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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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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점은 부끄러움이 있다?

등록 2004-08-13 00:00 수정 2020-05-03 04:23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다”는 KAL 858 수사관들에게… 수사 미흡 인정하면 재조사를


520호(2004년 8월5일 발행)에 실린 KAL 858기 폭파 사건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의 인터뷰를 읽고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가 반론 성격의 글을 보내왔다. 은 이 사건의 재조사 논의가 더 활발하게 진행되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싣는다. - <i>편집자</i>


▣ 신동진/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사무국장 · 〈KAL 858, 무너진 수사발표〉 저자

에 KAL 858기 사건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의 공식 인터뷰가 실릴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이하 진상규명대책위)는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기사를 다 읽고 난 뒤 돌아온 것은 큰 실망감뿐이다. 수사관들의 ‘증언’이 과거의 것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했다는 수사관들의 고백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그들 말에 따르면 ‘북괴정예특수공작원’은 ‘고도의 심리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나. 고도의 심리전술에 말려들 위험을 무릅쓰고 북괴정예특수공작원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진술 내용이 많이 틀리니까, ‘김현희가 일부러 안기부를 골탕 먹이려고 그랬는지 한때 의심’까지 했다고 한다. 왜 ‘의심’만 하고 전면적인 재조사는 하지 않았는가? 안기부는 재조사는커녕 오히려 김현희의 거짓 진술들을 두둔하기 위해 의도적인 은폐를 해왔다.

“근거를 제시하라”는 적반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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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관들은 김현희가 KAL 858기 폭파에 사용했다는 폭약이 무엇인지 모른 채, 이러저러한 정황을 들어 ‘콤포지션 C4 폭약’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면서 김현희 옷과 김승일의 복대에서 검출됐던 TNT 성분에 대해서는 “그건 정말 우리도 모를 일이다. 원래 옷과 복대를 만들 때 TNT 성분이 들어가는 건지…”라고 했다. ‘옷과 복대를 만들 때, TNT 성분이 들어간다’는 발상은 참 놀랍다. ‘북괴정예특수공작원’을 수사한 수사관들의 이런 발언은 유족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결국 용의자에게서 검출된 화약 TNT, 즉 물증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고 정황 증거로 추정한 콤포지션 C4를 범행에 사용된 폭약으로 제멋대로 단정하는 수사가 과연 수사인가? 세상에 어느 수사가 물증이 있음에도 진술에 의존해 추정을 하는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1988년 1월15일 수사 발표 때, 안기부는 김승일과 김현희의 소지품에서 TNT 화약성분이 검출됐다는 사실을 고의로 은폐했다는 점이다.

수사관들은 ‘조작 의혹을 제기하려면 먼저 그 근거를 제시하라’고 말했다. 이는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가족회와 진상규명대책위가 무슨 수사기관인가? 진상규명대책위가 재조사를 요구하는 것은 ‘조작 근거’를 찾기 위함이다. 명쾌하게 설명이 안 되는 수사 결과를 다시 한번 면밀하게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수사가 미흡했다고 인정하면서, 조작 근거를 피해자들에게 찾아오라고 윽박지르는 수사기관이 어디 있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세계경제 규모 십수위권 국가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이 할 소리인가? 국정원은 그동안 가족회와 진상규명대책위의 공개 면담 요구를 거절해왔다. 증거물 촬영도 수사기록 공개도 거절했다. 수사기록 등은 조작 근거를 찾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다. 이런 요청에 응하지도 않으면서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정원은 김현희 진술이 충분한 증거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족회와 진상규명대책위는 증거물, 즉 물증에서 근거를 찾기 원한다. 그러니까 제발 증거물과 수사기록을 공개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김현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지나가는 소도 웃을’ 소리 좀 그만하고 김현희와의 만남도 주선해주기 바란다. 김현희에게도 인권이 있지만, 실종자 가족들의 17년간 짓밟힌 인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김현희는 ‘역사의 증인’으로 필요해서 살려준 ‘사형수’였다. 지금이 바로 그 ‘역사의 증인’이 제 몫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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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와의 만남 주선해야

“수사의 미흡한 점을 인정한다. 유족들께 미안하다”는 수사관들의 증언은 참으로 가증스럽다. 국정원은 무고한 민간인 115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탄테러 사건’의 수사 미흡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사죄는 아니다. 언론을 통해 슬쩍슬쩍 흘리는 비공식적인 ‘사과’로 얼버무릴 사안은 아니지 않은가. 또 그렇게 엄청난 사건을 엉터리로 수사한 수사관들에게 아직도 공안수사를 맡겨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수사 미흡을 인정한다면 KAL 858기 실종자 가족들의 재조사 요구에 지금이라도 당장 응하라. 17년 동안 KAL기 실종자 가족들을 감시하고, 겁주고, 김현희를 만날라치면 강제로 끌고 가 낯선 곳에 떨어뜨려놓고, 진상조사 요구는 철저히 무시하면서 피해자 가족들에게 온갖 수모를 줬던 국정원은 가족들에게 진솔한 반성과 함께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

국정원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김현희 타령’만 하고 있다. 하지만 진상규명대책위가 제기하는 KAL 858기 사건 수사의 문제점들 가운데는 김현희의 진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안기부가 ‘KAL 858기 동체조각’이라고 주장한 조각들에서 폭발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과 ‘KAL 858기의 부유물’이라고 주장한 구명보트는 거짓 증거물이라는 점, 그리고 KAL 858기가 ‘공중 산산조각 폭발’(수사 발표, 공소장에 기재)됐다고 했다가 ‘추락’으로 말을 바꾼 점 등이다. 추락 지점에 관한 것도 허점투성이다. 국정원이 얘기하는 지점과 버마가 작성해 국제민간항공기구에 보고한 지점 사이에 약 190km의 차이가 있고, 추락 지점이 좌표까지 특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블랙박스 수색을 하지 않은 것 등이다. 수사관들은 과의 인터뷰를 이런 말로 끝맺었다. ‘안기부 수사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다’라고. 내겐 그것이 “안기부 수사에 아흔아홉점은 부끄러움이 있다”는 말로 들린다. 국정원이 진정으로 ‘미안’하고 ‘수사 미흡’을 인정한다면, 지금이라도 가족회와 진상규명대책위의 요구대로 공개 면담과 증거물 촬영에 응하길 바란다. 또 KAL 858기 진상 규명에 뚜렷한 기여를 한 의 저자인 일본인 저널리스트 노다 미네오씨의 입국 금지 조치를 해제하기 바란다. 미네오씨는 ‘국익을 해하는 자’라는 이유로 입국 금지됐다고 한다. 그 ‘국익’이 ‘대한민국의 이익’인지 ‘국정원의 이익’인지 필자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에 대한 국정원의 판매금지가처분신청도 법원이 기각한 마당이다. 에서 제기한 의혹들이 ‘이유 있다’라고 대한민국 사법부가 판결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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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폭탄테러로 밝혀져도 인정하리라

최근 고영구 국정원장은 특별법이 만들어지면 재조사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대통령과 여당은 독재와 냉전시대의 의문 사건들을 다룰 수 있는 기구를 만들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이번 기회에 가족회와 진상규명대책위는, 국정원이 KAL 858기 폭파 사건의 진실을 찾아나서는 데 동반자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우리는 KAL 858기 실종 사건이 정말로 안기부의 과거 수사 발표대로 북한의 폭탄테러로 밝혀진다면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실종자 가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KAL기 사건이 ‘남한의 자작극’으로 밝혀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탑승객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으며, 왜 그런 최후를 맞이했는지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형제·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아야, 떠났어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미련’을 정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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