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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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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단단히 토라졌다

등록 2004-08-13 00:00 수정 2020-05-03 04:23

탈북자 기획 입국 등으로 남북관계 경색… 북의 노무현 정권 불신 회복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정부가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10주기 조문 방북 불허와 탈북자 대규모 기획 입국의 여파로 남북 관계가 조만간 쉽게 풀릴 기미가 안 보여서다. 8월 초로 예정된 남북 장관급 회담이 무작정 표류됐고, 해운실무회담과 일부 민간 교류도 중단됐다. 남북 군사 분야 신뢰 구축 작업도 뚝 멈춘 상태다. 북한 군부는 7월14일 북한 경비정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을 저지하기 위한 경고용 함포 사격을 빌미 삼아 장성급 군사실무 대표회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8월15일까지 끝내기로 했던 비무장지대 선전물 철거작업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북한이 단단히 토라진 셈이다.

정부 “소강 국면 장기화되지 않을 것”

특히 정부가 직접 나서서 450여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을 기획 입국시킨 조치는 북한 당국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요즈음 실리우선주의 방침에 따라 웬만하면 ‘대화 중단’이라는 강수를 빼들지 않았던 북한이다. 그만큼 탈북자 문제는 북한 지도부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든 것으로 봐야한다. 사실상 대규모 기획 탈북을 부추기는 내용이 담긴 북한인권 법안이 미국 하원을 만장일치로 막 통과한 뒤라 북한 당국이 느끼는 당혹감은 더 컸을 법하다.

북한의 불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는 범민련과 한총련 등 국가보안법상 이른바 ‘이적단체’로 규정된 구성원들의 8·15 남북 공동행사 참가를 불허한다고 밝혔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8월6일 정례 브리핑에서 이 문제는 “3대 축(종단, 민화협, 통일연대)간에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범민련과 한총련이 북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통일연대쪽은 지난 7월31일 상임대표자회의를 통해 범민련과 한총련의 참가를 고집하고 있어 8·15 공동행사의 성사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정부는 이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국면에서도 비교적 낙관론을 견지하고 있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조문 문제나 탈북자 문제 등 체제와 직접 연관된 사안들이 지금 중첩해서 발생됐다는 점에서 남북 대화를 비롯해서 일부 남북간의 합의사항 이행을 잠정적으로 유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하지만 남북 관계의 소강 국면은 장기화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는 근거로 경협이라든지 또 일부 민간 교류가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북 관계의 한쪽 문은 지금 계속 열려 있는 상태고, 남북 관계는 이제 불가역적인 상황 속으로 발전이 이뤄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소강 국면, 즉 남북 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대남 정책 전반을 재검토

실제 북한은 당국간 회담은 응하지 않고 있지만 차관으로 지원하는 식량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고, 청산결제나 개성공단 등 남북경협 사업에서도 별다른 동요는 안 보이고 있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의 몇몇 도시에서 남북한 기업인간의 경협 협의도 진행되고 있고, 8월 말 베이징에서 열리는 남북한-중국간 국제학술회의에의 참가 의사도 최근 밝혀왔다. 북한이 과거와 다른 신중한 행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는 이런 움직임에 낙관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최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불신은 회복하기가 힘들 정도로 심각하다고 귀띔한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남북 대화가 재개되더라도 뿌리 깊은 불신까지 해소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벌여놓은 것은 많은데, 제대로 되고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더라. 이는 남쪽 정부의 소극적 자세와 무능력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북한은 앞으로 갈 길은 먼데, 남은 임기 동안 노무현 정부와 뭘 함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이 대규모 탈북자 입국 등에 크게 자극받은 것은 사실이나, 단지 이 때문에 남한 정부와의 대화를 잠시 접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대남 정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는 국면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물론 그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현 단계에서는 오는 9월의 4차 6자회담 개최와 11월의 미국 대선 등 굵직굵직한 행사들을 앞두고 있는 터라 남북 관계를 최소한 현상 유지 선에서 끌고 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 체제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미 관계의 변동 여부가 대남 정책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대남 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거나, 그렇다고 남북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할 것 같지는 않다. 또 북한이 속도를 낸다고, 남한이 맞장구를 쳐서 따라오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북한도 알 만큼 안다. 핵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는 남한 정부의 한계를 꿰뚫어 보고 있어서다. 여기에다 조문 불허 결정에서 보듯이 국내 보수층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노 정부의 조심스러운 행보는 북한 지도부를 더 지치게 만들고 있다고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은 말한다.

남쪽 내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 대북 정책이 국내 정치나 대미 외교의 볼모로 잡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정부가 국내외 보수층의 눈치를 과도하게 살피면서 대북 정책의 자율성을 좁히는 악수를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 정부는 대북 정책과 관련해 마치 결백증를 지닌 환자와 비슷해 보인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말한다. 남북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핵 문제는 조기에 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어린애도 다 아는 사실인데, 이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니 너무 소심한 대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부에게 지금은 ‘시간이 약’일 뿐

한 전직 정부 관계자가 내뱉는 쓴소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 정부는 비공식 막후 대화 채널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일본은 지금 일본인 납북자 해결뿐 아니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비정부 라인도 풀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대북 채널은 다양할수록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나 막힌 관계를 푸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게 일본 정부의 태도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사람을 너무 가리는 게 큰 문제다.”

북한은 조문 파동, 대규모 탈북자 기획 입국 등을 자신들의 체제를 모독하는 행위로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 내 어느 누구도 총대를 메고 “그냥 대충 넘어갑시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만이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다는 게 정부 관료나 전문가들의 한목소리다.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느냐, 아니면 좀더 냉각기를 갖느냐는 전적으로 그의 손에 달린 셈이다. 이봉조 차관은 “북한의 현실은 회담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금 현재 벌어지는 현실적 과제들, 문제들이 그들의 명분이나 입장에서 보면 회담을 선뜻 예정대로 하기는 힘든 상황이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그 현실과 명분을 맞추어나가는 데 북한으로서는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고 내다봤다.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정부 차원에서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고 조기에 회담장으로 불러낼 수 있는 뾰족한 대안도 없어 보인다. 보수층이나 여론의 역풍을 우려하는 정부에게 지금은 그저 ‘시간이 약’일 뿐이다. 정부는 남북간 대화가 매우 중요하나 지금 대화가 안 열려서 남북 관계가 안 되는 상황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현상 유지적 대북 정책 방향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한여름의 찜통더위만큼이나 남북 관계도 답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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