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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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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공부’ 하고 계십니까?

등록 2004-08-11 00:00 수정 2020-05-02 04:23

‘딸사랑 아버지 모임’이 말하는 아이 키우기… “모든 딸아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양립할 수 있도록"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딸사모는 2차가 없어요. 가정이 더 소중하니까요.”

올해로 창립 4년째를 맞는 ‘딸사모’(딸사랑 아버지 모임). 한달에 한번씩 육아와 가사 등을 주제로 강의를 듣는데, 뒤풀이를 하더라도 밤 9시를 넘기지는 않는다. 남녀가 평등하고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세상을 꿈꾸는 아버지들이, 오랜만에 모여 반갑다고 해서 가정의 평화를 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딱히 행동규칙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회원들 사이에 불문율로 통하는 원칙들이 있다.

‘밤생활’ 버리고 가사 분담

가사 분담도 그 중 하나다. 군림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아내에게 지워졌던 무거운 짐들을 나눠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만 둘인데도 2001년 딸사모에 가입해 현재 총무를 맡고 있는 회사원 천성관(39)씨는 생활이, 특히 ‘밤생활’이 확 바뀌었다. 전에는 “시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젠 1주일에 적어도 3일 이상은 ‘칼퇴근’을 해서 아이들을 돌본다. 아내가 공부를 시작해서 돌볼 사람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 됐다고는 하지만, 그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았더라면 아내의 공부 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아빠가 되고 보니 ‘아버지 공부’가 덜 됐다는 생각이 들어 딸사모에 가입했는데, 그 뒤 한 강연에서 ‘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고 하더군요.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동안 바깥 일을 열심히 한다는 핑계로 집에서는 편히 얹혀 지냈다는 생각이 들어 할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천씨는 아이들 목욕과 집안 청소를 전담하면서 조금씩 가정 안에서 역할을 늘려갔고, 이제는 주말과 휴일 아침엔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준비한다. 아들을 잘 키우지 않고서는 딸들이 힘들어지겠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아들들에게도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더 이상 어색하게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천씨가 보통 남편들의 평균치 이상임에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회원들 가운데 그보다 ‘공력’이 뛰어난 아빠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이가 의 저자 오성근(39)씨다. 아내 출산을 계기로 전업주부로 변신한 오씨는 딸사모 인터넷 홈페이지(www.daughterlove.org) ‘아빠가 사는 법’ 코너에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면서 겪은 잔잔한 이야기들을 연재해 다른 회원들을 ‘채찍질’한다. ‘여보, 빨래 좀 걷어놔’라는 제목의 글에는 그가 다른 여성 주부들과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대화 한 토막이 소개돼 있다.

빨래 걷어놓으라니까 걷어서 한 귀퉁이에 처박아둔 남편, 개놓으라니까 개서 방치하는 남편을 향해 한 주부가 이렇게 비난했다. “남자들한테 집안일을 시킬 때는 조목조목 시켜야지. 그 인간들은 일을 하나 시키면 꼭 그 일밖에 할 줄 모른다니까! 도대체가 창의력이나 융통성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찾아볼 수가 없어.” 그에 대한 주부 오씨의 답은 간결했다. “남자들이 집안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죠!” 예전 어느 술광고에서 배우 송강호씨가 “청소기 돌려” 하면 소파에 누워 청소기를 잡고 돌리고 “빨래 좀 개주라”면 개한테 빨래를 던지다가 술 사오라니까 벌떡 일어서는 모습은, 과장이 많기는 하지만 이 시대 아빠들의 자화상을 일정 부분 반영한 것이다. 천씨는 딸사모 회원들 중에도 “나는 세탁기 돌려‘주고’ 설거지해‘주고’ 집안일도 많이 ‘도와준다’”고 말하다가 면박을 당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딸과의 드라이브엔 ‘대화’가 있다

학원을 운영하는 하종수(42)씨는 딸사모 활동 이후 딸 혜린(14)이와 대화하는 법을 익혔다. 급한 마음에 윽박지르고 특히 성적 얘기가 나오면 “그것밖에 못하느냐”고 면박을 주곤 했지만, 이제는 정기적으로 딸과 둘이서 드라이브를 즐길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사이 혜린이가 성장한 것도 있지만 저도 활동을 하면서 많이 자랐죠. 오늘 외출한다니까 딸이 코디를 해주더라고요.”

그는 자신이 변하면서 집안 분위기가 밝아졌을 정도로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엔 일본 음악에 푹 빠져 있는 아이에게 “‘쪽발이’ 것이 뭐가 좋다고” 하면서 마뜩찮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일본 록그룹 이름을 줄줄 댈 정도가 됐다. 예전엔 “하라”와 “하지 마라”는 명령이 의사전달의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귀를 열어 아이의 말을 듣고 실질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혜린이를 “잘 알게 됐다”고 한다.

“저와 딸이 종종 드라이브를 즐겨요. 혜린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는 먼저 청하기도 하고요. 집이 김포공항 근처인데 여의도나 월드컵공원까지 갔다오는 동안 음악을 듣기도 하고 서로 고민거리를 털어놓기도 하죠. 딸이 사춘기를 겪고 있는데, 다른 부모들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비결은 대화였다. 아버지가 위에 있고 아이들이 아래에 있으면, 아버지가 대화라고 우겨도 아이들에겐 지시와 잔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씨는 딸과는 드라이브를, 아들 준호(11)와는 살을 대고 목욕하면서 대화를 한다. 그 밖에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얼굴을 맞대고 밥을 함께 먹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산다. 대화가 없으면 부부관계든 부모와 자식 사이든 황폐해진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한때 아버지는 큼지막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동네 어귀의 은행나무처럼 그 존재만으로도 듬직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더 이상 아이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라지 않는다. 마주 보고 소통을 원하며 따뜻한 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딸사모 아버지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래서 딸사모 홈페이지는 아이들과의 소통에 장애가 생긴 아빠들의 해결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의 조언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선배’ 아빠들의 생생한 얘기는 그 이상의 힘이 될 때도 있다.

그렇다고 딸사모가 내 딸, 내 아들만을 잘 키우자는 모임은 아니다. 창립선언문은 “우리의 딸과 아들에게 여자와 남자 모두가 가정에 대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고, 가정경제와 자아실현을 위해 남녀가 함께 직장과 가정생활을 양립하기 위해 책임이 있음을 가르칠 것”이며 “딸들이 차별받는 세상을 유지시키는 사회구조와 악습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제도개선 활동 또한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버지들만의 월례 포럼을 정기적으로 진행하면서 해마다 소풍과 ‘아버지 페스티벌’ 등 가족모임을 진행하는 딸사모가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대표적인 쟁점이 호주제 폐지다. 아들이나 딸이나 모두 유전자를 나누고 생명을 이어가는데, “대를 잇는다”는 허위의식 때문에 한해에 3만여명의 여아들이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서다.

호주제를 진심으로 반대하는 이유

이 밖에도 회원들 사이의 또 다른 불문율은 ‘밤문화’에 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아내와 딸을 바라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접대문화와 딸사모 아빠로서의 삶의 원칙이 종종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업무상 피할 수 없는 자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회원들도 있지만, 돈을 주고 성을 사는 짓이 스스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호주제 폐지와 함께 매매춘과 성폭력 근절 등을 위해서도 딸사모 차원에서 노력할 겁니다.” 천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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