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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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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 또 하나의 블랙홀

등록 2004-08-26 00:00 수정 2020-05-03 04:23

‘과거사 드라이브’라는 전투를 시작한 노 대통령, 이번에도 승리할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 특별위원회 설치를 제안하며 다시 승부를 걸었다. 그는 대선자금과 재신임 문제에 이어 승리를 거둘 것인가.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승부를 걸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과거사에 대한 포괄적 진상 규명과 이를 위한 국회 특별위원회 설치를 제안한 게 도화선이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진보·보수 사회세력이 총출동해 힘을 겨룰 수밖에 없는 ‘과거사 대전쟁’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즉흥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과거사 전쟁에 관한 한 노 대통령이 성큼성큼 앞서가고 여당은 주춤주춤 뒤따르는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7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과거사에 대한 포괄적 진상 규명’을 언급했으며, 광복절 경축사와 그 이틀 뒤 한국기자협회 창립대회에서 화두를 계속 이어나갔다.

열린우리당은 광복절 경축사 방향을 놓고 8월15일로부터 일주일 전쯤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 신기남 당의장, 천정배 원내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 당청 협의를 가졌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신기남 당시 의장은 ‘과거사 드라이브’에 찬성의견을, 천 대표는 “경제와 민생이 어려운데…”라며 유보적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청와대는 애초 잡은 방향대로 과거사 문제를 광복절 경축사의 중심 화두로 확정함으로써 전선을 설정하고 나갔다.

노 대통령은 8월17일 국무회의를 통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사 진상규명 특위 설치를 국회에 제안한 것에 대해 “야당 관계를 염두에 두고 제기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전후부터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과 논의를 거쳐 과거 국가 권력이 불법적 행위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 가치를 무너뜨린 일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어떻게 바로잡을까 깊이 고민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에는 나름의 진실이 담긴 것 같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이던 2002년 9월11일 영남대 강연에서 “과거 역사가 지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관을 토대로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를 한 바 있다. 또 올해 신년사와 3·1절 기념사에서 “친일행위 진상 규명은 언젠가는 반드시 한번 해야 되는 역사적 과제”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과거사 드라이브에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보긴 어렵다. 노 대통령은 7월28일 목포를 방문해 “지금 정치적 전선은 과거 유신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미래로 갈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국가 정체성 논쟁을 걸어오고 있었다. 즉, 국가 정체성이나 신행정수도 따위를 둘러싼 논쟁을 ‘유신 세력’ 대 ‘미래 세력’ 구도로 전환함으로써 반대 세력의 목소리를 일거에 잠재우려는 의도가 그의 발언에서 엿보였다.

노 대통령은 지난 5월 문재인 변호사를 시민사회수석으로 임명하면서부터 과거사 정국에 대한 준비를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대선자금, 대통령 재신임, 탄핵 의결, 총선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한 직후부터 다음 단계의 국정 화두로 ‘과거사 규명’을 설정하고 나름의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 수석은 이에 따라 시민사회 지도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 출신의 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은 “노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이런 말 저런 말을 한다고 보는 것은 전적으로 오해”라고 말했다.

명분 토대로 판 키우는 ‘노무현 방식’

노 대통령의 행보에 담긴 독특한 스타일과 정국운영 포석을 따져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이와 관련해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자금과 재신임 문제에 이어 또 하나의 블랙홀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블랙홀은 항성이 진화의 최종 단계에서 폭발한 결과, 초고밀도·초강중력을 갖게 되어 빛이나 물체 따위가 그곳으로 빨려들어가면 탈출할 수 없다는 가설적인 우주 영역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대선자금 정국에선 정대철 이상수 전 의원, 안희정씨, 그리고 김영일·최돈웅 전 의원 등이 사법처리되는 진통이 벌어졌다. 이들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블랙홀로 빨려들어간 결과 나름의 정치개혁이 이뤄졌으며, 열린우리당은 총선 승리를 통해 최종적 수혜자가 됐다. 대선자금·재신임 정국의 핵심 참모가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 이호철 민정비서관이었는데, 이번 과거사 드라이브의 청와대 주무 참모가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대선자금 드라이브의 특징은 압도적 명분의 우위를 토대로 일단 판을 크게 키우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사상자가 나올 수 있지만 노 대통령은 이에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정치권에선 대선자금 정국과 비슷한 초기 양상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신기남 의원이 선친의 일제 때 헌병복무 경력이 불거지면서 당의장직에서 낙마했는데, 이것은 지난해 정대철 당시 민주당 대표가 구속되던 모습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신 의원은 과의 인터뷰에서 “전투에서는 부상자도 나오고 사상자도 나오는 법”이라고 자신의 처지를 해석했다. 여권은 신 의원의 낙마를 ‘읍참마속’으로 규정하면서 한나라당쪽에 역사 재평가의 칼날을 돌릴 태세이다.

‘노무현 방식’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권력의 작용보다는 ‘공론의 형성’을 중시하고 그 흐름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대선자금을 수사하고 대통령직 재신임을 걸 때도, 여당의 다수 인사들은 그 방식을 미심쩍어했다. 그러나 대선자금 정국에서는 검찰이 ‘송짱’ ‘안짱’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정도의 국민적 지지 여론에 힘입어 수사를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과거사 드라이브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8월17일 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노 대통령의 ‘과거사 규명’ 주장에 “역사적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응답(62.1%)이 “그동안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으로 무의미한 일”(34.9%)이라는 답변보다 두배가량 높게 나왔다.

반면에 열린우리당은 과거사 규명의 구체적인 방법론 따위가 막연하다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8월22일 대통령이 제안한 국회 특위와 관련해 “야당이 반대한다면 굳이 고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과거사 규명의 명분이야 옳지만 과연 어떤 과거사에서 시작해 어떤 방법으로 규명하겠다는 건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의제를 선도한 청와대쪽에 ‘준비된 로드맵’이 있으면 넘겨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런 건 없고 앞으로 공론화할 일”이라는 원론적 답변만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당 내부에서도 전망 엇갈려

어쨌든 노 대통령은 대선자금·재신임 의제를 통해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 (여권이) 간주했던’ 최병렬 한나라당 체제를 무너뜨렸다. 탄핵 의결까지 치달은 끝에 총선을 통해 여당 단독 과반수를 획득하는 일대 승부수를 성공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과거사 드라이브는 성공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선 여당 내부에서도 부정적·긍정적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특정 의제 중심으로 전선을 설정해 긴장을 높임으로써 지지자를 동원하고 결속시키는 게 노 대통령 특유의 국정운영 방식”이라며 “그러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번번이 이래서야…”라며 회의적 견해를 밝혔다. 다른 관계자는 “대선자금·재신임 정국은 총선을 통한 궁극적 심판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승부를 가릴 수 있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논쟁만 지루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과 언론개혁 등에 가장 선명한 주장을 펼침으로써 청와대와 코드가 맞던 신기남 의원도 의장직에서 낙마한 상태다.

반면에 노 대통령 직계그룹의 분위기는 다르다. 한 386 국회의원은 “대통령은 이런 방식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한 당내 경선과 대통령 선거 본선을 모두 이겼으며, 총선도 승리로 이끈 바 있다”며 “과거사 규명에 역사적 명분이 있는 만큼 중도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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