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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고 실험실은 왜 썰렁한가

등록 2004-09-23 00:00 수정 2020-05-03 04:23

대학 진학에 매달리고 이공계 지원도 떨어져… 대학과 연계한 연구교육도 참여율 낮아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지난 9월15일 서울 서대문구 한성과학고 창조관의 생물실험실. 이날 2학년에 다니는 학생들이 일주일 된 계란을 배양해 혈관에서 피를 채취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같은 반 학생이 모두 22명인데 절반밖에 실험에 참가하지 않았다. 실험실에 보이지 않는 10여명은 그 시각 대학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대학 특별전형을 위한 면접에 참가한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도 이미 면접을 보았거나 할 예정이었다. 정녕 ‘과학고 활성화’라는 화두는 속절없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3학년까지 다니면 내신 더욱 불리

현재 전국 16개의 과학고에는 3200여명이 다니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는 대학 부설 과학영재교육원 출신들이다. 과학영재교육원에 입학하는 데 경쟁이 가장 치열한 분야는 수학과다. 대학 교수진으로부터 수준 높은 과외를 무상으로 받아 대학 입시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과 물리 등에서 도드라진 재능을 보인 이들은 일반 고교에 비해 불리한 ‘내신성적’과 비슷한 수준의 또래집단이 모인 ‘수월성 교육’ 사이를 갈등하면서 진로를 결정했다.

하지만 과학고에서 기초과학의 미래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도 과학고 학생의 70% 이상은 이공계에 진학한다. 문제는 이공계 진학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공계 진학률이 지난 2002년 80.8%에서 지난해 72.8%로 떨어진 데 비해 의과대 진학률은 같은 기간에 10.9%에서 14.0%로 올랐다. 과학고 주변에서는 상위권 10%는 의대를 목표로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있다. 올해 국제물리올림피아드 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한 학생 5명 가운데 4명이 컴퓨터공학 등 응용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해마다 과학고 3학년 교실은 썰렁하다. 대부분 2학년 때 조기 수료자·졸업자 수시 전형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들은 다시 특별전형을 준비하거나 내신과 수능시험에 대비해야 한다. 과학고 학생들은 3학년까지 다니면 내신성적이 더욱 불리하다. 140여명이 입학했는데 3학년에 50여명만 남았다면 1등을 해도 전체 내신등급은 상위권에 낄 수가 없다. 과학 본연의 수업도 포기한 채 수능 점수를 위해 저녁 시간에 학원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과학고가 ‘과학고다운’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과학고에서는 일반고교 3년 과정을 거의 1학년 때에 끝내고 2학년 때는 일반 고교보다 나은 여건의 연구실에서 실험하며 자유주제로 과학 논문을 작성하기도 한다. 부산 과학영재학교에서 R&E 프로그램이 이뤄지면서 과학고에서도 대학과 연구소에 연계한 연구교육을 실시한다. 하지만 예산도 적고 지원 학생도 드물다. 한성과학고 3학년 양지연(18)양은 대학 진학 대신 해외 유학을 결심하고 R&E 프로그램에 참여해 ‘소포체에 관한 UPR 반응’을 연구하고 있다.

정부 대책만이 해법일까

이공계의 위기에 따라 과학고에 대한 정부의 대책도 나오고 있다. 교육부는 오는 2008년부터 대학의 이공 계열은 자체 전형 방법에 따라 지원자를 선발하고 대학의 교과목을 고등학교에서 이수하고 그것을 학점으로 인정하도록 했다. 그것만이 과학영재를 위한 과학고를 만드는 해법은 아닐 것이다. 한성과학고 과학영재부장 김규상 교사는 “과학고 나름의 과학영재를 키우려고 한다. 학생선발개선위원회에서 지필고사 없이도 창의성을 평가해 우수한 학생을 뽑을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비교내신이 폐지된 뒤에도 우수한 학생이 몰리는 상황을 주목하기 바란다. 과학고 역시 과학영재 교육의 산실로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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