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논쟁’ 확장하는 청와대와 여권, 쾌재 부르며 유신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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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적어도 오는 8월15일까지는 현재의 정체성 논쟁 국면이 지속될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왜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로 국가 정체성에 대한 전면전을 도발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헛다리를 짚은 게 분명하다. 우리는 정체성 논쟁을 피할 이유가 없다.”(청와대 핵심 관계자)
“결코 불리할 게 없는 주제다. 정체성 논쟁이 무르익을수록 이미지 정치에 가려 있던 박근혜 대표의 정체성만 더 명확해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미 그렇게 가고 있다. 아직 싸움을 중단할 생각이 없다.”(청와대 출신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
노, 시간이 갈수록 전의를 불태운다
지난 7월21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전면전 선포” 발언으로 촉발된 ‘국가 정체성 논쟁’의 앞날에 대해 청와대와 여권 핵심 인사들은 한결같이 이런 낙관론을 피력했다. 민생과 경제난을 뒤로 한 채 소모적 정체성 논쟁을 벌인다는 비판 여론이 존재하고, 박근혜 대표조차 29일부터 ‘정체성 논쟁=경제·민생 살리기’라는 논리로 발을 빼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여권은 당분간 싸움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체성 논쟁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이다. 박 대표와 한나라당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민주화 기여 판정, 서해 북방한계선(NLL) 북한 함정 교신 보고 누락 파문, 송두율 교수 석방 및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 등 최근 일련의 사건을 근거로 노무현 정부의 정체성에 대한 공세를 거듭했지만, 노 대통령은 닷새 동안이나 침묵했다. 그러나 7월26일 윤태영 제1부속실장을 통해 “이철, 유인태씨 같은 사람들이 유신에 항거해 감옥살이 할 때 판사 한번 해보려고 유신헌법으로 고시 공부한 것이 부끄럽다”며 유신정권을 겨냥한 이후 발언 수위를 점점 높여가고 있다. 노 대통령의 최근 모습에서는 사실상 죽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전면적인 사상전을 불사하는 듯한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진다.
7월26일 “대한민국 헌법에 담긴 사상이 내 사상이라 (정체정을 밝히라는 요구에) 달리 대답할 것이 없다”는 다소 방어적 해명을 내놓았던 노 대통령은 사흘 뒤 “지금의 정치 전선은 과거 유신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미래로 갈 것이냐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7월29일, 광주·전남지역 현실발전 5개년 토론회)고 말했다. 정체성 논쟁의 본질을 ‘유신 상속 세력 대 반유신 민주화 세력’의 대결 구도로 명백히 규정한 것이다.
7월30일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한 발짝 더 나갔다.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의문사위를 공격하는 측면도 있다. 민주화운동이든 아니든 공권력의 불법 부당한 행사로 인해 발생한 인권과 국민의 침해 행위를 조사해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며 박 대표와 한나라당이 정체성 공격의 핵심 고리로 설정한 비전향 장기수 민주화 기여 판정 시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노 대통령은 오히려 “반민특위 해체 이래로 잘못된 역사의 규명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다.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박 대표를 향해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조차 뜻밖으로 받아들인 이날 발언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군 장교 복무 행적 때문에 박 대표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온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을 비롯해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한 정면 돌파 의지를 내보인 것으로 정체성 논쟁에 대한 전선 확대 의미가 담겼다.
노 대통령은 왜 대결의 정치만 부추긴다는 비판을 감수하며 26년 전에 사망한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일까.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관계자들은 그 이유를 크게 3가지 정도로 정리한다.
헌법 수호 의지 의심하자 격분
첫째, 박 대표와 한나라당이 실체 없는 정체성 논쟁을 통해 참여정부의 정당성과 노 대통령이 지향하는 정치적 가치와 철학에 근본적인 훼손을 감행하는 데 대한 분노가 폭발한 측면이 강해 보인다.
노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는 참을 만큼 많이 참았다”며 “치밀한 전략적 분석에 따른 대응이라기보다, 대통령 자신의 철학과 역사관에 대한 훼손을 묵과할 수 없다는 차원의 대응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다른 핵심 인사도 “박 대표가 일련의 사건을 근거로 대통령에 대해 이념적 색깔을 덧칠하는 얄팍한 색깔론을 썼다”며 “국민들은 소모적 논쟁이라고 비판하고 싫어하지만,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려는 의도가 담긴 공격에서 밀리면 끝이라고 판단하고 전면 대응에 나선 것”이라고 결연한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실제 박 대표와 한나라당이 7월21일 이후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거듭하자 대응 방식과 수위를 놓고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의 한 관계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지만 전혀 대통령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기구이고, 송두율 교수 석방 문제 역시 사법부인 서울 고등법원의 판결에 따른 것인데 대통령의 정체성과 연결하고, 실체를 밝히라고 생떼를 쓰면서 국민들을 현혹하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껴왔다”며 “‘헌법이 내 정체성’이라는 7월26일 답변은 그런 고민을 집약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전면전을 벌일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표가 “노 대통령이 핵심을 비켜가고 변명과 궤변만 한다”며 헌법 수호 의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자 청와대는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은 박 대표의 이런 요구를 대통령 개인의 의도에 따라 독립기관을 재단하고, 민주주의 기초인 ‘삼권분립 원칙’마저 침해하며 법원 판결에까지 개입하라는 심각한 요구로 받아들였고, 그 뿌리는 대통령의 철권 통치와 전횡으로 정권을 유지했던 유신독재를 정당한 국가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런 판단에 따라 노 대통령은 29일 ‘유신 회귀냐 미래냐’는 말로 전선을 가르면서 정체성 논쟁의 전면에 뛰어들었다. 노 대통령은 30일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 과정에서 “대통령상에 대한 인식이 아직 바뀌지 않은 점이 많다”며 “과거 대통령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시대가 아닌데, 대통령 권력에 대한 인식이 유신 시대와 5공 시대 때처럼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둘째, 노 대통령의 ‘유신 타격’은 난제가 돌출할 때마다 정치적 논쟁으로 개념화해 선과 악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 뒤, 국민에게 양자택일하도록 요구하는 이른바 ‘전선의 정치학’을 구체화했다는 분석이다.
노 대통령 직계로 분류되는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은 정책 논쟁으로 풀어야 할 문제조차 정치 논쟁으로 단순화하는 습성 때문에 ‘대결의 정치’를 강요한다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대통령이 나서야만 국민이 관심을 갖고, 지지자들도 긴장하고 결속한다”고 말했다. 일종의 ‘판 키우기 전술’을 통해 지지층 결속 의미도 녹아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핵심 인사도 “열린우리당 안에서 박근혜 대표와 맞장 뜰 만큼 센 사람이 있다면 대통령이 뒷전에 물러설 수 있겠지만, 박 대표가 겨냥한 것은 노 대통령이었다”며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고 말했다.
갈라진 여당 의원들 모처럼 한목소리
박 대표는 처음부터 노 대통령을 겨냥한 실체 없는 ‘사상전’을 벌였고, 노 대통령은 ‘유신 세력 대 반유신 세력’의 대결 구도로 전선을 단순화·개념화해 정체성 논쟁의 본질을 드러낸 뒤, 어정쩡한 다수 국민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정치 전술을 선보이며 지지세력 결집에 나섰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올해 초 탄핵 국면을 자초해 결과적으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을 이끌었고, 끝간 곳 없이 지속되던 행정수도 이전 논란에 대해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운동, 퇴진 운동으로 느낀다”며 선택을 강요하는 ‘전선의 정치’를 통해 논란을 일정 부분 잠재운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이번 ‘유신 대 반유신’ 논쟁을 통해 김혁규 의원의 총리 기용- 분양원가 공개 논란- 과 이라크 추가 파병 논쟁 등으로 분란을 거듭하던 열린우리당 의원을 단일 대오로 묶어세우는 데 성공했다.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유신정권 때리기가 시작되자 파병 반대 목소리를 냈던 유기홍 의원 등 소장파들이 “박근혜 대표에게서 유신과 독재의 흔적이 발견된다”며 엄호에 나서는 등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면, 신기남 당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민생 행보를 벌이며 논쟁에서 한 발짝 물러선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내용보다는 전략전술과 홍보의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열린우리당이 이제야 청와대와 제대로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민주노동당도 박근혜 대표를 향해 “소모적 이념 논쟁을 중단하라”며 국회 안에 유신과 군부독재 잔재 청산을 위한 ‘군사독재청산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는 등 정체성 논쟁에서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손을 들어주는 등 전선이 명확해지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셋째. 야당의 유력한 대권주자인 박근혜 대표에 대한 여권의 장기적 대응 전략 측면도 강하다. 이른바 ‘죽은 박정희를 통해 산 박근혜 죽이기’ 전술로 ‘반유신’ 화두를 부여잡은 것이다.
노 대통령의 한 측근 인사는 “박근혜 대표는 모친인 육영수씨 사망 뒤부터 사실상 유신정권의 퍼스트레이디였고, 그의 정치적 성장 밑바탕은 유신독재의 개발지상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보수 기득권층과 영호남의 지역주의 등이 자리잡고 있다”며 “우리는 유신의 망령이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아직 이 땅에 존재하는 유신 잔재의 실체이자, 잔존 세력이 정권 획득을 노리는 핵심 아이콘이라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정체성 논쟁 속에서 파생된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신 시대인 197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긴급조치 세대’ 의원들을 중심으로 유신체제 평가토론회 개최 등 조직적인 대응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런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열린우리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박 대표가 도발한 정체성 논쟁 덕분에 한나라당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새로운 리더십의 표상으로 인식됐던 박근혜 대표의 정체성을 빨리 깨뜨릴 수 있는 계기를 잡았다”고 말했다. 다른 한 의원은 “박 대표가 대권주자라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결과 오기의 정치” 비판 여론이 변수
청와대와 여권은 한나라당 일각의 국면 전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정체성 논쟁을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인다.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행정수도 이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논란, 북한 함정과 교신보고 누락 등 일련의 사태에서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 수세에 몰렸지만, 모처럼 이기는 싸움이 시작됐다”며 “실체 없는 이념 논쟁보다 정수장학회 관련자의 추가 증언 등 구체적 팩트를 중심으로 현재 국면을 계속 이끌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체 없는 이념 공방보다는 5·16 쿠데타 세력의 사유재산 강탈 논란이 일고 있는 정수장학회 문제, 친일진상규명법 개정 등 박근혜 대표를 옭아맬 핵심 화두를 중심으로 논쟁을 전개한다는 전략을 세워놓은 것이다.
그러나 경제난은 뒷전에 두고 ‘대결과 오기의 정치’만 일삼는다는 비판 여론, 박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의 반발 등 여러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만큼 여권의 이런 전술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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