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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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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인 여름휴가, 농촌으로!

등록 2004-07-01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 추천하는 녹색농촌체험마을에서의 색다른 피서… 홍성 · 진안의 두 마을을 먼저 찾아가다


불볕더위가 닥치면서 여름 피서철로 접어들고 있다. 누구나 해마다 느끼겠지만 계곡·바다만 찾아가는 피서길은 고생길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또다시 번잡한 피서지로 향하는 게 여름 휴가철 풍경이다. 올해는 발길을 돌려 ‘농촌마을’로 떠나보자. 여름 휴가철의 농촌이라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고향’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부모님도 오래 전에 대처로 나와서 갈 만한 시골 고향이 없어진 도회지 사람도 많다. 은 농림부가 선정한 ‘녹색농촌체험마을’(전국 76곳)을 올 여름 가볼 만한 피서지로 꼽고, 전북 진안 능길마을과 충남 홍성 문당마을을 미리 찾아갔다. 각 지역의 녹색 농촌마을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농촌관광 포털(www.greentour.or.kr)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i>편집자</i>


▣ 진안 · 홍성=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덕유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뒤 무주 방향으로 가다 보면 해발 400여m 산속 작은 농촌마을들이 차창 밖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6월24일, 산과 개울을 몇번 끼고 돌자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마을 어귀에 내걸린 팻말이 외지에서 온 사람을 먼저 맞았다. ‘녹색농촌체험마을 능길마을’.

황토흙으로 리모델링한 폐교 분교

길가에 세워진, 짚 지붕을 인 원두막이 보기만 해도 서늘하다. 그 원두막 뒤쪽 운동장 너머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건물이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익다. 화단에 서 있는, 비바람에 깎인 어린이 동상 몇개가 이곳을 말해주고 있었다. ‘능길시골자연학교’라고 이름 붙여진 이 건물은 오래 전에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를 개조해 새로 꾸민 집으로, 녹색농촌 체험을 위해 능길마을을 찾아온 사람들이 묵을 곳이다.

자연학교는 황토흙으로 리모델링 공사를 했지만 오래된 유리창이 깨진 채 그대로 있는 등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학교 현관 처마에 내걸린 마른 수숫대에서 빨간 수수 낱알이 떨어졌다. 봉숭아꽃이 앞다퉈 핀 화단에 몸을 늘어뜨린 두꺼비는 좀체 움직일 줄 몰랐다. 삐거덕, 내부에 들어서자 낡은 교실 복도 소리가 여름 산골마을의 고요를 깼다.

마을 앞길을 사이에 두고, 자연학교 앞으로는 구량천이 돌돌돌 흐른다. 옛날 이 마을에서 구리가 많이 났다고 해서 구량천이란 개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콸콸, 물소리는 마을 길에서부터 들려왔다.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구량천은 제법 폭이 넓고 하천 생태계가 그대로 살아 있어 쉬리·쏘가리·모래무지 등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개울 징검다리 건너편에는 햐얀 개망초꽃이 유채밭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노란 꽃을 매단 애기똥풀도 무리지어 개울을 수놓고 있다. 천변에 있던 물레방앗간은 이제 더 이상 돌지 않는다. 늙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풍성한 나뭇가지를 무겁게 늘어뜨린 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능길마을에는 벌써 가을이 찾아오고 있는 것일까? 개울가 논두렁길을 한참 걷다 보니 빨간 고추잠자리가 언제부턴가 어깨에 앉아 있었다. 후두둑, 한바탕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마을 앞길 고추밭에 여름비가 내렸다. 빗소리 때문인지 길섶에서 풀벌레가 일제히 울어대기 시작했다. 52가구 150여명이 사는 능길마을은 여느 농촌처럼 노인들만 남아 적막강산처럼 조용하고 또 아늑했다. 집집마다 마당 한쪽에서 감나무가 열매를 맺고 포도덩굴이 제멋대로 흙담벼락을 타고 오른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오래된 우물 속에서 능길마을의 여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새끼 꼬고, 짚신 만들고…

“아줌마, 여기 봐요. 희한한 감자가 나왔어요.” “어, 지렁이다.” 이날 오후 인천 부평공고 학생 20여명이 마을을 찾아왔다. 학생들이 능길 녹색농촌체험마을 대표자인 박천창(44)씨를 따라 호미를 들고 자연학교 옆 밭에서 감자를 캐고 있었다. 박씨는 10년 전에 폐교된 이 학교의 졸업생이다. “자기 앞 고랑에 있는 감자는 다 캐고 풀도 캐야 돼. 천천히 살살 캐! 상처나면 내일 당장 썩어버리거든.” 박씨의 아내 김미아(38)씨가 학생들을 거들었다. “아저씨, 이렇게 작은 게 하지감자죠?” “아니, 하지 때 캐는 감자를 하지감자라고 하지.”

산길을 따라 마을 뒷산에 올라보면 아름드리 노송 세 그루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굽은 가지를 늘어뜨린 노송 그늘에서 염소가 풀을 뜯고, 그 뒤쪽으로 어른 키만큼 웃자란 밀밭이 비바람에 출렁였다. 길가에 제멋대로 줄지어 핀 풀꽃과 야트막한 산 중턱 군데군데에 핀 샛노란 밤나무꽃이 능길마을의 여름빛을 더 짙게 만들고 있었다. 감자캐기를 끝낸 뒤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투망을 들고 구량천으로 나갔고, 일부는 원두막에 앉아 밀대로 여치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능길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왜가리 서식지다. 마을에서 한 20분쯤 걸어가면 근처 대야마을의 대뜰 부근에 수백 마리의 왜가리떼들이 날아들어 집단군락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2월이면 이 마을로 날아와 봄 여름을 보내면서 새끼를 치고 처서가 되면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왜가리가 떼지어 앉아 있는 산 중턱의 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잃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옛날에는 마을 하늘에 새끼에게 줄 개구리나 뱀을 물고 가는 왜가리들도 간혹 있었어. 배고픈 시절에는 마을 사람들이 오리알처럼 큰 왜가리 알을 삶아먹기도 했는데. 지금은 저것들, 농작물 밟고 다니고 귀찮은 존재여.” 동네 사람인 한규영(65)씨가 마을 안내인처럼 친절하게 설명을 보탰다.

산골마을인데다 부슬비가 내려서인지 능길마을에는 어둠이 일찍 찾아왔다. 능길마을 풍경은 해 질 녘에 그 정취를 더한다. 뉘엿뉘엿 날이 저물고 땅거미가 깔릴 무렵 마을에 불빛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물이 불어나서 그런지 구량천 물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찌르르르…. 여치 같은 풀벌레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20촉짜리 전등 불빛을 매단 원두막에 학생들이 둘러앉았다. 짚신 만들기 체험이다. “옛날에는 초저녁에 새끼를 100m도 더 꼬았지. 새끼를 잘 삼으려면 손에 침을 이렇게 퉤퉤 묻혀서….” 동네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자 학생들이 지푸라기를 한 뭉치씩 들고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자 학생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낮에 캔 감자를 구웠다. 구름 사이로 달이 빠져나오자 마을과 개천이 반짝 드러났다. 손톱만한 달이 서산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희붐하니 먼동이 틀 무렵 개천 너머 산허리에 물안개가 자욱하게 걸렸다. 등산로를 따라 곧게 뻗은 낙엽송이며 느릅나무가 울창한 마을 앞산을 한바퀴 돌고오면 하얀 왜가리 몇 마리가 이른 아침부터 논바닥을 헤집고 있다.

관광지처럼 놀려면 가지 말아야

능길마을에서 묵을 곳으로는 능길자연학교 뒤편에 새로 지은 20·25평짜리 황토방 두개(20∼30명 숙박)가 있다. 옛날에 학교 관사로 쓰이던 곳도 개축해 방 5개짜리 숙소를 만들었다. 방문객이 몰려 방이 모자라면 이 마을의 농가를 민박으로 돌리기도 한다. 농촌체험행사 프로그램으로는 감자캐기·여치집 만들기·새끼 꼬기·황토흙 천연염색·두부만들기 등이 있다.

마을에만 있으면 심심할 수 있는데, 주변에 둘러볼 곳도 많다. 능길마을에서 차로 20여분 가면 닿는 용담댐에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낮은 야산들이 호반을 가르고 있다. 댐 위의 정자에 앉아 있으면 호수바람인지 솔바람인지 모를 시원한 바람이 쉼없이 불어온다. 용담댐 근처에는 천반산 계곡이 흐르는데, 이 계곡물은 상전면 수동리에 이르러 죽도(竹島)를 이루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 바위 아래로 물이 한 바퀴 휘감고 돌아 산중의 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안군 성수면에는 바위 틈 구멍에서 찬바람이 나오는 풍혈(風穴)과 삼복더위에도 손을 담그고 1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갑다는 냉천(冷泉)이 있다.

“농촌은 농촌다워야 합니다. 관광지처럼 그냥 놀려고 한다면 여기 말고도 많이 있잖아요.” 박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능길마을에는 노래방도 없고 구멍가게도 없어요. 술 먹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도 없죠. 농촌체험마을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면 농촌을 오히려 망가뜨릴 수도 있어요.”

이튿날 충남 홍성군 홍동면 문당마을로 가는 길. 홍동면에 들어서자 논가에 주황색 지붕을 인 조그만 오리 막사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홍성군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 산으로 둘러싸인 문당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친환경 오리농 마을이다. 마을 앞 평야에는 삽교천이 흐르고 남쪽으로 널찍한 홍동 저수지가 펼쳐진다. 문당리는 골짜기를 중심으로 문산·동곡·서근터(안말)·원당 등 4개 자연마을이 집촌을 이루고 있다.

낮은 구릉지 야산 자락에 집들이 몇채씩 안겨 있는 문당마을은 푸근하고 한갓진 농촌의 풍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유난히 아카시아가 많은 마을길을 걷다 보면 여느 농촌과 달리 마을 길이 깔끔하게 잘 정돈돼 있다. 농약을 치지 않기 때문에 마을 농민들이 날마다 공동으로 논둑이며 길가의 잡풀을 베고 있다고 한다.

새큼하고 단 감나무꽃이 떨어진 산길을 따라 마을 뒷산에 오르면 언덕에 줄지어 선 묘비명 옆으로 헌칠하게 뻗은 소나무들과 울창한 대나무숲이 나타난다. 산길을 오를 때 바짓가랑이에 흙이 묻어도, 얼굴에 갑자기 거미집이 뒤덮어도 그리 나쁘지 않다. 뒷산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대숲 너머 멀리 구불구불 이어지는 황톳길이 뱀처럼 산허리를 감아돌고 있었다. 푸른 들녘과 황톳길이 뙤약볕 아래서 대조를 이루며 반짝 빛났다. 하얀 꽃을 매단 여름 등나무와 보라색 나팔꽃이 소나무들을 칭칭 휘감아 올라가고, 간혹 들리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조용한 문당마을을 더욱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문당마을의 논은 청둥오리가 온통 휘젓고 다닌다. 문당마을 환경농업교육관의 방인성(32)씨는 “문당리 농가(88가구)가 모두 오리농법을 하고 있고, 이 마을 일대까지 합쳐 600여 농가가 240만평에서 오리농법 농사를 짓고 있다”며 “친환경 농업을 기반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문당리 환경농업 100년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박수를 치자 청둥오리가 주인을 알아보고 우르르 오리 막사로 몰려든다. 논두렁마다 작은 망을 쳐놓았는데, 가끔 너구리가 산에서 내려와 청둥오리를 잡아먹기 때문이란다. 청둥오리는 7월 중순 벼 이삭이 팰 때쯤이면 제가 맡은 농사일을 모두 마치고 논에서 나오게 된다.

또 다른 볼거리, 농촌생활 유물관

마을 들머리 언덕에 자리잡은 환경농업교육관은 지난 2000년 마을 주민들이 함께 만든 황토흙 건물이다. 교육관에는 최대 80여명이 묵을 수 있는 숙소(방 3개)가 있다. 교육관 바깥 한쪽에는 커다란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는데, 중간에 태양열 전지판을 매단 풍력발전기다. 이 발전기에서 하루 800W의 전력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교육관 앞마당 평상에 앉으면 멀리 마을 뒷산(오봉산) 정상에 빠꼼히 솟은 팔각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주민들이 닦아놓은 오봉산 산책로의 중간 쉼터다.

환경농업교육관 옆에는 또 다른 볼거리로 농촌생활 유물관이 있다. 여기에는 쇠스랑 같은 농기계부터 가마니틀·베틀·풍구·키·소 구유·메주틀·시루 등 옛날부터 농가에서 쓰던 생활도구들이 즐비하게 전시돼 있다. 물레·화로·홀태·도리깨도 있고 대장간 풍경도 볼 수 있다. 모두 주변 마을에서 기증받은 유물들이다. 숙소 맞은편에는 황토로 만든 찜질방이 있고, 오리농법으로 생산한 쌀을 빻는 방앗간도 체험할 수 있다. 문당마을에 가면 감자캐기 등 농산물 수확에다 황토염색·떡만들기·새끼꼬기·반딧불이 보기 등을 직접 해볼 수 있다. 숙박은 하룻밤에 1인당 5천원이고, 식사도 제공되는데 1끼 5천원이다.

올 여름 농촌마을에서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서늘한 여름’을 보내는 건 어떤가? 물론 녹색 농촌마을의 숙소는 별장도 아니고 콘도미니엄도 아니다. 그러나 늘상 가던 이름난 피서지를 벗어나 농촌마을로 발길을 돌리면 더위도 피하고 토속적 삶의 서정과 자연의 섬세한 숨결을 체험하고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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