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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 납치 알았나… 미국 조사 거부

등록 2004-09-09 00:00 수정 2020-05-02 04:23

국회 진상조사특위 외교부 전문 단독 입수… 허술한 한-미 공조, 파병 강행한 정부에 부담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김선일씨 납치 사건 당시 외교통상부가 미군의 사전 인지 의혹에 대한 확인을 미국 국방부에 요청했으나, 미 국방부가 이를 묵살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지난 7월30일∼8월3일 열린 김선일씨 사건 국회 진상조사특위 때 의원들에게 열람된 외교부 전문이 최근 공개됨으로써 드러났다.

김천호 사장이 미 군납업체 직원에게 부탁

우원식 의원(열린우리당)이 지난 9월3일 에 공개한 외교부 전문 내용을 보면, 김씨가 이라크 무장단체 ‘유일신과 성전’(Jammat al Tawhid and Jihad)에 의해 살해된 지난 6월23일(한국시각) 외교부는 미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지미’(Jimmy)라 불리는 미국인의 신분과 활동 내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지미는 이라크에 있는 미 군납업체인 AAFES(미 국방부가 운영하는 PX)의 한 하청업체 직원으로, 김천호 가나무역 사장이 김씨가 납치된 지 열흘쯤 뒤인 6월10일 김씨의 행방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인물이다. 김천호 사장은 김씨 납치 사실이 방송에 보도된 지난 6월21일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임홍재 대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만약 지미가 김천호 사장의 부탁을 AAFES를 통해 미군쪽에 전달했다면, 미군은 6월10일 무렵에 이미 김씨 납치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외교부는 당시 미군이 한국의 이라크 추가 파병(6월18일 공식 발표) 문제 때문에 김씨 납치 사실을 알고서도 숨겼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유력한 단서인 지미와 관련된 사항을 알아보도록 미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지시했다. 미국 주재 한국대사관의 최아무개 서기관은 6월23일 외교부에 보낸 회신에서 “미국쪽으로서는 이런 얘기(김씨 납치 사실을 고의로 숨겼다는 의혹)를 듣는 것이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해명을 요구하겠다”고 답변했다.

최 서기관은 미 국방부의 한국담당관을 만나 지미에 대해 확인을 요청했고, 미 국방부 한국담당관도 이를 확인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최 서기관이 6월25일 외교부에 보낸 전문에는 “정황상 지미는 하급 민간인 군속인데, 지미가 미군에 (김씨 납치 사실을) 통보했다고 간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나 지미가 MP 등 미군 당국에 별도로 보고했다면 상황은 달라지니 이 부분에 대해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는 데 동감을 표시한다”라고 돼 있다. 지미가 미군 관계자에게 김천호 사장의 얘기를 전했다면 미군이 사전에 김씨 납치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최 서기관은 28일과 30일에 보낸 전문에서도 “이번 보고에 (이 건이) 포함되지 않을 경우 재차 조사토록 하겠다” “지미 건 계속 폴로업(follow-up)하겠다”는 한국담당관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7월2일 돌연 태도를 바꿨다. 이날 최 서기관이 보낸 전문에는 미 국방부 한국담당관의 상급자인 한국과장이 외교부의 확인 요청을 거절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최 서기관은 “현재 미군쪽 분위기는 상기 ①항(김씨 납치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내용)과 같이 이미 결론을 내렸고,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 문제에 대해 추가로 자체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에 별로 반응이 좋지는 않은 것 같으며,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조사가 진행될지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음”이라고 보고했다. 지미 건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인정했던 한국담당관도 이 전문에서 “실무선에서 실수하거나 상부 보고가 지연될 수는 있지만, 파병 문제 때문에 고의 은폐했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라고 말을 바꿨다. 이 전문 내용을 종합하면 미군이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다시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게 미 국방부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납치 사실 먼저 알았다는 정황 많아

하지만 미군이 김씨 납치 사실을 사전에 몰랐다는 것은 미군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외교부는 6월23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이라크 현지에 파견된 우리 군 관계자가 사건 해당 지역 미군 지휘관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피납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을 확인했음”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우리 군 관계자가 확인한 것은 미군 관계자들의 “〈CNN〉 보고 처음 알았다”는 ‘말’뿐이었다. 이라크에 파견된 우리 군 관계자는 6월21일 미군 당국에 외국인 실종자 명단에 한국인이 있는지 문의했는데 미군쪽으로부터 “없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따라서 주미 한국대사관의 최 서기관과 미 국방부 한국담당관의 접촉은, 우리 정부가 김씨 납치에 대한 보고 누락과 은폐 의혹 등을 확인해줄 것을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사전 인지 의혹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력한 단서를 제시하며 ‘해명’을 요구한 것이다.

외교부뿐만 아니라 우리 국방부도 지미 건에 대한 확인 작업에 나섰던 것으로 확인됐다. 합동참모본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이라크에 파견된 우리 군 관계자는 임홍재 대사한테서 지미 건에 대한 얘기를 듣고 AAFES 관리를 담당하는 미군 장교 등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려고 했으나, 통화 상태가 안 좋아 확인을 못했다. 이 관계자는 6월25일 미군쪽으로부터 외국인 실종자 명단을 넘겨받아 확인했는데, 이 명단에는 김씨가 6월20일 실종자에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김씨가 왜 이날 실종자 명단에 포함돼 있는지에는 전혀 확인된 게 없어 이 명단의 신뢰성은 크게 떨어진다.

미군이 김씨 납치 사실을 방송 이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정황은 많다. 김천호 사장은 지난 국회 국정조사 특위 때 증인으로 출석해 이런 정황을 증언했다. 김 사장이 6월12일 무렵 AAFES를 찾아갔을 때 평소 알고 지내던 미국인 여성 직원을 만났는데, 이 직원이 먼저 김씨 납치 사실을 물어왔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이 직원은 지미와 같이 일하는 여성인데, 김씨 납치 사실을 먼저 물어보기에 김씨의 행방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며 “김씨 납치 사실이 이 업체 직원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같았다”라고 진술했다.

AAFES는 미 육군 및 공군이 직접 운영하는 PX로 평소 미군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 업체 직원들이 김씨 납치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미군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미군 정보장교들에게 김씨 소식이 전해졌다면, 이 사실은 미군 당국의 공식 첩보로 접수됐을 것이다. 엄호성 의원(한나라당)은 당시 국정조사 특위 때 이 가능성을 집요하게 추궁했으나 우리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우리 군 비상 사태 때 미군 도움 못 받아”

외교부의 미군 사전 인지 의혹 확인 요청을 미국 정부가 거절한 것은 이라크 추가 파병을 강행하고 있는 우리 정부로서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이 우리 정부가 이라크 추가 파병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한-미 공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원식 의원은 “한-미 공조가 제대로 지켜졌다면, 미군이 사전 인지 의혹을 정확하게 밝히고 사후 대책을 세웠어야 한다”며 “앞으로 이라크에서 우리 군이 비상 사태를 당했을 때 미군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우려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김씨의 석방 협상에 나섰던 이라크인 변호사는 지난 국정조사 때 “한국 정부의 추가 파병 발표와 방송 후 이를 재확인한 것이 김씨를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미군의 6월19일 이라크 팔루자 공습 강행도 김씨를 납치한 무장세력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APTN〉과 를 통해 김씨 납치 사실을 알린 뒤 한국 정부와 미군의 반응을 지켜본 무장세력에게는, 6월18일 한국의 추가 파병 발표와 미군의 팔루자 공습을 ‘협상 거절’의 메시지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 의원은 “만약 한-미 공조가 잘 지켜져서 김씨 납치 사실을 즉각 파악한 뒤 우리 정부는 추가 파병 발표를, 미군은 팔루자 공습을 미뤘다면 김씨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고 있는 우리 정부가 이런 지적을 잘 음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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