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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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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념은 기독교 사회주의”

등록 2004-06-17 00:00 수정 2020-05-03 04:23

성공회대학의 초석을 닦은 이재정 신부… “1명의 지도자가 아닌 10명의 동반자를 길러낸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성공회대학의 초석을 닦은 이재정 신부(60·열린우리당 전 의원)는 대학 재직 당시 모두 세 차례의 총장 취임식을 가졌다. 1988년 성공회신학원의 총장으로 임명된 데 이어 1993년엔 성공회신학대학의 총장, 1994년엔 종합대로 승격한 성공회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교세가 적은 교단의 하나인 성공회교의 사제를 길러내는 작은 신학교를 오늘날의 튼실한 종합대학교로 가꿔내기까지 이재정 신부가 흘린 소금땀, 비지땀의 내역은 보통 사람의 머리와 가슴으로선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성공회대의 정주영!

특유의 ‘더운피’ 때문이었을까, 비전 있는 총장이자 존경받는 성직자로 만족했을 법도 한데, 2000년 그는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교직원들을 뿌리치고 학교를 떠나 정치권으로 향했다. 민주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해 16대 비례대표 의원을 지내며 2002년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도 앞장섰다. 그러더니 지난 1월엔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 한화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3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진위야 어쨌든 신부로서 ‘검은돈’에 엮여 수사를 받고 창졸간에 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으니, 흡사 빠른 속도로 내리닫는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회의 민주화·투명화 과정에서 겪는 개인의 고통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그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물론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마자 사제직을 반납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고통스러운 표정이 잠깐 스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대한성공회에 사표를 냈고 의원직도 그만뒀지만, 그에겐 여전히 사제와 정치인이란 두 가지 정체성이 겹쳐 있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할 사제로서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사소한 허물이라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치자금의 단순한 전달자가 영수증을 안 받았다고 해서 유죄라는 것은 현행 정치자금법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단호히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성공회 교단은 그가 낸 사표를 반려해 남양주 외국인노동자 샬롬의 집 사목을 맡겼다. 그는 사제직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곳에서 주일마다 미사를 집전하게 된다.)

이 신부와 함께 대학을 일구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뜨거운 열정을 떠올리면 혀를 내두른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등장하는 이재정 신부는 마치 현대의 정주영 회장 같은 ‘카리스마의 화신’이다. 학교에선 거의 작업복 차림이었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열리는 제3세계 신학포럼에 참가하느라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온 뒤에도 밤 11시에 학교에 들러 밀린 업무를 결재했다. 학교돈 쓰는 일이라면 10원 한장이라도 발발 떨며 아끼던 그는 따로 판공비를 받지 않고 강연·기고 활동으로 용돈을 벌어썼다. 입시철이면 “새 식구 맞는 일에 소홀할 수 없다”며 도시락을 열댓개씩 싸서 새벽 4시에 출근해 뒤이어 출근한 교직원들과 도시락을 나눠먹었다고 전한다.

1994년 성공회대를 종합대학으로 만들던 때가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 신부가 처음에 종합대학안을 제안하자 이사회에서는 “돈이 없어 학교가 문 닫을 판인데 무슨 소리냐”며 뒤로 넘어갔더랬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해 ‘1만기도회원’을 모집해 ‘개미 후원부대’를 조직했고 이 돈으로 건물을 짓고 교수를 뽑았다. 본인 역시 전 재산을 털어 대학에 쏟아부었다. 그는 지금도 집이 없이 서울 잠실의 장모댁에서 함께 살고 있다.

“제가 88년 학교를 처음 맡았을 때 이 학교를 통해 신학적·교육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이념은 ‘기독교 사회주의’였습니다.”

그는 성공회교의 근본 이념은 평등과 관용에 기초한 ‘기독교 사회주의’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학교란 사회적 평등, 남북간 대화와 평화, 남녀간 인간 평등을 실천하는 곳이자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곳이어야 했다. “우리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역사를 변화시킨 주체는 일류 엘리트가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과 의식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다르게 태어나는데, ‘능력의 우열’이라는 인간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성공회대의 역할이야말로 우수한 엘리트가 아니라 역사와 세상을 보는 판단력을 갖춘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길러내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1명의 지도자가 아닌, 10명의 동반자를 길러낸다는 이념은 구체적인 학교 운영에서 드러난다. 이 신부는 “수능 성적에선 절대로 서울대를 앞지를 수도 없고, 또 앞지르면 뭐하겠냐”며 “우리는 다른 대학과 다른 것을 실험하는 데서 살길을 찾았다”고 말한다.

우선 교수진을 뽑는 것이 달랐다. 유달리 ‘역사 의식’과 ‘자기 책임’을 강조하던 이 신부는 비슷한 학문적 성과를 갖추고 있을 경우엔 민주화운동의 경력에 가산점을 주었다. 통혁당 사건으로 20년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 풀려난 신영복씨를 과감하게 교수로 채용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우리가 그같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를 먼저 생각했지요. 하고 싶은 강의는 무엇이든 좋으니 우리 학교에 오시라고 했어요.” 성공회대 울타리를 넘어 우리 사회 지성의 뿌리이자 살아 있는 정신이 된 신영복 선생은 그렇게 해서 ‘교수님’이 됐다.

‘100만원 일률 보너스’의 추억

이 신부는 영문학과의 진영종 교수를 채용할 때도 인상 깊었다고 기억한다. “지하철 즉석사진기에서 뽑아온 현상수배범 같은 얼굴 사진 밑에 ‘전국대학강사 노조위원장’이라는 이력이 첫 줄에 쓰여 있더군요. 강사노조 같은 걸 경력으로 쓰면 어느 대학에서 뽑아주겠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래도 제가 한 일인 걸요’라며 대답하더군요. 저는 그처럼 책임을 지는 태도가 우리 대학과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전쟁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를 뛰어넘는 훌륭한 학문적 성과를 이뤘으면서도, ‘성향’과 ‘과거’ 때문에 어느 대학에서도 뽑아주지 않아 ‘석좌급 시간강사’라는 별명이 붙은 정해구 교수를 임용한 것도 이 신부였다.

학생 선발에서도 그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대안학교 출신이거나 두발 자유화·학벌 없는 사회 운동 등 고등학생 시절부터 운동을 한 ‘머리 큰 고등학생’들을 특별전형으로 모집한 것도 그의 구상에서 출발했다.

이 신부가 머릿속에 그린 이상적 대학의 모습은 ‘협동사회’, 곧 ‘공동체’였다. 그래서 대학 초창기 학생 수가 적을 때는 교수·직원·학생들이 모두 함께 수련회를 떠났다. 교직원들은 아직도 ‘100만원 일률 보너스’를 생생히 기억한다. 1990년대 후반 성공회대가 전국에서 가장 입학시험 경쟁률이 높던 해가 있었다. 입시 전형료를 많이 벌어들인 만큼 수고한 이들에게 특별 보너스를 주기로 결심한 이 신부는 일용직 청소부 아줌마부터 교수까지 똑같이 100만원씩을 지급했다. 평생 이같은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던 청소 담당 직원들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파리도 미끄러질 만큼 복도를 반들반들 닦았다고 한다.

종합대학으로서 성공회대의 출발은 기존 신학과에 영어과, 사회복지학과, 사회학과를 덧붙인 형태로 출발했다. 여기에 중어중국학과, 일어일본학과, 유통정보학과, 신문방송학과 등의 인문·사회 계열이 확대됐고 글로컬IT학과, 디지털컨텐츠학과 등 자연·공학 계열이 합쳐졌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NG0대학원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재교육기구로서 각광받고 있다. 이 신부는 이런 학과들을 만들며 다음과 같은 밑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종교적 말씀(canon)을 사회과학이란 텍스트(text)를 통해 아시아적 맥락(context)에서 시민사회단체 등 NGO들의 활동을 통해 구현(praxis)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공회대의 현실이 이 신부의 머릿속 그림처럼 정합적인 모습으로 전개돼온 것은 아니다. 조직과 권력, 돈을 갖춘 다른 대학이 세를 몰아 과감히 투자할 때, 이 대학은 가난한 게릴라전을 펼쳐야 했다. 그럼에도 가난의 부피와 달리, 이 대학의 업적과 무게는 빛난다. 그건 아마도 이 신부의 말마따나 “학교의 진짜 주인은 교수나 학생이나 직원이 아니라 학교에 깃든 가치와 이념, 곧 학풍이고 그것을 함께 지켜나가는 모두의 노력이 성공회대의 동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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