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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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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투쟁을 넘어 사회개혁으로

등록 2004-04-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임단협 앞두고 ‘사회공헌기금’ 조성 제출한 완성차 노조… 순이익의 5%를 비정규직 지원 등에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5월 임단협 교섭을 앞두고 현대차·기아차·쌍용차·GM대우차 등 4개 완성차 노동조합이 공동 요구안으로 내놓은 ‘사회공헌기금’이 자동차 업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4사 완성차 노조는 최근 “매년 기업 순이익의 5%를 ‘산업발전 및 사회공헌기금’으로 조성하자”는 임단협 안을 회사쪽에 각각 제출했다.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개별 사업장의 임금투쟁을 뛰어넘어 사회공헌기금을 만들자고 제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고용 비중 높은 자동차 산업의 책무

4사 완성차 노조의 상급단체인 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에 따르면, 이 기금은 노사 합의를 통해 조성되며 크게 △자동차 산업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해소 △빈민층 사회복지 등에 쓰일 예정이다. 산업발전과 비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을 위해서 포괄적으로 쓴다는 것이다. 금속연맹 조건준 정책국장은 “회사쪽이, 그동안 내온 수재민 성금이나 불우이웃 성금도 이 기금에서 충당하자고 나온다면 그 부분도 노사가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금 용도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완성차 4사의 2003년 영업실적 기준으로 볼 때 순이익의 5%는 약 1781억원에 달한다.

‘순이익의 5%’는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조 국장은 “현재 순이익은 ‘3(주주배당금):3(노동자 성과급):4(기업 재투자 비용)’로 분배되고 있다”며 “사회공헌기금 출연에 따른 임금동결 또는 임금인하 논란을 빚지 않고서 사용자와 노동자, 주주가 공동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적당한 선을 5%로 잡았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쓰겠으니 돈 내놓으라고 회사쪽에 요구하는 건 문제가 있다. 임금투쟁 때처럼 몇%를 던져놓고 쟁취하는 식으로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하겠다는 건 아니다”며 “순이익을 못 내는 회사는 5%에 연연하지 않고 동종 기업에 비례해 적정한 규모를 조성하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왜 사회공헌기금을 요구하고 나선 것일까? 노조쪽의 설명은 간단하다. 자동차 회사의 기업이익은 기업 내 정규직 노동자와 경영진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품업체와 사내하청·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소비자인 국민들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 특히 자동차 산업은 고용 비중과 산업 연관성이 크기 때문에 사회적 책무 차원에서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해야 한다는 논리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에서 고용 규모는 부품업체까지 포함해 직접 종사자가 27만명이고, 정비·고무·화학 등 전후방 연관산업까지 모두 합치면 17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노조는 또 그동안 기업들이 ‘차떼기’로 내놓은 정치자금을 없애고 불필요한 접대비를 줄이면 기업의 총비용 증가 없이 기금을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스웨덴의 경우 국가가 고이윤 사업장에서 세금을 더 거둬 저이윤 기업의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연대임금 정책을 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조합이 기업의 순이익 분배에 직접 개입해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공헌기금은 임금투쟁에 갇힌 기업 울타리를 넘어 노동조합이 사회개혁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임금 축소는 아니다”

이에 대해 자동차 회사쪽은 “대공장 노조 이기주의라는 사회적 비난 여론 속에서 정규직 노동조합만 성과급을 가져가기 미안하니까 여론 무마 차원에서 사회공헌기금을 갑자기 꺼낸 것”이라며 노조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나아가 “자동차 산업의 경제 파급효과가 크다면 사회공헌기금을 요구할 게 아니라, 오히려 노조가 생산성을 더 높여 자동차 공장이 외국으로 떠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자동차 노조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기업 노조 집단 이기주의’ 발언과 비정규직 대비 상대적 고임금 등으로 인해 ‘노동 귀족’이라는 여론 공세에 직면해 있다. 조건준 정책국장은 “노동 귀족이라는 몰매를 맞은 뒤 국면 전환을 위해 우리가 사회공헌기금을 갑자기 꺼낸 건 아니다”며 “예년과 같은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칫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노동운동의 장기 전략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회공헌기금이 등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사회공헌기금은 노사간 헤게모니를 둘러싼 여론 싸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실 일부 현대자동차 노동자는 뼈빠지게 잔업·특근해서 번 임금인데도, 명절 때 고향 친구들한테서 “1년에 연봉 6천만원 받는다며? 술 좀 사라. 마을회관 짓는데 돈 좀 내놔라. 그렇게 많이 받으면서도 만날 임금인상 투쟁하고 파업하냐?”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그래서 차라리 임금이 덜 오르더라도 욕 안 먹고 세상 편하게 살고 싶다는 조합원도 있다고 한다.

자동차 회사쪽은 또 “기업이 신경써야 할 자동차 산업 발전을 왜 노동조합이 고민하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차 노조 조강훈 부장은 “국내 완성차 업체의 해외투자와 공장 해외이전이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다”며 “기금을 자동차 산업발전에 사용한다면 주로 고용에 대한 연구·조사에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 생산 같은 연구가 아니라 △직무순환·전환배치에 대한 노사 공동 프로젝트 △자동차 산업 노동자 고령화 문제 △교대제 △근골격계 질환 문제 실태조사 등에 쓴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노조 스스로 사회공헌기금을 의제로 제시한 만큼 임금인상은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노동조합부터 먼저 양보해 임금을 삭감한 뒤 그 부분을 비정규직한테 나눠주겠다고 선언하는 게 순서에 맞고, 그래야 기금 출연에 나서도록 사용자를 압박할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그러나 4사 완성차 노조는 사회공헌기금 조성과 별개로 올해 약 10.5%의 임금인상안을 제시하고 있다. 금속연맹 조 국장은 “정규직 임금이 더 많으니 그 돈의 일부를 비정규직을 위해 쓰자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노조가 먼저 임금을 깎거나 동결하는 방식은 오직 임금삭감 주장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노조가 얼마 부담할 테니 회사도 내라고 하면 기금 조성이 임금 동결분을 이용한 형태로 왜곡되고, 기업의 사회적 책무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쌍용차노조 홍봉석 사무국장도 “순이익이 발생한다고 해서 꼭 그만큼 임금인상이 이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공헌기금을 요구한다고 해서 기존 임금이 축소돼야 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완성차 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해 성과급 등에서 각자 1만원씩을 떼내 비정규직 투쟁사업에 지원하고 있다.

성패는 사회적 압박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협상 과정에서 회사쪽이 “임금인상 요구를 백지화하거나 인상폭을 축소하면 사회공헌기금을 수용할 수 있다”며 조건을 붙일 가능성도 높다. 임금인상과 사회공헌기금을 맞바꾸자는 논리다. 현대차노조 조강훈 부장은 “그런 상황에 대비해 노조 내부적으로 어떤 구상을 갖고 있긴 하지만, 결국 노사간 협상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사회공헌기금 조성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회사의 잉여금은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것이지 노조가 간섭할 문제도 아니고 의무 교섭대상도 아니다”고 일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건준 국장은 “상대방이 있는 협상이라서 실현 여부를 장담할 수 없고, 순이익의 5%가 될지 1%로 줄어들지 모르지만 관건은 기업의 지불능력이 아니라 노사간 발상의 전환”이라며 “그래서 ‘어디에 쓸 테니 이만큼 내놓아라’고 하지 않고 같이 내고 사용처도 같이 논의하자고 제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노조가 올해는 일단 밀어붙여 보고 안 되면 내년으로 넘긴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현대차노조 조강훈 부장은 “사회공헌기금은 노조가 올 임단협에서 임금인상 등 다른 요구안보다 더 적극적으로 가져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회공헌기금 요구에 대해 기아자동차는 공문을 보내 “교섭대상이 아니므로 안건에서 빼달라”고 노조에 요청했고, 현대자동차는 “앞으로 임단협 과정에서 두고 보자”고 말했다. 조건준 국장은 “노동조합과 오랫동안 상대해온 개별 사업장은 경총의 방침과 약간 달리,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 게 바람직한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사회공헌기금을 무조건 못 받아들이겠다고 나오기보다는 ‘수세적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성패는 사회적 압박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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