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폐지 반대론 등을 내걸고 세 결집하는 열린우리당 ‘소신파’들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개혁과 과거사 청산을 최고의 화두로 설정한 열린우리당 안에서 최근 중도보수 성향의 목청을 높이는 ‘소신파’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속 의원 대다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개혁적 진보’로 규정한 열린우리당 안에서 이른바 관료나 기업가 출신의 ‘안보통’ ‘경제통’ 의원들은 현안에 대해 공개적 발언을 꺼리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관료 출신 한 의원은 “분양원가 공개 논란 때 확인됐듯, 말 한번 잘못하면 반개혁 세력으로 매도될 수 있어 말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이 최근 당내 개혁소장파들의 국보법 폐지 드라이브에 맞서 ‘폐지 반대론’을 내걸고 세결집을 시도하는 등 심상찮게 움직이고 있다.
안영근 · 조성태 등 외교안보통
안영근 의원(제2정책조정위원장)은 열린우리당 안에서 보수적 목소리의 대변자로 급부상했다. 그는 지난 16대 국회 때 보수적 목소리가 압도하던 한나라당 의원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와 전향적인 대북 정책을 주창하다 당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의원으로 찍혀 ‘탈당’ 압력에 시달렸다. 결국 한나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 창당에 동참한 그는 요즘 당내 개혁·소장파로부터 “보수의 좌장”으로 불린다.
그는 지난 5월까지만 해도 당내 개혁파의 핵심으로 분류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김혁규 전 경남지사를 ‘국무총리 카드’로 내놓자 송영길 의원 등 소장·개혁파들과 함께 “당과 청와대의 수평적 관계”를 요구했고, ‘김혁규 불가론’을 관철했다.
안 의원이 소장개혁파들과 전혀 다른 음색을 내기 시작한 것은 6월부터다. 김선일씨 납치살해 사건으로 추가 파병 논쟁이 뜨거워진 6월24일 그는 “망치 들고 싸우러 가느냐. 이왕 파병하기로 했으면 자이툰 부대가 충분한 위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전투력 보강이 필요하다”면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주창한 ‘전투병 확대를 통한 응징보복론’에 동조했다. 이후 ‘한-미동맹 우위론’을 근거로 파병찬성 당론을 모으는 데 총대를 멨다.
안 의원은 8월26일, 관료나 기업가 출신의 중도보수 성향 의원 16명과 함께 국보법 폐지 반대론을 조직화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우리의 골수 지지자 가운데 상당수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것은 맞지만, 중도파도 적지 않다”며 국보법 폐지가 아닌 개정을 역설했다. 특히 “우리 사회에 골수 주체사상파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고, 국가보안법이 없어질 경우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홍보하거나 김일성 주석 사망을 애도한다 해도 처벌할 수 없다”는 보수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2003년 11월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하면 우리 기업이 위험하다”며 여야 의원 34명의 반대성명을 주도했고, 긴급조치 9호 위반(1978)·계엄령 위반(1980)·국가보안법 위반(1983)·집시법 위반(1987) 등으로 투옥된 경력이 있는 안 의원의 변신에 대해 당내에서도 다소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물론 안 의원은 당당하다. 그는 “현재 안보 상황과 여야 관계를 고려할 때 국가보안법을 폐지한 뒤 닥칠 역풍을 막아낼 힘이 없다”는 현실론, “여당은 자기 힘의 70%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야당 몫으로 남겨둬야지, 원내 다수를 점했다고 100% 힘을 쓰면 오히려 맛이 간다”는 여야 관계 정상화론을 변신의 근거로 내세웠다. 그는 “이것은 나의 소신”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외교·안보통 가운데 보수적인 자기 소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또 다른 인물로 국방장관 출신인 조성태 의원과 미국통인 유재건 국회 국방위원장이 손꼽힌다. 이라크 파병 등 주요 외교안보 현안에 중도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해온 두 의원은 열린우리당 안에서 개혁파 대 중도보수파의 세대결 논란을 촉발한 8월26일 국보법 폐지 반대 의원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두 의원은 25일 국회국방위에서 “이대로 가면 국보법 폐지가 대세인 것처럼 비쳐진다”며 “개정론자들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고, 당내 관료와 기업인 출신의 중도보수 성향 의원들에게 급히 사발통문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석 의원 등 국보법 폐지론자들이 다음날 열릴 정책의총에서 소속 의원 83명 등 여야 의원 102명이 서명한 국보법 폐지 요구를 당론으로 확정하려는 데 맞서 맞불작전을 펼친 것이다. 유 의원은 의원들에게 “북한은 적화통일 전략, 특히 남한 내 동조세력과 규합해 일거에 적화한다는 통일전선 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보법은 체제 수호라는 상징성과 정체성을 담보하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경제통 채수찬의 거침없는 반대
조성태 의원은 국보법 폐지 반대 모임 결성 이유에 대해 “북한 핵, 한-미동맹, 주한미군 재조정 등 안보 상황이 전반적으로 안 좋은 상황에서 국보법을 폐기하면 북한은 더욱 희희낙락할 것”이라며 “계속 침묵할 경우 폐지에 적극 동조하는 것처럼 비쳐질 것 같아 나섰다”라고 말했다. 그는 “국보법 폐기는 시기상조라는 소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폐지 서명 요구에 응한 의원들이 많다”면서 “이런 의원들의 목소리도 적극 제시해야 한다”고 말해 지속적인 동조세력 규합 의사도 드러냈다.
외교·안보통들은 그나마 자기 목소리를 내지만, 정책위원회 등 주요 당직에 포진한 경제통들은 현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홍재형(당 정책위원장·전 경제부총리), 이계안(제3정조위원장·전 현대캐피탈 회장), 안병엽(제4정조위원장·전 정보통신부 장관), 강봉균(전 재경부 장관), 정덕구(전 산업자원부 장관), 김진표(전 경제부총리) 등 ‘경제통’들이 많다. 하지만 이헌재 경제부총리와 당내 개혁성향 386 의원들 사이에 ‘성장-분배 우선순위 논쟁’, 여야간 ‘경기부양 논쟁’이 불거질 때조차 이들은 한 발짝 물러선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미국 라이스대학 경제학 교수 출신인 채수찬 의원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채 의원은 여권을 혼돈에 빠뜨린 분양원가 공개 논란에서 “자장면 값만 알고 품질만 알면 되지, 면이 얼만지 양념이 얼만지 안다고 자장면 값이 낮춰지겠냐”며 거침없이 반대 의견을 밝혀 비판여론의 표적이 됐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지향하는 시장개혁의 성패를 좌우할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인 기업의 출자총액 제한제 유지와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계좌추적권 재도입 당론에 대해서도 반대의 뜻을 밝혀왔다. 지난 8월24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그는 “공정위가 (재벌 총수의 소유지분과 지배권과의 차이를 나타내는) 소유-지분 사이 괴리도를 (재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도입하려는 의도가 뭐냐”고 공정위를 몰아세우며 “투자가 훨씬 광범위한 목표인 것을 감안해 지배구조 개선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한나라당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친기업적 논리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채 의원의 측근은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시장원리가 강조돼야 하며, 당면한 당의 개혁 과제들 가운데도 지나친 규제가 있는 것은 고쳐야 한다는 게 의원의 기본 소신”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관료 출신 의원 가운데는 김혁규 의원(전 경남지사)이 보수성향의 소신 발언을 거듭하면서 당 지도부와 계속 각을 세우고 있다. 그는 분양원가 논란 때 “기업하는 사람이 원가를 공개한다는 것은 시장경제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천정배 원내대표, 신기남 전 의장 등의 원가 공개 방침에 반대했다. 최근에는 노 대통령과 신임 이부영 의장 등 여권 핵심부가 추진 중인 과거사 청산 드라이브에 대해 “국민은 친일 진상 규명과 역사 세우기도 중요하지만, 우선순위를 잘못 잡은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면서 “경제 살리기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누가 눈치 주고 입 막은 적 없다”
몇몇 의원의 이런 소신 행보에도 열린우리당 안의 중도보수 성향 의원들 다수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8월26일 발족한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의원 모임을 중심축으로 이들이 결집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세확산 여부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 안팎에서는 경제정책, 과거사 청산, 당 정체성 논쟁 등으로 확전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안영근 의원은 “이미 첫 모임에 참석한 17명의 의원들이 앞으로 현안이 있을 때 의원총회 발언이나 성명서 등으로 안정 기조의 국정운영 정착을 위해 외교·안보·경제 분야에 경험 있는 중도적 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며 “당내 세력 갈등으로 비치는 것은 경계하겠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개혁성향의 한 의원은 “당 안에서 누가 눈치 주고 입을 막은 적도 없는데 말을 잘못하면 반개혁으로 몰릴 것이라는 실체도 없는 붕 뜬 분위기에 지레 겁먹고 말을 못했던 것 아니냐”면서 “자신들의 소신 없음을 탓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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