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파리지앵은 ‘마천루’가 싫다

등록 2004-10-15 00:00 수정 2020-05-03 04:23

[기획연재 | 과학과 도시]

개발당국과 거주자의 개발관 차이 드러내는 프랑스 리노베이션 진원지 ‘파리 리브 고슈’

▣ 파리=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파리 7대학이 여기에 들어올 예정이다. 이 건물의 리노베이션은 2006년에 끝난다.” 파리 동쪽의 순환도로 부근의 공사장 입간판에 쓰인 문구다. 여기엔 건물 리노베이션이 끝났을 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다. 건물은 외벽과 내부 골조만 남겨놓은 상태다. 바로 옆에 있는 리노베이션 건물은 내부를 완전히 제거했다. 어림잡아 4층 높이쯤 됐을 듯한 건물은 외벽과 지붕만 남아 대형 물류 창고처럼 보인다. 리노베이션 이전에 펌프공장이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 자리엔 국립 건축대학 파리 라 빌레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렇게 파리는 지구촌에서 보기 드물게 보수적인 도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기찻길 복개한 인공대지 위에 건설

노후한 건축물을 지키려 첨단 건축공법을 애써 피해가는 파리. 그것도 몇 세기 전에 세워 시커먼 연기에 찌든 공장을 재건축하는 게 놀랍게만 느껴진다. 물론 도시 전경에 흠집을 내지 않고 역사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대부분의 파리 건물은 엄격한 규제를 받는다. 특히 역사적 기념물이 많은 지역과 센강 연변은 25m(6층 높이)를 넘지 못한다. 아무리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있는 444m 높이의 페트로나스 타워가 우주를 관통하려 해도 파리의 마천루 기술은 19세기에 파리를 정비한 오스만의 지침을 거스르지 않는다. 요즘도 도심의 경우 시라크 대통령을 기념해 세우는 에펠탑 인근의 박물관 공사장에서나 무더기의 대형 크레인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마천루 기술의 순수시대를 이어가는 파리에서 크레인과 불도저가 넘쳐나는 곳이 있다. 바로 파리의 리노베이션 진원지 제13구역 ‘파리 리브 고슈’(Paris Rive Gauche) 지역이다. 물론 여기에도 하늘과 땅을 잇는 마천루 기술이 주요하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센강 동쪽 왼편에 있는 이 지역은 파리 재개발 사업 가운데 가장 넓은 130ha(170만㎡·51만평)나 된다. 그만한 대지를 파리에서 확보하는 건 센강을 복개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지역의 재개발 역시 센강 건너편의 포도주 창고 일대를 재개발한 제12구역처럼 녹지를 기본 구획으로 삼아 보존과 철거에 관한 도시 상세설계에 따라야 한다.

파리 지하철 14호선의 동쪽 종점인 ‘프랑수아 미테랑 국립도서관 역’을 빠져나와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지럽게 펼쳐진 철로에 끊임없이 드나드는 기차와 지하철이 보인다. 하지만 머지않아 파리 순환도로 안의 지상에서 기찻길을 볼 수 없게 된다. 기찻길이 이어지는 구간을 100m 이상의 폭으로 복개하기 때문이다. 복개 구조물 아래의 지하 철길은 그대로 남겨두고 새롭게 조성된 인공대지에 길을 내고 건물을 세운다. 파리시 도시계획 담당보좌관으로 재개발에 참여한 베르나르 로셰는 “리브 고슈는 파리 동부 개발의 거점 구실을 한다. 이르면 2010년 무렵에나 공사가 마무리될 것이다. 센강 좌·우 연안, 도심과 부도심을 연결하는 도시 네트워크의 축을 구상했다”라고 밝혔다.

파리의 도시 건축가들에게 리브 고슈 지역은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기존의 건축물이 있는 다른 재개발 지역과 달리 철도 부지를 활용하기에 색다른 파리를 실현하기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1992년부터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샤를 드골 공항을 설계한 폴 앙드루 등 프랑스의 내로라 하는 건축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저마다 경제적 규모에 비해 너무 생기가 없는 파리의 실루엣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건축가들이 파리의 이미지를 바꾸려는 작업이 신도시에서처럼 원만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파리다움’을 간직하려는 시민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종합건축사무소 ‘아틀리에 리옹’은 2년 전 순환도로 안밖의 접경지역 설계 공모에 당선됐다. 아틀리에 리옹이 파리의 색깔을 바꾸려는 데는 나름의 의도가 있었다. 마른 라 벨레 건축학교 교수로 있는 대표 건축가 겸 도시설계가 이브 리옹은 ‘순환도로의 인위적 파리 단절’을 극복하려고 했다. 파리를 감싸고 있는 순환도로가 파리 도심과 외곽을 차단하지 않도록 접경지역의 고밀화를 시도한 것이다. 문제는 리브 고슈의 경우에도 부도심 건물 높이 관련 37m 이내 규정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시장도 도심과 외곽을 잇는 밀도 높은 주상복합 건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설계안 수정… 발목잡힌 도시 민주화?

하지만 경계를 허물어 도시를 활성화하자는 아틀리에 리옹의 설계안은 지금까지 수정을 거듭하고 있다. 파리의 마천루 기술의 업그레이드를 원하지 않는 거주자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리브 고슈 거주자 모임인 ‘탐탐’(TamTam)을 비롯한 시민단체는 외곽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틀리에 리옹의 건축가 최소진씨는 “파리가 이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만 틀어쥐면 개발에 제한을 받게 마련이다. 파리가 소수의 보금자리에 그치지 않고 민주적 소통의 공간이 되도록 하려는 건축가와 기존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민의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라고 말한다.

요즘도 공사가 한창인 리브 고슈에서 고밀도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개발지역에 지하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지하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데는 복개된 구조물 아래로 기존 건축물이 들어선 지역까지 9m의 높이 차이가 있는 곳이다. 이마저도 공간 활용이 간단하지 않다. 높낮이 차이를 건축물의 개성을 살려 극복해야 하기에 센강 우안의 르 마레 지구에는 지하 5층의 널찍한 지하 3층까지 채광용 광장을 조성할 수도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리브 고슈 지역을 모두 개발해도 상주 인구는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다만 여러 대학이 옮겨오고 사무공간이 크게 늘어나기에 주간 인구만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리브 고슈 재개발은 도시의 기능을 확장하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사를 주관하는 파리개발공사(SEMAPA)가 3500억원을 투자하기에 사무실 한평에 1천만원을 웃도는 상황에서 파리의 장벽은 더욱 높아만 갈지도 모른다. 건축의 민주화를 꾀하는 실험이 기존 거주자의 민의에 의해 조절되는 셈이다. 어쩌면 리브 고슈 거주자들이 건축 허가 과정에서 건물의 형태와 색깔 등까지 꼼꼼히 따지는 파리개발공사를 능가하는 ‘역사 지킴이’인지도 모른다. 초고층 구조물을 짓는 마천루 기술도 시민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하늘을 향할 수 없다. 대신 리브 고슈 주민은 도심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내뿜는 연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