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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파병 ‘새 해법’ 찾아라

등록 2004-04-29 00:00 수정 2020-05-03 04:23

미 · 영 ‘유엔 강화’ 선회 등 정세변화… 정부 · 국회 ‘위기관리’ 능력 시험대에

파병 문제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가 변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권은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우리 정부와 국회가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에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라크 사태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가 바뀐데다 부대 파견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이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제해결 능력이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원칙적 파병, 변수가 너무 많다

파병 문제와 관련한 우리 정부의 현재까지 공식 입장은 기존 추가파병 원칙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한국을 찾은 딕 체니 미국 부통령과의 4월16일 회담에서 “이라크 파병은 이미 정해진 정부의 원칙에 따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체니 부통령은 이에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주무부처인 국방부도 기존의 일정 고수 방침을 거듭 밝혔다. 국방부의 설명에 따르면 4월29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거쳐 파병지를 결정하겠다고 한다. 파병지로는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자치지역인 에르빌과 술라이마니야가 검토되고 있다. 국방부 당국자들은 5월 중 선박으로 장비를 먼저 실어보내고 6월 초순에 선발대, 6월 중·하순에는 본대를 보낸다는 일정을 밝혔다.

정부 입장은 국제사회의 시선, 좀더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입장을 강하게 의식한 결과로 분석된다. 스페인을 비롯해 도미니카, 온두라스가 철군 방침을 결정했고 타이도 자국군이 공격당할 경우 철군을 검토하겠다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 정부의 선택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특히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규모인 3천여명의 병력 파견을 예정하고 있어, 한국의 선택 여하에 따라 철군 도미노가 확산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은 4월16일 “한국 정부는 (파병에) 굳건하며 (한국의) 국회는 당초 찬성 155, 반대 50으로 파병안에 동의했다”며 “(한국의 새 국회 구성과 관계없이)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게 아니냐”라고 자신들의 희망을 밝혔다. 우리 정부의 한 당국자도 “이라크 상황이 다소 어려워졌다고 이미 결정한 파병을 철회하면 국제사회가 한국을 어떻게 보겠느냐”며 “그 순간 한-미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최근의 변화된 정세에 눈감은 것이란 점에서 아무래도 궁색해 보인다.

정부는 이와 관련해 안전 제일을 내세우며 저항세력이 약한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자치지역을 선택한 상태다. 그러나 이라크 국민들이 싫어하는 점령군의 일원으로 파병하는 데 따른 부담은 여전하다. 또한 지난해의 전쟁터가 아니었기에 전후 복구와 재건을 할 일도, 대민 봉사의 절박함도 없는 지역에서 한국군이 3천명씩이나 가서 뭘 할지도 불투명한 상태다. 북부 에르빌이나 술라이마니야 두곳 다 미군이 100여명 정도만 주둔하던 ‘한가로운’ 곳이다.

이와 함께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웃 터키와 이란 등의 반발도 변수이다. 쿠르드인의 친미 성향 때문에 당장은 테러 위험이 없어 보이지만 이라크 상황이 전면적인 내전으로 치달을 경우, 한국군이 쿠르드족 보호세력으로 오인되면서 이라크 저항세력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미국의 요구에도 부분적 변화 감지

국내 정치 측면에선 17대 총선 결과로 새로운 국회가 곧 구성된다는 사정이 현재 정부 방침에 반영되지 않은 상태다. 총선 뒤 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7대 국회의원 당선자의 46.1%가 이라크 추가파병에 대해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애초 결정대로 파병해야 한다는 당선자는 44.2%였다. 국회의원 임기가 바뀌더라도 국회 결정의 연속성 자체는 존중돼야겠지만, 2월 국회 때의 파병 찬성 155표 대 반대 50표와는 너무 크게 구도가 바뀐 것이다.

이런 결과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파병에 부정적 견해를 밝혔던 당선자들이 자신을 밀어준 총선 민의를 대변해야 하는 점에서 대의정치의 숙명과 관련된 문제이다. 스페인 총선에서 파병부대 철군을 주장했던 야당이 집권하자마자 자국군의 철병에 들어간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정부 당국자들에 따르면 최근 미국의 요구에도 부분적인 변화가 감지된다고 한다. 한 당국자는 “미국도 이제는 한국군이 와서 치안유지 활동, 즉 저항세력 소탕작전에 참여하기보다는 뭘 하든 관계없이 그저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구색만 갖춰주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으로 안다”고 말했다. 미국이 이라크 저항세력의 반격과 국제적인 철군 도미노 바람에 샌드위치된 가운데, 한국의 역할에 대한 기대수준이 현격히 떨어진 듯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결과는 우리 정부가 그동안 나름대로 지연 행보를 구사하면서 시간을 번 결과, 거꾸로 우리 정부의 운신의 폭이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애초 파병지로 예정했던 키르쿠크 지역에서 부대 지휘권 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한국쪽이 발을 뺀 것이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모양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국회 과반수를 차지해 명실상부한 여당이 된 열린우리당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152명의 국회의원 당선자 가운데 파병 재검토 입장을 밝혀온 인사들이 상당수에 이르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4월26~28일 2박3일간 당선자 연수 기간에 추가파병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17대 국회가 개원하려면 6월5일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추가파병은 당장 새롭게 검토해야 할 시급성이 있기 때문에 토론 의제에 포함됐다.

김근태 원내대표는 당론 마련에 앞서 개인 의견이라는 단서를 붙여 ‘6월 이라크 임시정부 수립 뒤로 파병연기론’을 펴고 있다. 김 대표는 기자의 물음에 “지금처럼 미군 주도의 다국적군 자격으로, 미 군정과 연계하는 형식으로 파병하는 것보다는 어쨌든 이라크인에 의한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그 정부와 협의해 파병하는 형식을 취한다면 한결 모양이 낫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김근태 “6월 임정 수립 뒤로 연기하자”

김 대표의 주장은 손바닥을 뒤집듯 파병 철회를 선택하긴 어렵다는 현실론을 전제로 한, 차선의 명분중시론으로 해석된다. 이라크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재건 지원에 나선다면 한국군이 이라크 저항세력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겠냐는 이야기다.

김 대표는 이어 파병 시기와 관련해선 “기왕에 늦은 것이니 한달 정도 더 늦추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밝히는 △5월 중 장비 선적 △6월 중 부대 파견 등의 일정에 동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해법에는 한계도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즉, 미국이 주도해 구성하는 임시정부란 게 어차피 꼭두각시 정권으로 간주돼 이라크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기 어렵지 않겠냐는 회의적 전망 때문이다. 다만 열린우리당 관계자들은 이 제안이 아이디어 차원의 문제제기인 만큼 토론 과정에서 좀더 적절하고 구체적인 해법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논의의 여지를 남겼다.

민주노동당은 파병 철회를 위한 열린우리당, 한나라당과의 3당 대표 회담을 제안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또한 17대 국회가 개원하면 곧바로 파병 철회 동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파병철회론은 애초 파병 결정 자체가 잘못된 것인 만큼 이를 과감하게 원점으로 돌리자는 이야기다. 명분상 가장 선명하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파병 철회에 따른 한-미 관계의 악화와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가 궁색한 처지에 빠질 가능성에 대한 보완책은 다소 막연한 상태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쨌든 파병을 한번 결정한 바 있는 정부가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어려운 제안인 셈이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3당으로 비약했다고는 하나, 의석으로는 10석의 소수 야당밖에 안 되는 점도 이 주장에 ‘현실적 힘’이 실렸다고 보기 어렵다.

부시 유엔 역할 강화로 선회

이런 가운데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라크 전쟁 주도국인 미국과 영국의 최근 기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와 관심을 끈다. 미국 부시 행정부가 그동안의 일방주의 또는 패권주의적 접근에 따른 한계를 인정하고 유엔의 역할을 강화하는 새로운 해법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점에 맞춰 우리의 전략을 재조정하자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부시 미국 대통령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4월16일 워싱턴 정상회담을 가졌다. 부시 대통령은 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라크다르 브라히미 유엔 특사의 제안을 환영한다”며 “그는 이라크 국민에게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과도정부 수립 방안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과도정부 구성은 유엔이 맡게 되며, 브라히미 특사가 이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회담의 결과는 부시 대통령이 지금까지 이라크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강하게 움켜쥐려 했던 것에 비춰보면 상당한 전략 변화로 평가됐다. 는 4월17일치 사설에서 “부시 대통령이 유엔의 도움 없이는 이라크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브라히미 유엔 특사의 제안은 이라크 내 각 정파들과의 협의를 거쳐 미국 주도 연합군을 대체할 과도정부를 설립하고 내년 1월로 예정된 총선을 관리할 자문회의를 구성한다는 게 뼈대이다. 과도정부 각료는 유엔이 미국과 협의해서 지명하며, 이슬람 시아파·수니파, 쿠르드족 등 주요 정파를 모두 참여시킨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6월30일 주권이양과 동시에 기존의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는 해체된다. 미국은 그동안 7월1일 이후 미 군정이 임명한 과도통치위원회를 확대 개편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지만 어쨌든 과도정부의 정통성이 좀더 높아질 여지가 생긴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유엔 중심으로 과도정부가 구성된다면 이라크에 파견되는 외국 군대도 지금처럼 미국 중심의 점령군이 아니라 유엔 평화유지군 성격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점령군, 즉 이라크인이 볼 때 침략군대에 협력하는 형태로 한국군이 가선 곤란하되 유엔 평화유지군 형태, 그것도 이라크인들이 동의하는 형태라면 지금에 비해 파병에 따른 부담이 훨씬 줄어들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파병 시기도 기왕에 늦은 만큼 정세 변화를 관찰하면서 한달쯤 더 늦추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선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도 최근 “유엔이 전면에 나설 경우 이라크에서 철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일방주의가 수정될 경우 국제사회의 여론이 바뀔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이 제안에도 나름의 불확실성은 담겼다. 부시 행정부가 정책 선회 가능성은 밝혔지만, 미국의 주도권을 전면적으로 내던질지, 따라서 이라크인들의 불신을 깔끔히 해소할 수 있을지가 아직 분명하진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권을 포기한다면 그동안 눈독을 들여온 전후 복구사업, 즉 석유개발 이권 따위도 함께 내던지게 돼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다.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현재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멤버들과 나름대로 교감하는 그룹이라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민간의 제안과 정치권의 논의들이 정부의 최종 정책 결정과 접점을 찾을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NSC 관계자는 “4월29일 파병 대상지를 결정한 다음 현지에 협조단을 다시 파견하고, 그 활동결과를 토대로 파병 일정을 논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방부가 말하는 △5월 중 장비 선적 △6월 중 본대 파견 등과는 달리, 일정을 지연시키면서 ‘모호성의 행보’를 좀더 길게 가져갈 듯한 분위기를 내비친 셈이다.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한 시점

어쨌든 열린우리당의 경우, 당선자 연수회에 이어 국회 개원준비위원회 차원에서 통일외교분과를 만든 뒤, 이 분과를 통해 파병 문제에 대한 새로운 당론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새로운 해법이 마련되면 정부와 당정협의를 하게 된다. 파병철회론의 민주노동당, 파병 재검토론에 선 민주당도 곧 논의를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정부와 정치권이 파병 문제와 관련한 새로운 해법을 마련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명분이냐 국익이냐의 단순 논쟁을 뛰어넘어 좀더 구체적이며 실용적인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동의하기 힘든 ‘파견 동의안’


‘전후 이라크’‘미국 주도의 세계 평화’ 조항 무색… 파병 명분 나아져도 수정 필요
국회가 이라크 추가파병을 재검토할 경우, 일차적으로는 3월12일 16대 국회가 본회의를 통해 의결한 ‘국군부대의 이라크 추가파견 동의안’이 변화된 정세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초점이 될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당시 동의안은 제안 이유에서 “전후 이라크의 신속한 평화 정착과 재건 지원을 위해”라고 밝혔다. 그 중 ‘전후 이라크’가 논란이 될 수 있다. 현재 정부가 검토 중인 파병대상지인 이라크 북부 쿠드드족 자치지역, 즉 에르빌과 술라이마니야의 경우는 엄밀히 따져 ‘전후 이라크’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두 지역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따른 교전지역이 아니어서 이에 따른 재건 수요는 없는 상태다. 다만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의 피해가 일부 남아 있지만, 이 전쟁도 국회 동의안이 규정한 전쟁의 범주에 넣는 데는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지적된다.
두 번째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적 연대에 동참함으로써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함”이라는 대목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재 미군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닥친 점, 이에 따라 중동 정세의 불안요인이 되는 점으로 미뤄볼 때 ‘세계 평화’ 차원에서 이해해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부시 미국 대통령과 블레어 영국 총리의 최근 회담 합의처럼 ‘유엔 역할 강화 해법’이 실제 추진될 경우에도 동의안의 수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는 파병의 명분이 나아지는 쪽으로의 상황 전개이긴 하지만, 어쨌든 형식과 내용을 맞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제안에 따라 파병 철회 동의안을 국회가 심의한다면 기존 동의안의 문구를 하나씩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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