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잠들지 말라, 그들이 온다

등록 2004-08-12 00:00 수정 2020-05-03 04:23

각본 없는 드라마의 진수를 만끽하게 해줄 경기에 관심…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이라크 선수단 출전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스포츠만큼 생생한 감동을 주는 드라마도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 부르겠는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은 월드컵축구대회와 함께 각본 없는 드라마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가장 빠른 사나이는 누구일까

아테네올림픽(8월13~29일)에는 모두 28개 종목에 3901개의 메달이 걸려 있다. 이번 아테네올림픽도 전세계 스포츠팬들을 흥분시킬 ‘빅매치’가 준비돼 있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경기는 8월23일(한국시각) 오전 5시에 열리는 남자 육상 100m 결승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를 뽑는 이날 경기에는 올림픽 2연패에 나서는 ‘인간 탄환’ 모리스 그린(미국·9초79)과 자메이카의 ‘신예’ 아사파 포웰(21)의 맞대결이 예상된다. 포웰은 최근 그린과의 두 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이겨 기염을 토했다. 포웰은 지난 8월7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벨트클라세 골든리그육상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9초93을 기록해, 그린(9초94)을 100분의 1초 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포웰은 지난 7월31일 런던에서 열린 국제육상연맹(IAAF) 슈퍼그랑프리대회에서도 시즌 2위 기록인 9초91로 그린(9초97)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포웰과 그린은 벌써부터 장외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그린은 7일 경기가 끝난 뒤 “아테네에서는 분명히 다른 레이스를 펼칠 것”이라며 “100m와 400m 계주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낸다는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포웰도 지지 않았다. 포웰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그린과 대결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잘해냈다. 이번처럼만 한다면 올림픽 금메달도 딸 수 있을 것”이라며 금메달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8월17일 새벽에 열리는 ‘인간 어뢰’ 이안 소프(21·호주)와 ‘수영 신동’ 마이클 펠프스(19·미국)의 대결도 최고의 흥행카드 중 하나다. 펠프스는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당시 만 15살의 나이로 출전해 관심을 받았으나 접영 200m에서 5위에 그쳤다. 하지만 4년이 흐른 지금 펠프스는 187cm, 79kg의 당당한 체격으로 3개의 세계기록을 갖고 있는 거목으로 성장했다. 펠프스는 이번에 마크 스피츠(미국)의 7관왕 기록(1972년 뮌헨올림픽)을 뛰어넘겠다고 나섰다. 출사표를 던진 종목은 자유형 200m, 접영 100·200m, 개인혼영 200·400m, 계영 3종목 등 8개. 사상 초유의 수영 8관왕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한국 축구, 그리스와 첫 경기

이에 대해 소프는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독일에서 마무리 훈련을 하고 있는 소프는 펠프스에게 집중된 최근의 언론 보도를 의식한 듯 “빠른 수영선수로 펠프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꼬았다. 소프는 얼마 전에도 “그 누구도 마크 스피츠의 7관왕 기록에 필적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해 아테네 7관왕을 호언한 펠프스를 자극했다. 17살 때인 4년 전 소프는 시드니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를 목에 걸며 호주를 대표하는 스포츠맨으로 떠올랐다. 소프는 이번 대회에서 자유형 100·200·400m와 계영 3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내 6관왕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소프는 자유형 200m 세계기록(1분44초06) 보유자지만 올 시즌 최고기록은 1분45초07로 펠프스(1분45초99)를 약간 앞선다. 따라서 당일 몸 상태에 따라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25일 새벽 3시에 열리는 여자 장대 높이뛰기 결승은 특히 남성 팬들의 관심을 끈다. 치열한 메달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스테이시 드래길라(33·미국)와 옐레나 이신바예바(22·러시아), 스베틀라나 페오바노바(24·〃)가 ‘세계 장대 미녀 3인방’으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페오바노바가 세계기록(4m88) 보유자였지만, 지난 7월26일 이신바예바가 영국 버밍엄 알렉산더스타디움에서 열린 노리치유니온국제육상대회에서 4m89를 뛰어넘어 세계기록을 깼다. 이런 추세로 볼 때 이번 대회에서는 4m90의 벽을 뛰어넘어 ‘마의 5m 벽’도 넘볼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한국 선수들의 경기 중 단연 관심을 끄는 것은 축구다. 8월12일 새벽 2시30분에 열리는 그리스와의 예선 첫 경기는 특히 관심을 끈다. 그리스는 유로 2004 우승의 여세를 몰아 이번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겠다고 벼르고 있다. 유로 2004에서 교체 멤버로 활약한 공격수 디미트리오스 파파도풀로스(23·파나시나이코스)를 와일드카드로 선발해 우승 고지를 넘보고 있다. 한국은 이에 맞서 이천수, 조재진, 최성국 등 차세대 ‘태극전사’들을 앞세워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재현하겠다는 각오다. 한국은 지난 시드니올림픽에서 2승1패를 기록하고도 8강 진출에 실패했다. 김호곤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지난해 1월 이후 올림픽대표팀이 거둔 성적은 18승5무5패. 최근 11경기에서 무패 행진(8승3무)의 호조다. 그러나 홈 관중의 일방적 응원과 개최국의 텃세 등으로 그리스와의 예선 첫 경기는 고전이 예상된다.

이봉주와 계순희의 도전

올림픽 폐막 직전인 8월30일 자정에 열리는 남자 마라톤도 우리에겐 빼놓을 수 없는 빅매치다. 이 경기에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4·2시간7분20초)가 출전한다. 참가 선수 중에는 2시간 5∼6분대의 선수들이 즐비하지만, 섭씨 35도의 무더위와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지는 ‘죽음의 코스’에서 기록은 별반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봉주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다. 세계기록(2시간4분55초) 보유자인 폴 터갓(케냐)도 2001년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한 이봉주를 최고의 라이벌로 꼽았다. 최근 <ap>이 우승후보로 지목한 역대 2위 기록 보유자 새미 코릴(케냐·2시간4분56초)도 유력한 도전자다.
75명의 선수단을 파견하는 북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마라톤·유도·역도·레슬링·권투·다이빙·체조·탁구·사격 등 9개 종목에 출전하는 북한 선수단은 금메달 4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시드니올림픽에서 ‘노 골드’의 수모를 당했다. 북한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와 동메달 5개를 따내며 16위에 올랐으나, 1996년 애틀랜타에선 33위(금2·은1·동2), 2000년 시드니에선 60위(은1·동3)로 하향 곡선을 그렸다.
북한의 간판스타는 단연 계순희(23·여자 유도)다. 지난해 평양시 인민회의 대의원에 뽑히기도 한 계순희는 체급을 조금씩 올리며 세 차례 연속 올림픽에 출전한다. 애틀랜타올림픽 때 48kg급에서 일본의 유도 영웅 다무라 료코를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건 뒤, 시드니에선 52kg급에서 동메달을 땄고 아테네에선 57kg급에 도전한다. 계순희는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 체급 우승을 차지했다. 여자 역도 58kg급의 리성희와 여자 마라톤의 함봉실도 강력한 금메달 후보다.


히크마트의 땀을 기억하라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번 대회 최고의 ‘스타’는 전쟁의 상처를 딛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이라크 선수단이다. 이라크는 전시 중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 40여명의 선수들을 파견한다. 이라크는 지난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딴 동메달이 유일한 메달이다. 평화의 메신저는 여자 선수로 유일하게 올림픽에 출전하는 육상 단거리 알라 히크마트(19)다. 그는 바그다드대에 재학 중인 ‘순수 아마추어’다. 100m, 200m에 출전하는 그는 120달러 정도 나가는 육상화를 살 여유가 없어서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먼지가 풀풀 나는 훈련장에서 올림픽을 준비해왔다. 이라크 대표 선수들에게는 한달에 60달러가 조금 넘는 보조금이 지원될 뿐 장비는 전혀 지원되지 않는다. 알라의 100m 최고기록은 12초05. 10초대인 세계 수준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는 올림픽 출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흘린 땀이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이라크 민중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ap>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