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 자문료 사건 뒤에 숨어 있는 갈등… 부동산 대책 등에 청와대 참모진과 ‘철학’ 충돌
▣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국민들이 ‘그 사람이면 되겠다’ 싶은 안정적인 인물을 물색하고 있다.” 지난 2월 초, 개각을 앞두고 한 청와대 관계자는 새 경제부총리 후보를 고르는 기준을 이렇게 설명했다. 청와대가 ‘안정’이란 기준을 제시한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참여정부의 첫 경제부총리였던 김진표 부총리도 ‘개혁’ 상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는 만큼 거시경제의 안정은 중요한 정책 목표였다. 청와대가 택한 ‘안정감 있는’ 인물은 이헌재였다. 언론들은 그를 ‘돌아온 해결사’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이 부총리 인선은 참여정부의 또 다른 정책 목표와 갈등을 일으킬 씨앗을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었다.
누가 자문료 정보를 흘렸나
그는 후임 부총리로 거론되던 무렵 한 사석에서 참여정부 1년 동안의 정책 방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가 대표적인 예로 든 것은 부동산 정책이었다. 그는 “(부동산 대책을) 과도하게 하다 보니 건설경기가 죽고 내수 침체가 길어지고 있다. 시장 위주로 경제틀을 바꿔야 하는데, 이 정부가 가려고 하는 방향은 그게 아닌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정책실이 주도한 ‘10·29 부동산 대책’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이 부총리는 청와대의 부총리직 제의를 별 조건 없이 수락했다.
이 부총리 취임 이후 5개월이 흘렀다. 그간 이 부총리와 청와대 참모진 사이에는 경제정책을 둘러싼 시각차가 몇 차례 드러났다. 청와대 정책실쪽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한 서민생활 불안을 가라앉히고, 부의 집중을 완화해야 한다는 쪽에 강조점을 두어왔다. 이에 비해 이 부총리는 내수 회복의 지연을 걱정하며 건설경기 연착륙을 강조했다. 이는 이헌재 부총리와 경제관료들, 참여정부의 새 경제정책 참모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철학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최근 ‘이 부총리 사퇴설’로까지 확산된 ‘국민은행 자문료 파문’의 배경 그림은 이렇다.
이 부총리가 관직을 떠나 있는 동안 국민은행에서 자문료 명목으로 매달 500만원씩 모두 8천만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처음 언론에 보도된 것은 지난 7월17일이다. 자문료를 받은 사람은 이 부총리뿐 아니라 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 전윤철 감사원장, 강봉균 의원 등이었다. 이 부총리는 이에 대해 “2000년 8월 재경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2년 이상 지난 상황에서 실제 국민은행 경제경영연구소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받은 것이며, 세금도 모두 냈다”며 문제될 게 없다고 밝혔다. 야당의 비난 공세가 뒤따랐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수긍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태는 심각하게 돌아갔다. 이 부총리는 자문료 파문이 하필 그 시점에서 불거진 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일부 언론은 이 부총리의 ‘사퇴설’까지 보도했다. 누가 자문료 관련 정보를 언론에 흘린 것일까? 자문료 보도가 감사원이 카드 사태에 대한 감사결과를 발표한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금융감독원쪽이 금융감독기구 개편에 대비한 ‘엄포’용으로 흘린 것 아니냐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난 7월14일 이 부총리의 여성경영자총협회 조찬모임에서 “경제발전의 주력 세대인 386세대가 정치적 암울기를 거치면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문료’에 대한 정보를 흘린 곳이 어딘지는 앞뒤 정황을 잘 아는 이 부총리 자신이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이 부총리는 정보의 진원지에 대해 “여의도쪽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자문료를 준 국민은행이나 검사 과정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금감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총리는 진원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자문료 문제를 ‘이헌재 흔들기’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진원지를 ‘청와대’쪽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386에 정면으로 화살 날려
이 부총리는 7월19일 밤, 사퇴설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집을 찾은 기자들에게 가슴에 묻었던 말들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그는 “요즘은 진짜 시장경제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런 식으로 뒷다리를 잡아가지고 시장경제가 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사임설’을 일축했지만, 마치 재신임을 묻는 듯한 표현을 썼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할 때는 열린우리당 안의 ‘386’으로만 비판의 대상을 제한했다.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로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하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논란, ‘멀쩡한 사람을 공직에서 떠나게 하는’ 공직자 보유주식 백지신탁제도 등을 지적했다. 이 밖에도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는’ 언론관계를 비판하고, 이라크 파병을 ‘매도’하는 ‘386’들에게 정면으로 화살을 날렸다.
이 부총리의 발언은 취임 5개월간의 정책 집행이 별 성과를 내지 못한 데 대한 적절한 해명은 되기 어렵다. 경기는 회복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배드뱅크와 같은 신용불량자 대책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를 ‘발목 잡은’ 사람들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더욱이 ‘자문료’ 보도와 ‘386’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총리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많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은 ‘부동산 관련 대책’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아파트 원가 공개나 원가연동제는 단기적으로는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지만, 중장기적으로 아파트 공급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이 부총리가 시장경제와 원칙을 강조하며 원가 공개 등에 반대해온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부총리는 원가 공개 문제에 그치지 않고,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부동산 가격 안정대책 자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한 인상을 여러 차례 줬다. 이에 반해 시민단체들은 “건설경기 연착륙 방안은 10·29 대책이 추구한 목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부총리는 애초 7월22일로 예정돼 있던 정례 브리핑을 취소했다가 기자들의 요구에 밀려, 하루 늦게 브리핑을 했다. 그는 이날 그동안의 발언을 해명하며 파문 수습에 나섰다. 시장경제 회의론에 대해서는 “나는 반어법을 자주 쓴다”며 “우리 경제가 시장경제를 더 잘해야 한다는 표현이었다”고 해명했다. 386세대 비판에 대해서도 “나는 386세대를 구체적으로 지칭해 말한 적이 없으며, 30~40대가 경제의 주력이므로 그들의 역할과 한계, 책임을 언급한 것일 뿐 특정 세력이나 세대를 전제로 얘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간의 공세로부터 후퇴였다.
사태는 수습 국면이지만…
자문료 보도에서 시작된 파문은 이 부총리의 후퇴로 일단 수습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 부총리의 공격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는 ‘사고방식’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앞으로 더욱 첨예해질 갈등의 예고편에 불과할 수도 있다. 갈등의 강도는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는 이 부총리의 발언에 ‘솔직’하게 담겨 있다. 한 대학교수는 “근본적인 문제는 노 대통령이 거시경제의 안정을 책임지는 재경부와, 산업·복지정책 등을 맡기고 있는 참모진에 철학이 크게 다른 사람들을 함께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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