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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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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 광명시를 만나다

등록 2004-06-17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학교와 마을이 함께 하는 커뮤니티 실험 ‘광명시평생학습원’… 대안교육 모델 키우며 지역화폐도 유통 </font>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지리적으로 볼 때 성공회대는 서울의 ‘주변부’에 자리잡고 있다. 성공회대의 주소지인 서울 구로구 항동은 서울의 서남쪽 끝에 매달려 생활권은 서울보다는 광명·부천 같은 이웃 도시랑 함께한다. 위치만 서울의 ‘주변’이 아니라, 어떤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대부분 학생들의 거주지 역시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따라 분포하고 있다”. 구로구 고척동부터 인천까지 이르는 동서축과 중랑구 면목동·청량리부터 안양·안산의 남북축을 포괄하는데, 이 중에서 서울 한복판 동네, 강북의 종로구나 강남의 서초·강남구 같은 지역은 쏙 빠진다. 어쩌면 이런 태생 성분 때문에라도 성공회대는 자연스럽게 ‘지리적 소명’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중심과 주변의 차별을 없애고 건강한 지역성을 일구는 데 앞장서는 것.

그런 맥락에서 성공회대가 위탁운영하고 있는 ‘광명시평생학습원’은 대학이 동네 주민들의 배움의 욕구를 받아안고 학교와 마을이 함께하는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실험이라 할 만하다. 1998년 구로구와 조인식을 맺어 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기초지방자치단체와 협력의 틀을 만들었던 성공회대는 2002년 3월엔 광명시평생학습원의 운영을 시작했다. 평생학습원의 기획·운영을 총괄하는 고병헌 교수(교양학부)는 “‘평생학습도시’를 만들겠다는 광명시와 새로운 대안교육의 모델을 지역에서 실현해보겠다는 성공회대의 계획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하철7호선 철산역에서 내려 광명경찰서쪽 출구로 나가 100m쯤 걸어가면 상가건물 사이에 얼굴을 내민 광명시평생학습원이 보인다. 옛 보건소 자리에 지은 이 건물은 500평 대지에 연면적 1300평의 아담한 규모로 공연장·세미나실·어린이도서관 등을 갖추고 있다.

뭐니뭐니 해도 평생학습원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은 어린이도서관 ‘청개구리도서실’이다.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는 마침 수요일마다 열리는 ‘책 읽어주는 도서실’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어머니 자원봉사자들이 ‘호호할머니’ 목소리를 내가며 귀를 쫑긋 세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청개구리도서실은 때로 이 프로그램에 광명시의 경찰서장·소방서장 같은 ‘제복 입은 지역 어른’들도 초청해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도록 한다.

청개구리도서실 인기 짱!

유치원이나 학원 말고는 마땅히 아이들을 보낼 곳 없는 엄마들은 ‘청개구리도서실’에 출근하는 경우도 많다. 둘째딸 현조(6)와 함께 도서실에 온 신혜진(38·광명시 하안동)씨는 “새 책이 자주 들어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책을 읽히고 나는 유아교육책을 보면서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지요. 이곳에 오면 나이 드신 어른부터 어린아이들까지 북적이는 모습이 정말 ‘평생교육’을 하는 곳 같아요.” 이곳엔 캐나다대사관에서 선정한 어린이영어동화책이나 시청각교재 같은 것도 많아 영어교육에 관심 많은 부모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사서선생님인 김하야나씨는 “머지않아 광명시립도서관과도 책을 호환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어른들이 공부를 시작할 땐 나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게 되지만, 막상 불이 붙으면 무섭단다. 세미나실에선 일본어학습동아리 ‘대나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나무’라는 이름을 달고 2년 전부터 12명의 어른들이 모여 시작한 이 동아리는 매주 2번씩 모여 2시간가량 일본어잡지 등을 강독한다. 공부가 있는 날이면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안양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2시간씩 달려오는 회원도 있을 만큼 분위기가 뜨겁다. 평생학습원 이병곤 원장(성공회대 민주사회연구원 대우교수)은 “평생학습원에 소속된 학습동아리가 30여개 정도로 이들은 세미나 장소를 제공받고 등록한 지 6개월 정도 지나 안정적으로 운영될 경우엔 연 30만원가량의 학습지원비를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광명 주민의 정체성을 심어준다

광명시 평생학습원이 자랑하는 프로그램은 시민대학이다. 4학기 2년 과정의 시민대학은 올해 역사학·생활의학·상담심리학의 3개 학과로 출발했다. 1학기 등록금 10만원을 내고 매주 한 차례 3시간씩 전공 과목을 수강한다. 전공 외에도 학생들은 교양필수 과목인 1년 40시간 이상 ‘사회봉사 활동’과 함께 ‘광명지역학’을 들어야 한다. 광명에 살았던 인물들과 고장의 내력을 배우는 광명지역학은 의외로 수강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조선시대 문인인 이원익 대감부터 기형도 시인(짧은 생애였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광명에서 살았다고 한다)에 이르기까지 광명에 몸담았던 인물들의 삶을 전해듣는다. ‘광명지역학’을 필수과목으로 정한데서도 짐작하겠지만, 평생학습원은 교양과 지식의 전달뿐 아니라 광명 주민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린벨트가 60% 이상을 차지하는 광명시는 그동안 서울의 베드타운 정도로 여겨져온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 중반 안양천 주변 하안동과 철산동 일부만 아파트로 개발됐을 뿐 광명시 전체적으론 별다른 변화의 계기가 없었다. 광명의 중산층이라고 하면 서울로 출퇴근하는 샐러리맨들인데, 이들에겐 자연히 ‘광명시민’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다. 형편이 좀 나아지면 아이들 교육 때문에라도 분당이나 일산으로 이사가고 싶어하는 것이 이들의 소박한 꿈 가운데 하나다. 고병헌 교수는 “교육 때문에 다른 도시로 떠나고 싶어했던 주민들이 다시 ‘교육’ 때문에 광명시를 고집하도록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광명에서 6년째 살아온 한미경(35·철산동)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머나먼 꿈만은 아닌 것 같다. 시민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는 한씨는 “평생학습원 때문에 내 삶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6·4살 두 아이의 엄마인 한씨는 그동안 애들 때문에 자기개발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수업시간엔 평생학습원의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맡아서 돌봐줍니다. 애들과 집에서 하루 종일 씨름하던 제게 평생학습원은 청량제와도 같아요.”

오래도록 광명에 살면서도 할인마트·병원 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만 알 뿐 동네 내력 같은 것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한씨는 시민대학에 다니면서 “광명에도 ‘역사’라는 것이 있구나”라고 새삼 깨달았다. 좀더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으로 시작한 상담심리학 공부도 재밌지만 “무엇보다 이 나이에 새로운 경험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이런 여건이 만들어진 게 고맙다”. 시민대학 외에도 평생학습원의 시민교양강좌 가운데 ‘독서지도’를 수강하는 한씨는 청개구리도서관이 쉬는 월요일을 빼고는 거의 매일 평생학습원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평생학습원을 찾아올 수 없는 이들에겐 ‘찾아가는 평생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전교생이 100명 조금 넘는 초등학교(그린벨트로 묶인 동네는 초등학교가 분교 수준인 곳도 많다고 한다)를 찾아 연극놀이·미술 슬라이드 상연 등을 해주거나, 장애청소년·노인대학·노인정·저소득층 어린이 놀이방 등을 찾아다니며 음악치료·종이공예·치료레크레이션 등을 마련한다. ‘누구나 배우고 그 배움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평생교육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화폐, 그루

평생학습원은 최근 광명시 23개 시민단체 등과 함께 ‘지역통화 나눔장터’를 열었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화폐가 없어도 서로 가진 물건을 나누고 각자의 재능과 노동력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실험이다. 이병곤 원장의 ‘광명 더불어숲 통장’엔 ‘그루’(guru·나무를 세는 단위인 동시에 인도어로 스승이라는 뜻을 지닌다)라는 지역통화 단위가 찍혀 있다. 샤프펜슬을 받은 뒤 2천 그루가 빠져나간 대신 강의를 해준 노동의 대가로 5만 그루를 받았다. 성공회대학 민주사회교육원에선 이런 지역통화가 ‘실제로’ 쓰이기도 한다. 강의 등록금 20만원 가운데 15만원은 현금으로, 5만원어치는 그루로 내는 식이다.

광명시평생학습원은 개원 뒤 지금까지 170여곳의 지방자치단체가 답사를 다녀갔다. 평생학습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도 컸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교육을 목말라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고병헌 교수는 그간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사회와 비판적인 대립각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유효했다면, 이제는 대안을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이런 대안이야말로 얼마나 사랑과 애정이 필요한 일인지 새삼 깨달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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