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날치기’ 주권이양 이후 이라크 표정 현지르포… 변한 것은 없고 쿠르드와 아랍계 갈등만 예고 </font>
▣ 바그다드 · 아르빌= 김영미/ 분쟁취재 전문 프리랜서 PD
6월28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는 ‘날치기’ 주권이양식이 열렸다. 임시행정처(CPA)에서 이라크인들에게 주권이 넘어온 것이다. 원래 예정된 날보다 이틀 앞당겨졌다. 이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이라크의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주권이양식이 열리는 당일 유력 인사들에 대한 표적 테러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심지어 외신 기자들에 대한 대규모 공격설까지 난무하는 등 바그다드 거리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새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이라크 저항세력과 사담 후세인 정부를 따르던 세력들에 의해 주권이양이 결코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이유로 주권이양식이 전격적으로 치러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주권을 되돌려받은 이라크인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주권이양식이 열리던 날, 식장에는 이라크 국기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얼마 전 이라크에는 새 국기가 만들어져 전세계에 알려졌다. 사담 후세인 시절의 까만 줄과 빨간 줄이 있던 옛 이라크 국기는 폐기됐다. 노란색과 하늘색을 띠로 한 새 이라크 국기에는 여러 거창한 의미가 담겼다. 국내 텔레비전 뉴스에도 이라크 뉴스가 나오면 함께 등장하곤 했다. 그런데 정작 식장에 걸린 이라크 국기는 옛날 국기 그대로였다. 한 나라의 국기를 바꾼다고 공포하고도 여전히 사담 후세인 정부 시절의 국기가 걸린 것을 보고 외신 기자들은 적잖게 당황스러워했다.
식장에 나뿌끼는 후세인 시절 국기
식이 끝나자마자 최고 임시 행정관직을 맡은 폴 브레머는 미국행 비행기에 도망치듯 몸을 실었다. 주권이양에 이라크 국민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한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통령을 직접 뽑은 것도 아니고, 미군이 철수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미군과 이라크의 소수 주요 인사들만의 잔치라는 것이 이곳 분위기다.
바그다드 시민들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겠느냐. 더 이상 최악은 없기 때문”이라면서 낙관적인 견해를 표시하기도 했다. 또 정부 기능의 조속한 정상화를 절실히 바랐던 터라 환영하는 목소리도 적잖게 흘러나왔다. 바그다드에서 자동차를 수입하는 마지드(57)씨는 “그동안 중고차 통관 절차 등 나라가 없어서 힘든 점이 많았다.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최소한 행정 절차 등이 조금은 편리해지지 않겠나”라며 기대하는 눈치다. 바그다드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하는 라미(23)씨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그간 여권이 없었다. 한달 전 유럽의 한 구호단체의 초청으로 교수와 함께 독일을 방문했다. 그때 달랑 종이 한장이 전부였다. 여권을 대신해 임시행정처가 발행해준 것이다. 지금도 공항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여권을 내고 출입국 수속을 하는데, 나와 교수만 종이 한장씩 내는 것이 무척 창피했다.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서면 제대로 된 여권을 내고 해외를 갈 수 있을 것이다.”
“새 정부가 우릴 먹여살릴 수 있느냐”
하지만 사담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와 팔루자, 바쿠바 등 수니파가 거주하는 곳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주권이양이 전격 이뤄지던 날, 사람들은 사담 후세인의 사진을 들고 나와 거리시위를 벌였다. “사담 정부 시절과 똑같이 우리는 사담을 원한다”라고 외쳤다. 바쿠바 아랍계 방송의 통신원인 페라스(35)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새 정부는 미군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정부가 아니다. 그들은 미군의 눈과 귀가 될 것이고 미군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만약 진정으로 주권이양이 이루어지려면 미군이 이라크 땅에서 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날 티크리트 시내에서 100여명의 시위가 있었고, 바그다드에서 주권이양이 이루어지는 시간에도 미군은 알자르카위를 잡는다고 팔루자를 공습해 하루 만에 60여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또 당장 민생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시민들은 정치적인 주권이양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담 후세인 시절 고등학교 선생이었고, 지금은 호텔의 행정업무를 맡고 있는 아지즈(39)씨는 “새 정부에 기대하지 않는다. 미 군정일 때와 지금의 새 정부가 다른 것이 무엇이냐. 사담 시절에 나는 30달러가량의 월급을 받았는데 4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데 빠듯하나마 괜찮았다. 지금은 200달러의 월급을 받지만 물가가 올라서 턱없이 모자란다. 중학생인 큰아들이 하루에 2달러를 받고 가게 종업원으로 일을 해야 한다. 먹고살기 바쁘다. 새 정부가 우리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보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바그다드 시내의 주유소는 여전히 전쟁 직후와 마찬가지로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달라진 점이라면 전쟁 직후에는 기름이 모자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밤새워 줄을 서서 기름을 구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차에 기름을 넣고 집에 돌아와서는 차의 기름을 다시 호스로 빼낸다. 그런 뒤 암시장에 내다 판다. 다시 주유소에 가서 차에 기름을 넣는 식이다. 이런 비즈니스가 바그다드에서는 유망 직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그다드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한정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원하지만 이들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암시장에서 돈을 벌어야 가족을 돌볼 수가 있다. 아이들도 경제 전선에 뛰어들어야 먹고살 수가 있다. 남자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신문이나 화장지를 팔아 단 1달러라도 벌어 집에 갖다줘야 한다. 알 사둔 거리에서 알루미늄캔을 주워 돈을 버는 살라(8)는 “하루 종일 깡통을 주우면 1달러가량을 받는다. 그 돈을 엄마에게 갖다준다. 형들도 학교에 가지 못한다. 누나들도 무서워서 집에만 있고,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새 정부 주요 직책에 쿠르드인 없어
바그다드 사람들은 이렇게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필자조차 이 문제들을 새 정부가 과연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모두 파괴됐다. 미국이 파괴하고 나서, 미국이 다시 세운 꼭두각시 정부가 과연 제대로 사회 시스템을 복구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한편 이라크 새 정부는 쿠르드 민족에게도 탐탐치 않다. 대통령으로도, 총리로도 쿠르드인이 한명도 발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시 헌법에는 쿠르드족의 주요 요구사항도 다 빠졌다. 임시 헌법에는 앞으로 헌법 제정 과정에서 3개 주 이상이 반대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이로 인해 아랍족은 쿠르드족의 독자적인 자치를 보장하려는 제도적 장치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시했다. 이에 아랍계인 시아파가 적극 뛰어들어 반대했다. 결국 이라크 새 정부의 주요 직책들이 아랍계 인사들로 채워지는 바람에 미국이 아랍계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냐는 쿠르드계의 반발을 불러왔다.
쿠르드민주당(KDP) 총재인 마수드 바르자니와 쿠르드애국동맹(PUK)의 자랄 탈라바니 총재는 즉각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임시 헌법에 주요 요구사항이 명시되지 않을 경우 내년 1월 총선에 불참할 것”이라고 최후 통첩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지난 6월 중순께 미국쪽에서 다음 총선에는 쿠르드족의 요구를 배려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잠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다. 쿠르드인들도 이번만은 양보하지만 다음번에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을 밝히고 있다. 쿠르드 지역에서 영향력을 제법 갖고 있는 바르자니 부족의 부족장인 오마르씨는 “우리는 이라크전에서 미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음 정부에는 대통령도 쿠르드인, 총리도 쿠르드인이 되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6월19일 아르빌 옆 살라아딘에서 바르자니가 미군 인사들과 가진 회동에서 “새 정부는 우리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다음 1월 총선을 기대한다”며 단호한 입장을 전달했다. 주권이양 뒤에 오히려 본격화될 아랍족과 쿠르드족 사이의 만만치 않은 갈등을 예고해주는 대목이다.
무기 반납하면 사면 조치 해준다고?
새 정부에게는 불안한 치안 상황 극복도 큰 과제다. 주요 도시를 비롯해 바그다드마저도 저항세력의 공격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날마다 로켓이 떨어져 사람이 죽는 기사는 이제 일상화돼 주목조차 못 받고 있다. 안전하다는 ‘그린존’도 이제 이름값을 못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의 공격을 받고 있다. 외신기자들이 대거 묵고 있는 호텔 주변도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다. 이제 이라크에는 어디에도 안전한 지역은 없는 셈이다.
부총리인 이야드 알라위는 “치안을 위해 저항세력이라 할지라도 지금 무기를 반납하면 사면 조치를 해줄 것이고 치안이 계속 악화되면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금도 저항세력들이 거침없이 활동하는 상황에서 누가 사면 조치를 반기겠느냐는 비아냥만 들린다. 밥보다 총이 더 잘 통하는 이라크에서 누가 총을 반납하며, 더는 나빠질 게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국가비상 사태 선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라크에서는 주요 인사가 되면 바로 암살 표적이 된다. 나라의 치안을 다스리기는커녕 스스로의 목숨을 보존하기도 벅차다. 한동안 이라크가 정상적인 국가로 가동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셈이다. 자연스레 미군의 도움 없이는 국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오히려 미군 병력도 늘고 있다. 따라서 무늬만 새 정부이지, 미 군정의 지속이나 다름없다.
바그다드 시민들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일반인들은 입에 풀칠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고, 여자들이 마음 놓고 거리를 다녔으면, 폭탄이 더는 터지지 않았으면, 그래서 사람들이 죽지 않았으면하는 소망뿐이다. “마쿠 하쿠마 굴라 이라크(모든 이라크는 정부가 없어).” 필자가 빌린 렌트카 운전사의 체념이 이라크인들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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