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 한반도 통일 뒤 동북지방 동요를 우려
▣ 베이징= 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중국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중국이 어느 날 낯빛을 바꿔 초강대국으로 변하고 세계에서 패권국가를 자청하며 곳곳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 인민들은 마땅히 중국에게 사회제국주의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인민들과 함께 그것을 타도해야 할 것입니다.”
1974년,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국제연합(UN) 특별회의에 참석한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 중국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UN에서 중국의 ‘반패권주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중국은 아직도 30년 전 그대로의 ‘낯빛’을 하고 있을까. 중국인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것도 아주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30년 전 반패권주의 선언은 어디로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고구려사 문제는 뭐지?”, “그건 학술적인 문제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잖아. 그 문제와 중국의 패권주의가 무슨 상관이냐. 한국인들은 왜 그 문제로 흥분을 하는지 모르겠어. 역사 문제는 민족주의 감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거야. 학술적 논리와 이성으로 풀어야지.”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하는 한 중국인 박사연구생은 최근 한-중 사이에 벌어지는 고구려사 관련 역사 논쟁을 한마디로 ‘학술 문제’라고 못박으며 한국인을 ‘다분히 감정적인 민족’이라고 몰아붙인다.
고구려사 문제를 철저히 학술 문제라고 ‘발뺌’하는 중국 정부의 말투를 닮아 있다. 그는 이어서 한번 더 다짐하듯 말한다. “주변 국가에서 아무리 중국이 패권을 추구한다느니 또는 반대로 패권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고 해도 중국은 절대로 그럴 마음이 없다.” 과연 그럴까. “이것은 중국식 패권주의 발상이다. 절대로 학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중국 학자들도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중국이 아무리 패권주의가 아니라고 해도 (개인적으로는) 패권주의 외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동아시아 정세를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면, 중국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중화주의의 부활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조선족 학자는 최근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주체로 진행되는 ‘동북공정’ 사업을 순수한 학술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철저한 패권주의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낯빛’을 바꿔서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동북공정’으로 표면화된 고구려사 관련 ‘역사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중간 ‘역사전쟁’이 본격화된 느낌이다. 중국 정부의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과 동북3성 정부가 추진하는 ‘동북공정’ 사업 중의 하나인 고구려사의 중국사로의 편입 문제가 최근 양국간 가장 민감한 정치외교적 현안으로 번지고 있다. 지난 4월20일 중국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한국 고대사를 소개하는 부분에 고구려와 관련된 문장을 삭제한 데 대해 한국 정부가 시정을 요구하면서 양국간 고구려사 관련 논쟁은 ‘학술적’ 차원을 떠나 정부 차원의 외교적 문제로 확대됐다.
대중적 잡지에도 고구려사 왜곡
하지만 한국 정부가 중국 외교부의 홈페이지 사태를 계기로 부랴부랴 ‘뒤늦은’ 범정부 차원의 고구려사 대책에 나선 것과는 달리, 중국 정부는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관망하는 자세다. 이것은 한국 정부의 시정 요구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지난 8월5일 한국 고대사와 관련한 외교부 홈페이지를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대신 1948년 8월15일 한국정부 수립 전의 한국사를 전면 삭제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마지못해 ‘응수’를 하기는 했지만 중국 정부의 입장은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또 이 문제로 베이징을 급히 방문한 박준우 외교통산부 아시아태평양 국장이 중국 지방정부와 일부 대학교재 등 출판물에 의한 고구려사 관련 왜곡 시정을 요구하자, 중국쪽이 “중국은 큰 나라이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각지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일일이 통제할 수 없으며, 지방정부나 개인적으로 이뤄지는 출판물을 통제하기 어렵다”며 한국쪽 요구를 사실상 ‘묵살’한 데서도 중국 정부가 당분간 동북공정을 중단할 뜻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은 정부 정책과는 상관이 없는 순수 학술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던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외교부 홈페이지 수정 등 사실상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돌아선 계기는 지난 6월28일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관련 문화재가 공동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부터다. 지난해 ‘고구려는 중국 고대 지방 소수민족의 하나다’라는 요지로 중국 언론에서는 최초로 에 고구려 관련 글이 실린 이후 한국 국민들 사이에 반중 정서가 격화되자 중국 정부는 급히 ‘언론 통제’에 나섰다. 그러다 쑤저우 대회를 전후해 등 관영 언론매체에 공개적으로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입장을 설파하고 있다. 이런 공개적 주장은 관영매체뿐만 아니라 과 중국판 지오그래픽인 등 대중적 잡지에도 여과 없이 실렸다. 지난 7월20일 이후 다시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지린성 일대의 고구려 문화유산 여행객들에게도 버젓이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6월4일자로 갱신된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동북공정 관련 조직표에도 정부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 주도의 국책사업이라는 점을 대놓고 밝히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우려할 만한’ 사태가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정부 차원의 정면 대응보다는, 중국쪽의 ‘학술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주장을 믿고 싶어하던 한국 정부에게는 더없는 재앙을 예고한다. 이 문제가 전면화되면 한참 ‘잘나가던’ 두 나라간에 한판 ‘전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국제 문제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의지
조선족 학자는 “동북공정의 추진은 향후 한-중 관계에서 한없이 우려되는 일이지만 중국은 결코 이 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장기적인 국익 문제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반대하고 항의하면 중국이 적당히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순진한 발상”이라며 “그럼에도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아주 집요하고도 강하게 맞서야 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고구려사를 되찾을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즉, 중국 체제의 특성과 사업 추진 성격상 한국 정부에서 아무리 강한 어조로 항의를 한다고 해도 중국 정부는 절대로 ‘끄떡’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북한의 항의 강도에 따라서 ‘왜곡 수위’가 조절될 수는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도대체 중국 정부는 왜 지금 30년 전의 평화로운 ‘낯빛’을 바꿔서 갑자기(?) 다른 나라 사람을 모욕하고 역사를 침탈하려 하는 걸까.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세계경제정치연구소 부소장인 왕이저우(王逸舟)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향후 10년 동안 중국 외교가 한바탕 조용한 변화 혹은 조용한 혁명을 겪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즉, 내부의 발전 문제와 목표에 치중했던 과거의 내부지향형 외교에서 안과 밖을 둘 다 돌보는 방향으로 변할 것이며, 이런 변화는 중국의 ‘도광양회’(빛을 감춰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힘을 기름)와 ‘화평굴기’(평화적으로 일어섬) 정책의 중요한 과정이다. 중국은 과거 20년 이상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주로 내부지향적 목표설계를 했고, 국제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부족했다. 즉, 도광양회는 잘했으나 ‘유소작위’(대외관계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것은 현재 중국의 힘과 갈수록 증가하는 중국의 국제영향력과 비교하면 잘 맞지 않는다.”
과거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덩샤오핑이 제기했던 중국 외교정책의 근간인 ‘도광양회·유소작위’에 ‘조용한 혁명’이 시작됐다는 얘기다. 왕이저우 교수뿐 아니라 중국 내외의 대다수 중국 외교정책 연구가들은 제4세대 지도자 그룹인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가 들어선 뒤 중국 외교정책의 무게중심이 도광양회에서 유소작위로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최근 중국 정부가 자주 언급하는 21세기 중국의 신외교전략인 화평굴기 정책은 주로 내부 문제에 치중하면서 외부 문제에는 되도록 신경을 끄려고 했던 도광양회 자세보다 더 능동적이고 주동적으로 국제 문제에 개입한다는 유소작위에 중점을 두면서 평화적으로 중화민족의 부흥을 이루겠다는 대외용 구호이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조용한 혁명’의 배경에는 지난 10년 이상 ‘빛을 감춰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힘을 기른’ 중국의 급부상한 정치·경제적 힘이 도사리고 있다. 힘을 기른 이상 모든 국제 문제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것이며, ‘대국’에 걸맞은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동북공정으로 드러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도 바로 이러한 중국의 ‘대국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이 흡수통일하면 압록강에 미군 주둔?
중국 국제 문제 연구가인 리한추(李寒秋)가 지난해 발표한 ‘한반도 지역정치 정세와 외교전략틀 종합분석’이라는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중국은 자국의 국가이익에 심대한 불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는 한반도 통일(특히 남한에 의한 통일)과 그에 준하는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지만 ‘만일’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예상하는 ‘최악’의 경우는 남한에 의한 통일과 이로 인한 한반도에서의 미군 주둔 지속이다. 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는 압록강변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은 중국에게 심각한 도전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붕괴나 북한에 대한 중국의 통제력 상실도 중국에게는 흡수통일 못지않은 위험한 상황이고, 이 모든 ‘위기’는 결국 대만과의 통일사업에도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티베트, 신장 등과 함께 중국 정부의 가장 약한 고리로 평가받는 동북 지방이 한반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심각한 동요를 일으킨다면 중국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측한다. 따라서 리한추의 표현을 빌리면 “중국의 전략적인 변경지역에서, 중국은 결코 도광양회 정책을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먼저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구려사 왜곡은 중국의 이같은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기선제압식 도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국가이익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모욕하고 이웃의 역사를 침탈하는 패권적 이익이라고 한다면, 중국은 30년 전 UN에서 ‘반패권주의’를 맹세했던 죽은 덩샤오핑에게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순진한’ 국제정치학 박사연구생처럼 이번에도 역시 “한국인들은 왜 학술적인 문제를 민족주의 감정으로 흥분해서 난리냐”고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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