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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의 순수성이 의심된다?

등록 2004-06-03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계진출=회원퇴출’ 개정안 끝내 부결… 정체성 둘러싼 내부 고민 깊어져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민변 정권’ ‘변호사 참여정부’ ‘민변의 최전성기’….

언론에서 민변과 참여정부의 관계를 빗대 만들어낸 말들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회’(민변)는 정권과 ‘찐한 연애’를 하는 듯 보였다. 대통령의 핵심참모는 물론 노무현 정부의 ‘개혁 이정표’에도 어김없이 민변 간판이 오르내리며, ‘참여정부의 핵심실세’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지나친 ‘사랑’에 대한 부담 때문일까. 민변이 맞은 ‘전성시대’는 민변 창립 16년 만에 ‘최대의 논란’이 되어 조직 내부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 5월29일 충남 아산에서 열린 민변 제17차 정기총회는 민변의 ‘갈 길’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뚜렷이 드러난 자리였다. 노무현 정부에 민변 출신 인사가 대거 등용되면서 갑자기 ‘뜬’ 민변의 위상에 대한 회원들의 고민이 이어졌고, 고민의 ‘결정체’는 민변의 회원자격을 제한하는 회칙 개정안으로 나타났다.

“강금실 · 천정배 · 이종걸을 제명하라”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장 및 정무직 공무원은 회원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의 회칙 개정안은 총회 소집 전부터 민변 내부를 술렁이게 했다.

이번 회칙 개정 논란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2월의 이라크 파병 문제다.

‘파병반대’라는 민변의 공식 입장과 달리, 이라크 파병처리안에 찬성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천정배 의원, 이종걸 의원 등 3명에 대해 회원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기본적 인권과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민변의 창립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민변 집행부는 “앞으로 이런 상황이 발생할 여지가 많은 만큼,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일부 회원들이 ‘뿌리뽑기’ 차원에서 회칙 개정안을 발의했다.

회칙이 개정되면 영향을 받는 민변 회원은 임종인 전 민변 부회장 등 17대 총선 당선자 10명과 천정배·이종걸 의원,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김창국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등 모두 14명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영구 국정원장 등은 민변을 탈퇴한 상태다.

개정에 찬성하는 쪽에서는 ‘현실적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일단 정치권으로 들어가면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파병 문제처럼 민변의 입장에 어긋나는 ‘정치적인 고려’를 할 수밖에 없다. 본의 아니게 민변의 입지가 훼손될 우려가 있고, 그때마다 징계 요구를 받아 처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서로의 정치적 의사표현에 부담이 생기는 만큼, 관계의 일시단절을 통해 서로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섣부른 태도”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민변출신 당선자들이 일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임의 기본 방향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면, 상벌 조항을 통해 징계하면 될 일이라고 덧붙였다. 또 지금은 고위직에 진출한 회원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 이들이 소속감을 갖고 개혁을 견인하도록 독려할 때라고 주장했다.

치열한 찬반 토론 끝에 표결이 벌어졌다. 개정 찬성 의견이 198표, 반대 75표. ‘정치권과 거리두기’에 표가 몰렸지만, 재적회원(431명)의 과반수인 216표가 되지 않아 결국 부결됐다.

‘참여정부와 한몸’이라는 오해가 껄끄러워

비록 부결됐지만 민변의 이번 논의는 “정치인을 조직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단순논리를 넘어, 민변의 정체성을 둘러싼 내부의 고민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사실 정치권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고민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민변 출신 국회의원이 나오기 시작한 지난 15대 국회 이후 꾸준히 제기됐지만, 워낙 소수인데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뚜렷한 상황이어서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참여정부에 민변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시민단체 사이에서도 민변의 영향력을 인정해 가능한 한 활동의 파트너로 삼고 싶어하는 것도 사실이다. 참여정부와 ‘동반자 관계’라는 ‘오해’를 껄끄러워하는 회원들의 고민도 이런 맥락에서 불거져나왔다.

한 변호사는 “지금은 민변이 과도하게 큰 옷을 입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민변이 마치 ‘개혁의 전위부대’로 비쳐지면서, 역량에 비해 과도한 요구를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사회활동을 하는 전문가 단체로서, 정권에 비판적이고 감시적인 기능을 유지하는 ‘사회단체’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변호사도 “이제는 우리 스스로 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민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기존에 해오던 활동이 의심받고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는 등 그 순수성이 의심받고 있다”며 우려했다. 민변 회원들이 정치권에 대거 진출하면서 지금까지 민변이 해온 활동들이 정치권 진출을 위한 발판 정도로 인식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회칙 개정은 ‘오해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한쪽에서 민변의 정체성이 인권단체와 사회단체 등 ‘운동’적인 면에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 정치적 지향점에 방점을 찍는다. “정치권과의 공조를 통해 적극적인 행보를 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에는 “법률은 법전 안에도 있지만, 법전 밖에도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한 중견 변호사는 “개혁의 시기에 오히려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민변이 국가보안법과 언론관계법, 노동관계법 등 산적한 개혁 입법을 성공적·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민변 국회지부를 만들 정도”의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변호사도 “민변이 지향하는 사회정의 실현과 개혁 과제를 의원들이 잊지 않도록 이끌어주고 비판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외부의 시선이나 문제점과 혼란이 있다고 해서 “수십년만에 찾아온 기회”를 방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심한 조직안위주의라는 말도 덧붙였다.

운동단체냐 개혁의 선봉이냐

정체성 논란이 가열되면서, 한편에서는 민변의 ‘분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목소리도 나온다. 민변 집행부의 한 임원은 “민변 회원 수가 늘면서 회원의 성향도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며 “민변 내부의 정치적 이견이 존재하고, 앞으로는 이로 인한 분란이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전망했다. 또 다른 임원도 “이제는 민변 안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색채들이 계보를 형성해 경쟁을 벌일 수 있고, 나아가서는 발전적으로 분화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민변의 정체성을 규정할 회칙 개정 논의는 결국 ‘뜨거운 감자’로 남아 새롭게 구성된 집행부로 넘어갔다. 민변이 순수 ‘재야단체’를 고집할지, 정치권과 교류의 끈을 유지하며 ‘개혁의 선봉’으로 거듭날지에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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