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정당은 잇달아 당선자 연수를 갖고 당 정체성 찾기에 고심이다. 열린우리당은 ‘실용정당론’을, 한나라당은 ‘따뜻한 대북정책’을 표방하고 있는데…. |
[정당 정체성 찾기 | 한나라당]
‘반공보수’ 외투 벗고 전향적 대북정책… 현실정치에서의 ‘중도우파’역할은 더 지켜봐야 할 듯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4월29·30일 이틀 동안 열린 한나라당 당선자 연찬회의 화두는 ‘변화’였다. 박근혜 대표로부터 어렵게 사지를 넘어온 나머지 당선자들까지, 변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참담한 전망에 공감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을 해산해 과거와 단절한 새로운 당을 만들거나 재창당 수준의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발제(박세일 당선자)는 이런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그 위기감은 총선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총선 전과 다름없는 위기감에…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대북정책이다. 4월30일 연찬회를 마치면서 당선자들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 “따뜻한 대북정책” 개념을 제시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부드럽고 유연해지겠습니다. 경제협력과 인도적 배려를 통해 따뜻한 대북정책을 추진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확고히 한 바탕 위에서 남북한의 평화정착, 공동 번영을 추구하겠습니다.”
토론은 토론대로 하고 으레 좋은 말로 포장해 내놓는 결의문이라면 아예 주목할 가치가 없다. 하지만 이틀간의 분임토의와 전체회의에서는 앞으로 한나라당 대북정책의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장면들이 여러 곳에서 포착됐다.
4월30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박진 의원은 “과거에는 반공보수가 국시였으나 반공이 국가 안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시대는 지났다”며 “우리가 젊은 세대에게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찍힌 이유는 여전히 그 반공주의라는 1차원적 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수적 가치를 가지고 국민을 설득해야지 과거와 같이 반공·반북이라는 냉전논리만으로는 젊은 세대들에게 아무런 호소력이 없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부산에서 당선된 박형준 당선자는 한 걸음 더 나갔다. 박 당선자는 “그동안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은, 북한 정권이 변하지 않음을 전제로 해서 최소한의 통일 정책이 최선이라는 관념과 북한 정권의 붕괴를 통한 흡수 통일 외에는 방안이 없다는 북진 통일 관념이 혼재돼 전향적인 대북 통일 정책을 갖기 힘들었다”며 “핵과 인권침해 등에는 단호해야 하지만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라도 공단개발 투자 등 경제협력과 인도적 지원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과 몇달 전, 전체회의와 성격이 유사한 의원총회였더라면 여기저기서 “집어쳐!” “내려와!” 식의 고함과 야유가 터져나올 법한 상황이었지만 이날 회의는 차분하게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뿐만 아니라 발언자 20여명 중 절반 가까이가 대북관계의 전향적 변화, 국가보안법 개정, 이라크 추가파병 신중 검토 등을 주장해 과거 한나라당 이미지와는 겹쳐지지 않았다. 남경필·원희룡·오세훈 의원 등 과거 ‘한줌’에 불과했던 소장파들의 목소리가 이제는 대세를 장악한 듯 보였다. 당내에서 강경보수로 꼽히는 김용갑·정형근 의원은 회의장에 아예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불출마와 공천 물갈이 속에서 살아남은 몇몇 영남 중진들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북정책과 직결된 국가보안법에 관해서도 변화 양상은 뚜렷했다. 탄핵소추 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기춘 의원은, 가 당선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0%가 개정이 필요하다고 답한 결과를 의식한 듯 “나도 이대로 계속 가야 한다는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만 국가보안법은 국군, 한-미 동맹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기둥이라는 상징성이 있다”며 개정 불가 여론을 환기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재오·심재철 의원 등은 “상징성은 무슨 상징성이냐. 수구 냉전의 산물일 뿐이다. 이미 사문화된 조항은 정리해야 한다. 보수니까 손도 못 댄다는 식은 안 된다”고 반박했다.
조갑제, 한나라당을 비난하다
사실 한나라당의 이런 변화는 연찬회 이전부터 감지됐다. 북한 용천역 참사가 터진 직후 한나라당은 “정부와 대한적십자사, 비정부기구(NGO)의 구호활동을 적극 환영하며 최대한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며 당 차원의 모금운동에 돌입했다. 식량이나 의약품 등 인도적인 지원은 해야 한다고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면서도 투명성 보장이나 ‘전략적 상호주의’(대북지원은 하되 그에 상응하는 긴장완화 조치를 받아내야 한다는 입장)를 앞세워 소극적이었던 과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국회의원과 당선자, 당원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한나라당 차원에서 대북지원 활동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박근혜 대표는 4월8일 외신기자클럽 초청 회견에서 총선이 끝난 뒤 핵문제 등 현안 해결을 위해 방북 추진 의사를 밝혔고, 최근 제기된 ‘대북특사’ 주장에 대해서도 “남북 문제에 있어서는 초당적으로 참여할 의사가 있다”며 적극적인 기대감을 표시했다.
한나라당의 이런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박근혜 대표 체제의 등장과 총선 이후 인적 구성이 대폭 바뀐 한나라당의 전향적인 변화는, 길게 보면 해방 이후 짧게 보더라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면면이 이어져온 반공·반북 노선의 퇴조로 해석된다. 시대가 급격히 변했음에도 두꺼운 냉전의 옷을 벗지 못했던 한나라당이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 패배 이후 정체성과 노선 수정의 필요성을 체감한 것이다.
이틀 동안 열린 당선자 연찬회에서 한나라당의 새로운 정체성과 관련해 보수라는 단어 앞에 장식됐던 수많은 관형어들, 이를테면 개혁적·합리적·선진적·국민적·신(보수) 등은 냉전수구와 부패로 상징되는 한나라당의 ‘과거’와 단절하고 싶어하는 희망의 표현인 셈이다.
한나라당 대북정책이 변화 조짐을 보이자 ‘보수’를 자임해온 냉전세력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극우논객’인 조갑제 발행인은 5월1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한나라당이 따뜻한 대북정책이라고 할 때 그 북은 북한 주민이 아니라 북한 정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며 “이런 대북정책을 한나라당이 추진하겠다면 차라리 햇볕정책 계승을 선언하는 것이 정직하다”고 쏘아붙였다. 그의 비난은 이렇게 이어진다. “우파정당인 한나라당이 대북정책을 이야기하면서 협력과 배려만 강조하고 가장 다급한 대북 문제와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는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아무런 원칙도 천명하지 않은 것은, 이 당의 천박한 지적 수준을 잘 보여준다. 한나라당이 패배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타협해선 안 되는 이념문제에 대해서 좌파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란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듯 하다.”
한나라당이 두꺼운 ‘외투’를 벗으려 하자 그동안 옷을 제대로 껴입지 않아서 문제였다는 식의 엉뚱한 충고를 거둬내고 보면 그의 지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대표 체제가 등장하기 이전의 한나라당이 햇볕정책과 대북지원에 관해 “김정일 정권에만 햇볕을 비추는 정책” “무조건 퍼주기”라고 비난해온 만큼, 남북의 평화정착과 공동 발전을 강조한 최근의 변화는 ‘한나라당이 맞나?’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변화의 씨앗은 한나라당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3월, 당내 전략통으로 인정받는 윤여준 의원(여의도연구소장)의 주도로 뿌려졌다. ‘구원투수’로 박근혜 대표를 선출한 3월23일 임시 전당대회에서 당헌·당규 개정안이 통과됐다. 언론의 조명이 박 대표와 한나라당의 진로에 쏠려 이 개정안은 주목받지 못했지만,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통일정책에서 벗어나 ‘호혜적 상호주의’에 입각한 유연하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한다”는 새 당헌 전문은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따라서 최근의 변화는 이회창 총재와 최병렬 대표 체제에서 중용됐으나 번번이 민정계에 밀려 뜻을 펴지 못했던 윤 의원과 박 대표의 만남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불출마·공천 물갈이·낙선에 따른 강경파들의 퇴조와 박세일·박형준 당선자 등 중도보수를 표방하는 신진세력의 대거 진출 등이 맞물려 변화의 폭과 정도를 증폭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변질 재연될 가능성도 충분해
하지만 대북정책의 변화로 상징되는 한나라당의 ‘중도우파’로의 좌표 이동이, 구체적인 정책 등 현실정치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구현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2002년 방북했던 박 대표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다시 방북할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만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에 대한 태도도 이전과 달라지지 않겠느냐”며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이 증대되는 등 남북관계도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김용갑·정형근 의원 등 이른바 ‘정통보수’를 자처하는 의원들이 당장은 당 안팎의 전반적인 변화와 개혁 움직임에 말을 아끼고 있지만,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본격적인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있다. 예전만큼 막강한 세는 아니지만 이들은 여전히 한나라당의 ‘본류’임을 자처하고 있다. 영남권의 한 중진 의원은 “우리쪽 분위기는 좋지 않은데 일단 어떻게 하는지 참고 지켜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쪽에서는 “헤게모니가 이미 넘어왔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쪽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돌발 변수가 많은 남북관계의 특성상 구체적인 사안에 들어가면 익숙했던 태도로 되돌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근혜 대표 체제의 ‘호혜적 상호주의’가 이회창 총재·최병렬 대표 체제의 ‘전략적 상호주의’에 비해 평화공존과 경제협력에 적극성을 띠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단호하고 비판해야 할 사안과 협력·상생해야 할 사안을 구별해 선택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대북 압박 성격의 경제봉쇄 정책이란 카드를 집어들 경우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실제 16대 국회에서 이 문제가 논란이 됐을 때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은 대부분 “당근과 채찍을 병행해야 한다”면서 강경책을 주문했었다.
국가보안법 개정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어떤 조항을 왜 어떻게 개정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각각의 편차가 적지 않다. 여론에 떼밀려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실효성에 의문이 들 정도로 변질을 가했던 집요함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도 변화를 꿈꾸는 한나라당으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보수를 보수라 부르지 못하고… |
“부정적 이미지만 준다”는 지적 둘러싸고 당내 논란… 연찬회 결의문서도 ‘보수’ 표현 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許)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한때 유행했던 농담 같은 상황이 한나라당에서 벌어지고 있다. 4월29·30일 열린 당선자 연찬회에서 “국민들이 보수 하면 수구 기득권 세력을 떠올리는 상황에서 굳이 보수임을 자처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게 나온 것이다.
심재철 의원은 “우리 입으로는 보수라는 말을 안 썼으면 한다. 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정적이다. 합리적 실용주의를 추구한다고 에둘러 가는 것이 어떨까. 김태촌, 조양은은 아무리 회개해도 조폭이라는 이미지로 낙인찍혀 있다”고 말했다. 권철현 의원은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처럼 유신이라는 의미가 좋게 받아들여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나쁜 개념이다. 사전적인 개념과 받아들이는 개념이 다른 상황에서 보수를 외치는 것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기득권 세력임을 자인하는 꼴”이라며 보수 폐기를 주장했다.
이에 반해 남경필·원희룡·권영세 의원 등 당내 개혁 소장파로 꼽히는 이들은 “중도보수라는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남 의원은 “한나라당이 그동안 보여준 보수는 부패와 냉전에 매몰된 수구보수였다”며 “지금이야말로 생산적인 이념 논쟁을 통해 자기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열린우리당이 ‘진보부터 보수까지 아우르는 대중적인 실용주의’ 정당을 표방하는 최근 행보를 보면 16대 국회에서 거대한 몸집으로 기우뚱거렸던 한나라당과 똑같은 꼴”이라며 “현재의 한나라당이 중도보수로 스펙트럼 차이가 적은 만큼 분명한 이념적 포지셔닝은 ‘중원’을 지키는 동시에 열린우리당을 정책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연찬회가 끝나고 발표된 당선자들의 결의문에는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선진화의 길로 가겠다”는 방향을 제시했을 뿐, 그 어디에서도 보수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수정당으로 평가받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굳이 보수정당임을 표방하더니, 중도보수·중도우파로 방향 선회를 하려는 마당에 보수정당임을 내세우는 데에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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