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풍 사건으로 드러난 문민정부 안기부의 국고횡령 혐의… 재경부와 법의 감시망 밖에서 국고수표 허위발행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지난 7월5일 내려진 이른바 ‘안풍’ 사건의 2심 판결은 정치권을 뒤흔든 ‘메가톤급’ 태풍이었다. 서울 고등법원 형사7부(재판장 노영보 부장판사)는 검찰에 의해 주범으로 지목된 강삼재(52·한나라당) 전 의원과 김기섭(65) 전 안기부 운영차장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하면서, 그 이유를 “(문제의 돈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관련된 정치자금일 개연성이 크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동안 ‘간첩 잡는 돈으로 선거를 치렀다’는 비난을 받았던 한나라당은 누명을 벗는 동시에 소속 의원들에 대한 검찰 수사를 ‘야당 탄압’으로 몰고 갈 명분이 생겼다. 반면 “재임 중 단 한푼의 비자금도 받지 않았다”던 YS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두환·노태우씨를 비자금 사건으로 처벌한 장본인이 전·노에 이어 ‘부정축재’로 처벌받는 전직 대통령이 될 운명에 처했다.
가짜서류로 타낸 수천억원, 수천개 계좌에
그러나 이번 판결로 YS 못지않게 타격을 받은 곳이 바로 국가정보원(국정원)이다. 재판부가 안풍 사건에서 드러난 안기부의 예산 집행 관행에 대해 “국가 예산의 투명하고 엄정한 집행을 위한 예산회계법 규정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위법성이 ‘몹시’ 크다”며 국고 횡령 혐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안기부의 예산 집행 행태는 뇌물 사건의 피의자들이 자금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돈세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교묘하고 치밀했다.
안기부 예산은 다른 부처와 마찬가지로 일반예산과 기획예산처에 배정된 예비비로 나뉜다. 다른 부처의 경우 일반예산은 각 부처의 예산 담당자가 그때그때 지출 요인이 생길 때마다 국고수표를 발행한 뒤 이를 한국은행에서 현금으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집행된다. 예를 들어 어떤 부처가 건물 신축 공사를 했다면, 공사업자에게 공사대금으로 국고수표를 발행해주고 한국은행에서 이를 현금으로 교환해 받아가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안기부는 이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허위로 지출 관련 서류를 작성해 한꺼번에 돈을 타간 뒤, 이를 위장업체 명의로 만든 계좌에 입금해 관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안기부는 ‘안풍’ 사건의 발생 시점인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한달에 약 150억∼200억원의 국고수표를 발행해 한국은행에서 교환한 뒤, 이를 국제홍보문화사 등 6개 위장 업체 명의로 만든 2천여개의 계좌에 넣어 관리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예비비도 똑같은 방식으로 집행됐다. 안기부는 예산회계특례법에 따라 기획예산처의 예비비를 국가안전보장 활동 명목으로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사용할 수 있다. 안기부는 ‘안풍’ 사건 기간 동안 매년 3천억원이 넘는 예비비를 분기별로 국고수표를 발행해 타낸 뒤, 이를 차명계좌에 넣어 관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거액을 수천개의 차명계좌에 나눠서 관리하는 방식은 안기부의 예산에 대한 자금 추적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했다. 안기부는 쓰고 남은 예산(불용액)에서 발생하는 이자를 원금과 따로 구분해서 보관하거나 회계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모두 차명계좌에 넣어 관리했다. 이 때문에 예산 담당자 이외에는 이자가 얼마나 발생했는지 불용액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 재판부는 “안기부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조차 불용액과 이자의 규모나 그 집행 과정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고, 오로지 기획조정실장만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예산회계법은 불용액의 경우 재경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다음 연도에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고, 이자도 재경부 장관에게 제출하는 결산보고서에 금액을 분명히 밝힌 뒤 국고에 납부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안기부는 ‘안풍’ 사건 기간 동안 이런 예산회계법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안기부는 불용액의 대부분을 연말에 일괄적으로 국고수표를 발행해 타낸 뒤 차명계좌에 넣어 마음대로 사용했고, 이를 숨기기 위해 관련 서류를 조작했다. 또 이자도 재경부에 보고하지 않고 아무런 통제도 없이 마음껏 사용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안기부의 행위는 국가 예산을 불법적으로 사용하겠다는 ‘불법 영득’의 의사를 실현한 것이 돼 횡령죄가 성립된다”고 지적했다.
‘안풍’ 사건에서 강 전 의원의 변론을 맡은 장기욱 변호사는 “안기부가 예산을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타내고 이를 차명계좌에 넣어 관리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라며 “지금도 이렇게 예산을 집행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안풍’ 사건 이후인 지난 1996년서부터 2000년까지도 164억∼217억원의 국고수표가 매달 ‘한꺼번에’ 발행된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국정원은 이같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 7월9일 의 서면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국정원은 예산회계법과 국고금관리법에 따라 적법하게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국민의 정부 때부터 불법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 국정원의 예산 집행 방식을 투명하게 바꿨다”고 말했다.
지금의 국정원 예산은 투명할까?
국정원은 DJ 정권 출범 이후부터 예산 수요가 발생할 때마다 국고수표를 발행해 예산을 타내고, 차명계좌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 차명계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출처 불명의 이자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정부 당국자는 “지금은 예산 집행 내역을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하기 때문에 편법으로 집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회의 ‘감사’ 기능은 사실상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회 정보위는 지난 94년부터 국정원의 예산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지만, ‘안풍’ 사건이 일어난 기간에도 ‘불투명한 예산 집행’을 문제 삼은 적은 없다. 게다가 국정원법은 국정원 예산이 국회의 통제로부터 비켜나도록 보장하고 있기도 하다. 국정원법 제13조는 ‘국가정보원장은 국회 예산결산 심사 및 안건 심사에서 국가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국가 기밀사항에 한하여 자료의 제출 또는 답변을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에서는 “사후에 예산결산을 공개하자”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정원의 예산 사용처를 낱낱이 기록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를 공개하자는 것이다. 국정원은 정보기관의 예산이 공개될 경우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며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안풍’ 사건은 국정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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