작’이 될 수 있다. 노르웨이말로 진짜 시가 나와야 한다. 고전시를 번역할 때는 운(韻)도 고려했다. 노르웨이 시역에서도 리듬을 살려 유사하게 운을 맞춰주려고 t나 d로 끝나게 한 것도 많다.
김남주의 용기와 황지우의 실험에 감탄
- 노르웨이 하면 바이킹이 생각난다. 문학적 전통도 바이킹 역사에 뿌리를 두었을 텐데.
= 고대 스칸디나비아 신화들의 모음인 ‘에다’(Edda)라는 게 있다. 9세기쯤에 나온 바이킹 시대 시의 집대성인데, 익명으로 구전된 시이다. 상당 부분이 스칼드(Skald)라는 바이킹 사회의 직업시인에 의해서 지어졌다. 군주나 귀족사회와 접촉하면서도 거리를 둔 주술성을 띤 시인들이다. 아마 신라의 월명대사 같은 분들이었을 거다. 에다는 음절의 구조가 분명하고 다의적인 텍스트로 구성된 재미있는 내용들이었다. ‘청산별곡’ 같은 고려속요와도 비교할 수 있을 게다.
- 한국의 현대 시인들에 대해 구체적인 평가를 해줄 수 있나.
= 먼저 김남주는 대단히 용기 있는 시인이었다. 그가 겪은 고초는, 여기 서구인들이 최악의 악몽에서도 꿈꿀 수 없다. 나는 김남주의 ‘시인이란 것들’이라는 시를 가장 좋아한다. 그의 시는 “쓰지 않으려야 쓰지 않을 수 없어 쓰는 시”였다. 황지우는 현대적이면서 실험적인 시인이다. 또한 비전이 있고, 예언자에 가깝다. 언어를 재미있고 독특하게 구사하는 기술이 대단하다. 박목월의 시는 현대적이지만 떠오르는 그림은 고전시의 시상과 상통한다. 김승희는 고대 정신문화의 유산을 자신의 역사에 삽입하면서 시세계를 개척해온 느낌이다. 김수영의 시는 잘 포장된 다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의성이 재미있는 건 ‘힘’이다. 독자들이 시의 뜻을 잘 이해 못한다 해도 힘이 느껴진다.
- 당신은 참으로 많은 외국 작품들을 시역했다. 페르시아시부터 라트비아시까지….
= 페르시아시는 대단히 망아적이고 도취적이다. 페르시아 수피파(Sufi)의 신비주의는 한국의 선사들과 비슷하다. 그 가운데 위대한 시인이 두분 있다. 하나는 하피즈(Hafiz)로 14세기 페르시아 시라즈의 이단아적 명시인이었다. 루미(Rumi)는 오늘날의 13세기 타지키스탄에서 태어나고 터키에서 죽었는데, ‘신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노래했다. 어쩌면 두분의 시가 종교시문학적 의미에서 조선시대 서산대사와 통할 것이다. 아랍어는 메타포와 욕망의 표현이 대단히 풍부하다. 라트비아어엔 전통과 현대의 공존이 느껴진다. 라트비아어엔 다이나(Daina)라는 독특한 민족시 전통이 있다. 천년에 걸쳐 구전된 것이다. 라트비아는 중동과 스칸디나비아 사이에 위치해 두곳을 연결해준다. 그러나 노르웨이어 지식인은 하이쿠(俳句·일본 고유의 시 형식)를 알아도 다이나는 모른다. 하이쿠를 본떠 시를 쓰는 사람은 많다. 사실 하이쿠보다는 한국의 시조가 문화적 배경이 훨씬 강력하다. 시조의 육감과 입체감이 더 풍부하다.

국가에서 문인의 소득 3분의 1 보장
- 노르웨이 현대문학의 경향을 알고 싶다.
= 사회참여적 속성이 수그러들었다가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다시 강해지고 있다. 또 자신만의 언어로 독특하게 표현하는 언어파괴 현상이 커지고 있다. 사실 노르웨이인들은 개인적이고 타산적이다. 인간의 깊은 문제로 들어가기 힘들다. 서로 의견을 논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왜 이 모양인지 토론하기는 매우 어렵다. (웃음) 그것이 터부다. 남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걸 꺼리는 것. 그래서 시는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줘야 한다.
- 노르웨이는 사회민주주의 국가다. 나라에서 문인의 소득을 보장해준다고 들었다.
= 그렇다. ‘보장된 소득제’라는 제도인데 나도 가입돼 있다. 내 소득의 3분의 1을 지원한다. 그래서 글이나 강연으로도 먹고살 수 있다. 물론 내 소득을 국가에 공개해 검증받아야 한다. 내가 만약 1년에 20만크로네(약 3만달러) 이상을 번다면 국가보조금에서 3분의 2 정도가 사라지는 연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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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4일 오후 4시(현지 시각), 오슬로국립대학교 중앙도서관 제1강의실. 고 김남주 시인의 부인 박광숙씨가 남편의 시 등 3편을 낭독했다. 박씨가 한편씩 읽을 때마다 의 시역자 에를링 키텔센 시인이 이를 노르웨이어로 낭독했다. 키텔센 시인은 낭독회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를 포함해 총 23편을 읽었다. 김 시인의 시를 제외한 다른 시의 한글 낭독은 박노자 교수가 맡았다. 오슬로국립대학교 한국학과에서 주최한 이날 ‘한국명시 노르웨이어 낭독회’엔 최병효 주오슬로대사, 노르웨이 문인과 출판사 관계자, 한국인 유학생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박광숙씨는 인사말에서 “한국의 시들이 노르웨이에서 최초로 번역 출판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시대정신이 집약된 아름다운 시들만 고른 것을 보며 놀라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을 펴낸 노르웨이 아세하우그 출판사의 미아 불 군데르센(Mia Bull Gundersen·44) 편집장은 “60년대 일본의 하이쿠가 도입됐을 때, 처음엔 이질적이었지만 지금은 인기를 얻었다”며 “종교적 모티브가 강한 한국의 시들이 동양 화두의 붐을 타고 잘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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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남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 영향력이 짐이 될 때가 적지 않다. 김남주의 아내였다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싸움꾼’으로 오해한다. 김남주 시인과 함께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고, 10여년간 옥바라지를 했다는 과거가 그런 심증을 굳히게 한 것일까.
문학관 역시 남편과 다른 부분이 많다. 김남주의 저항정신과 문학적 영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취향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그가 “김남주를 시인으로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농담처럼 말할 때 실망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80년대에도 치열하고 살벌한 시어가 탐탁지 않았어요. 왜 꼭 그렇게 써야 하냐고 타박한 적도 있지요. 저는 누가 봐도 거부감 없는 글을 쓰기 원합니다.”
그 역시 작가의 꿈을 키워왔다. 단편소설을 문학지에 발표한 적도 있고, 1999년엔 에세이집 (푸른숲)를 냈다. 어릴 때부터 문학과 음악, 미술 등 예술 전 분야에 두루 심취했던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 꿈을 향해 선뜻 다가서지 못한 건 생업 탓이기도 하지만, 김남주의 신화에 깔려 있다는 중압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편의 그림자로부터 이젠 멀어져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그를 가끔 간지럽힌다.
그는 김남주 시인의 시가 노르웨이에 소개된 것에 대해 “서구적 관념과의 유사성을 본 듯하다”고 평했다. “‘옛 마을을 지나며’ 등 동양적인 서정이 스며 있는 시도 적지 않지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시에서 형식을 빌려온 측면이 커요. 하이네나 마야코프스키, 네루다, 브레히트의 작품들에서 시적 영감을 많이 받았고, 그게 우리 현실을 형상화하는 도구로 많이 쓰인 셈이지요.” 그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남편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고통의 연장’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진단했다.
1974년부터 교단에 섰다가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해직됐던 박광숙씨는 80년대에 보건사회부 산하 대한가족협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에서 일하다 2000년 교직에 돌아왔다. 10년 전부터 경기도 강화에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아왔으며, 현재는 강화여고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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