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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들, ‘노벨상 동산’에 서다

등록 2004-09-23 00:00 수정 2020-05-03 04:23

초일류 과학자를 향해 뛰는 부산과학영재학교… 창의적 교육 · 진로 · 교수진 문제 해결할까


초일류 과학자를 키우기 위해 의욕적으로 출발한 부산 과학영재학교. 새로운 시스템과 우수한 시설로 승부를 건다. 그러나 헤쳐나가야 할 난관도 만만치 않다.


▣ 부산= 글 · 사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세균공생아메바(Amoeba proteus·XD strain)를 모델로 삼아 진핵세포의 기원을 규명하고 공생단백질을 추적하는 젊은 과학자가 있다. 언뜻 대학원 실험실에서 관심을 가질 법한 연구과제 정도로 여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적으로 단백질의 특성을 밝혀 종의 뿌리를 찾으려고 위상차현미경·형광현미경 등과 더불어 지내는 연구자는 놀랍게도 과학영재 진형욱(17)군이다. 지난 9월10일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 사사교육 프로그램(상자기사 참조) 중간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그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학생들과 함께 매주 대학에 가서 교수의 지도를 받아 논문을 완성해 내년 2월에 발표할 예정이다.

우수한 시설과 ‘밀착교육’

국내 최초로 과학영재 교육을 위해 설립돼 두 차례 신입생을 뽑은 부산 과학영재학교(교장 문정오) 1학년(03학번)에 재학 중인 진형욱군. 그는 이 학교의 첫 번째 신입생이 되려고 2학년 때 응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해 입학한 신입생(03학번) 정원 144명 가운데 중학교 1학년만 마치고 들어온 학생이 3명, 2학년을 마치고 들어온 학생도 10여명이나 됐다. 그는 다시 영재학교에 도전해 올해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그동안 제가 무엇이 모자라는지를 제대로 몰랐다. 시험에서 떨어진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과학자에 대한 소망을 튼실히 하게 됐다. 일단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해 연구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전국의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지원한다는 과학영재학교에서 진형욱군은 노벨생물학상의 꿈을 키우고 있다. 언젠가 본관 건물 뒤편에 있는 ‘노벨상 동산’ 중앙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자리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기숙사인 ‘견우관’(남학생)과 ‘직녀관’(여학생)에서 생활하며 강의실에서 만나는 모든 학생이 노벨상을 목표로 삼은 그의 경쟁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 수능시험이라는 부담을 털어내고 무학년제로 능력과 관심에 따라 맞춤식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노벨상을 떼놓은 당상으로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지금은 자신의 실제 이름보다 ‘영재’라는 일반명사로 불릴지라도 영재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당장 대학 입학만 생각해도 먹구름이 군데군데 보인다.

현재 과학영재학교는 부산교육청 소속의 공립학교다. 하지만 운영 형태는 독특하다.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라 교육부가 지정한 영재학교를 부산교육청과 과학기술부가 협약을 맺어 운영한다. 거칠게 구분한다면 하드웨어에 속하는 교육 시설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교육 내용은 과기부에서 지원하는 형태다. 예컨대 지상 9층에 총건평 1500평이 넘는 창조관(첨단과학관) 건립과 천체망원경·핵자기공명(NMR)·주사형 전자현미경(SEM) 등 기자재 구입 등에 소요된 140억원을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지원했고, 해마다 교육연구 프로그램과 해외 위탁교육, 연구·교육(R&E) 프로그램 운영에 소요되는 45억원 이상을 과학기술부에서 지원하고 있다.

이런 대대적인 지원은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를 양성하려는 정부의 의지에서 비롯됐다. 정부가 과학영재의 산실로 불렸던 일반 과학고를 반면교사로 삼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반 과학고는 전국 시·도별로 1개(서울 2개교, 울산 제외)씩 16개교에서 해마다 1100여명씩 뽑는다. 이들은 대부분 서류전형과 면접, 구술고사를 통해 선발된다. 일반 과학고는 다른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지필고사를 볼 수 없기에 과학영재를 선발하는 데 태생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더구나 비교내신 폐지와 학교 설립 급증 등에 따라 자퇴 파동을 겪기도 했다. 독한 홍역을 치른 뒤 안정을 찾았지만 입시 위주 교육에 따라 과학고 본래의 위상은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과학영재학교는 과학영재 교육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설립됐다. 모든 것을 확실히 바꾸지 않는다면 초일류 과학자를 키우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현실이었다. 충격적일 정도로 전혀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래서 과학영재학교는 과기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필기시험을 통한 선발에서 대학 특별전형까지 과학영재의 진로를 단숨에 바꿨다. 과학영재학교 교육과정을 마련하는 데 참여한 조석희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실장은 “학생의 잠재 능력을 빠르게 찾아내 앞서가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공부 잘하는 학업 영재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지식을 변형해 창출하는 창의적 영재를 발굴·육성하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2005년 입학 전형 16대 1

정말로 과학영재학교는 창의적 과학영재의 요람 구실을 하는 것일까. 일단 첫 번째 신입생을 받은 지 1년6개월이 지난 상황에서 과학영재의 요람으로 자리잡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3일 최종 합격자를 발표한 2005년 입학 전형은 16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이는 2004년 11.5 대 1, 2003년 8.29 대 1보다 크게 높아진 수치다. 더구나 최종 합격자 가운데 일반 과학고 재학생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성공적 안착의 단면을 보여줬다. 아직까지는 이공계 이외의 전공을 살리려는 학생들도 눈에 띄지 않고 교과 과정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불만도 크게 제기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입학한 03학번 가운데 6명이 그만뒀는데, 이들은 유학을 가거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았다.

사실 과학영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나름대로 영재성을 ‘검증’받았다. 일반 과학고와 달리 자체 9시간 동안의 지필고사를 포함한 3차례의 엄정한 시험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03학번들은 ‘중력에 관한 모든 현상을 아는 대로 쓰고 이 중 하나를 선택해 연구하고 이를 보고서에 쓰시오’라는 식의 문제지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창의성을 평가하는 잣대가 혼란을 겪기도 한다. 03학번 박태윤군은 지난해 선발 과정에 대해 “04학번의 3차 시험은 단순한 이론시험이나 실험이 불필요한 실험 문제가 출제됐다고 알려졌다. 그런 식이라면 경시대회를 준비했거나 선행학습을 많이 한 수험생에게 이롭다”라고 지적했다.

나름대로 창의성을 검증받아 입학한 학생들은 6학기 동안 175학점(교과 145, 연구 30)을 이수해야 한다. 1학년 때는 주로 고교 3년 과정을 속진 이수하고 2, 3학년은 선택한 교과를 심화 학습하는 과정으로 이수학점을 국내외 대학에서 인정받는 전문교과(AP·Advanced Placement) 과정을 주로 수강한다. 필수교과라 해서 모두 이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수학·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등의 필수과목은 이수 교과목 인정시험(PT·Placement Test)을 통과하면 수강하지 않고도 학점을 취득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보다 훨씬 많은 학점을 이수해야 하기에 일반 과학고처럼 3학기 만에 조기 졸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제도를 활용하더라도 5학기는 마쳐야 가능하다는 게 학교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과학영재로 꿈을 가꾸고 있는 학생들은 고교 과정을 이수하며 대학처럼 자유롭게 학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한다. 그것도 교원 한 사람이 학생 6명을 맡을 정도로 밀착된 교육을 통해 수준 높은 연구를 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파견교수와 전임계약직 교수, 심화선택 교과 시간 강사 등 전공분야에 내로라 하는 연구자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분광학 연구실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천만석(40·분석화학) 교수는 “대학 실험실보다 성능이 좋은 실험기자재가 수두룩하다. 지금은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여건에 만족한다”라고 말하면서 “장기적으로 어떤 목표를 심어줘야 하는지 솔직히 걱정스럽다”라는 고민을 살짝 드러낸다.

선행학습 받은 분야를 연구?

대부분의 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은 독특한 교과 과정에 만족감을 표시한다. 많은 수업이 영어 원서를 교과서로 삼아 토론 위주로 이뤄지지만 모두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영어수업은 14개의 전문 교과에서만 이뤄진다. 간혹 학교에서 1 대 1 수업도 이뤄진다. 필수 교과를 PT로 통과한 학생이 한명일 때 이뤄지는 심화 학습 과정이다. 03학번 강윤환군은 일반물리를 시험으로 통과한 뒤, 배새벽 교수의 유일한 학생으로 주로 영어로 물리PT를 수강했다. 강의 수준이 높다 보니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도 나온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입학한 03학번의 한 학생은 지난해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1년여 동안 영어와 수학에 매달린 그는 이번 학기에 학교를 다시 찾았다.


과학영재학교의 교육 여건만 따진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는 게 빈말이 아니다. 내년 신입생으로 뽑힌 최종 합격생들은 지금부터 인터넷을 통해 과제물을 제출하는 것으로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체험한다. 그리고 입학을 하면 일반 고교 수준의 등록금만 내면 수억원대의 실험기자재를 수시로 이용할 수 있다.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이라 해봐야 한끼에 2500원 하는 식비와 영어원서 구입비 정도이다. 학부모 대표를 맡고 있는 신정혜씨는 “그래도 생활비가 한달에 50만원 안팎씩 들어간다. 물론 일체의 사교육비가 들어가지 않고, 각계에서 후원하는 장학제도의 도움을 받기에 부담을 덜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과학영재의 자질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 것일까. 과학영재로 뽑힌 학생들은 전문 분야의 우수한 교수진으로부터 나무랄 데 없는 교육을 받는 게 사실이다. 학생들에게 과학적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교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영재학생(gifted student)들이 자신이 받은 선물의 내용물을 제대로 확인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많은 학생들은 중학교에 다닐 때 대학부설 과학영재센터 등지에서 선행학습을 받은 교과를 연구분야로 삼기 일쑤다. 과학적으로 자신의 영재성을 확인하지 않고 관심을 기울인 경험에 의거해 ‘수학영재’ ‘화학영재’ 등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과학영재가 지식 습득이나 사실의 이해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선행학습에 익숙한 학생들이 대학 과정을 미리 배우는 것을 영재교육이라 단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컴퓨터 영재들이 참가하는 국제정보올림피아드를 준비했던 부산대학교 조환규 교수(컴퓨터과학)는 영재교육이 단순히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대학에서 배울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게 영재교육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능력이 있는 학생을 컴퓨터 영재로 할 지에 대한 기준도 모호하다. 학생들이 자신의 영재성을 판단할 과학적 분석 도구를 마련해 자신의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지적은 과학영재학교 교사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화학을 가르치는 김원전 교사는 “일반 과학고 학생들과 달리 과학영재들은 과목별 학업 성취도의 차이가 천차만별이다. 영재성은 학점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지금은 수학과 물리 2개 과목을 중심으로 과학영재를 육성해야 할 것이다. 화학이나 생물, 지구과학 등은 대학에 들어갈 때 결정해도 늦지 않다”라고 말한다. 기초과학을 중심으로 영재 학생을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른다면 PT를 통과해 필수 교과를 건너뛰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강의실은 지적 욕구를 채우는 장소에 머물지 않고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 속에서 창의적 영감이 흐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5년 뒤의 비전을 보여줘라

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은 수능시험이나 내신성적에 관계없이 특별전형으로 KAIST나 포항공대 등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내신성적에 적잖은 신경을 쓰고 있다. 심지어 계절학기를 이용해 학점이 낮은 교과목을 다시 수강하기도 한다. 서울대를 비롯한 종합대학에 진학할 방법이 확정되지 않은 탓이다. 일단 서울대에 들어가려는 학생은 전문교과 25학점을 취득하면 특별전형에 응시할 자격을 주기로 잠정 합의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다른 대학과는 협의가 진행되지 않아 대학 진학을 둘러싸고 자칫 과학영재들이 내홍을 겪을 수도 있다.

이제 1년이 지나면 과학영재들은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기숙사 소등 시각이 새벽 1시로 결정된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로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들. 지금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노벨상을 향해 달려갈지라도 영재성을 살리는 교육을 받는지는 단정하기 힘들다. 과학영재를 가르치는 교사의 상당수는 영재교육에 관한 전문 소양이 부족할 수 있고, 파견교수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대학에 돌아갈 사람들이다. 학생들에게 절실한 것은 그야말로 헌신적 열정으로 과학영재의 앞날을 밝혀줄 교수진이다. 그래야만 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젠 과학영재들이 5년 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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