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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입 다물고 조심조심…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라크 상황 악화로 진퇴양난에 빠진 정부… “조사단 귀국하면 논의 재개될 것”

김성걸 기자/ 한겨레 정치부 skkim@hani.co.kr

말 많던 이라크 파병 문제가 또다시 불거지고 있으나 정부는 진퇴양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파병 문제에 대해 ‘당연히 파병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이라크 안전대책 강화에 진땀

지난 4월9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 뒤 청와대 관계자는 “이라크 파병 문제는 오해의 소지가 높아서 언급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라크 상황을 예의주시한다고 하면 이라크 파병에 대해 고민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고, 파병을 한다고 하면 미국의 입장이나 챙긴다는 해석을 낳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이라크 파병에 대해 언급을 했던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과 반기문 외교부 장관에게서도 일부 감지된다. 고 대행은 같은 날 오후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에서 국방부 새해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라크 파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병부대의 안전”이라며 “이라크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만큼 파병부대의 안전대책 마련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파병 안전’을 강조했다. 반 장관도 이날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대해 “이라크 내 한국민의 안전 문제와 테러 대비책에 대한 논의만 있었고 파병에 관한 논의는 없었다”며, 민감한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는 이미 파병에 대해 여러 번 입장을 밝혔다”고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다만 실무부서인 국방부는 이날 업무보고에서 “파병을 차질 없이 추진해 오는 6월까지 파병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정부 안팎에서는 “국방부는 이미 결정된 파병을 추진할 수 있지만 파병 자체를 왈가왈부할 수 없다”며 “국방부 입장이 정부 입장을 대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이라크 파병은 국내에서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정부는 이제 이 문제를 쉽사리 건드리려 하지 않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자세의 변화는 이라크 현지 상황의 급격한 악화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 미군은 이슬람 수니파의 저항을 막아왔지만, 이제는 다수파인 시아파가 새로 가담함으로써 전국에 걸친 유혈충돌 사태를 맞고 있다. 이런 민중봉기적 양상에다 곳곳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인질극이 번지면서 이라크는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합동참모본부는 지난 4월7일 이라크에 파병된 서희(공병)·제마(의무)부대에 내린 지시에서 “전반적인 (이라크의) 치안 상황이 불안하다”고 규정하고 파병 장병들에 대한 주의를 강조했다. 합참은 이 지시에서 “최근 이라크 내 동맹군에 대한 적대 행위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위협이 고조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이라크 파병부대의 (삼각형)보고 및 상황 유지 체제 강화 (삼각형)장병의 영외 활동 계속 금지를 시달했다.

또 정부도 지난 9일 청와대에서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어 이날부터 이라크를 ‘특정국가’로 지정해 국민들의 이라크 방문이나 여행을 사실상 금지하기로 했다. 정부는 또 이라크에 머물고 있는 비필수 요원에 대해서는 조속한 대피와 철수를 유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우려 섞인 대응이 파병 철회로 이어질 것이라는 해석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이미 미국과 국제사회에 파병을 약속한 만큼 국제사회의 신뢰도와 한-미 동맹을 감안할 때 지금에 와서 국가간의 약속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국방부가 차질 없는 파병을 다짐하고, 9일 밤 13명으로 구성된 군 조사단을 이라크 현지로 보낸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국군 파병에 터키 심기 불편

또 다른 이유는 이라크 전역으로 번지는 저항의 불길이 한국군이 파병 예정지로 잡고 있는 북부 에르빌주와 술라이마니야주에서는 아직 잠잠하다는 판단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정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 북부 지역은 안전한 곳으로 판단된다”며 “국방부는 다만 국내에서 힘을 얻고 있는 파병 재검토 여론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북부 지역이라고 해서 계속 안전한 곳은 아니다. 합참은 이라크 파병 자이툰 부대의 평화재건 활동과 파병 장병의 안전을 위해 이라크 파병 예정지를 키르쿠크주에서 북부 지역 에르빌주 또는 술라이마니야주로 옮겼지만, 북부 지역 역시 위험요소가 잠복하고 있다.

북부 지역의 가장 큰 위험요소로는 쿠르드족 문제가 꼽힌다. 쿠르드족은 미군의 도움을 얻어 북부 지역에서 자치를 누리고 있지만 자신들의 소원인 국가 독립을 추진할 경우 아랍족 등 다른 민족의 반발로 극심한 인종분쟁이 예상된다. 또 쿠르드족 문제에 민감한 인근의 터키와 이란까지 개입하는 국제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이럴 경우 한국은 어렵사리 파병을 해놓고서도 중동 지역에서 국가적 신뢰만 상실하는 소탐대실의 꼴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터키는 한국의 북부 지역 파병 결정 뒤 한국이 터키에 2년 전부터 판매를 희망하던 155mm 자주포 포탄에 대해 “재래식 포탄으로도 가능하다”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 정부 관계자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외교적 언사여서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지만, 한국군 파병 추진에 따른 터키의 태도가 주목된다”고 말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라크에서 활동 중인 현지 조사단은 바그다드 연합합동군사령부(CJTF-7)와 에르빌주, 술라이마니야주를 돌면서 최종 파병지를 선정하고 숙영지 여건, 미군과의 협조관계 등을 파악할 것”이라며 “그러나 이라크 현지 치안정세와 주민여론 등도 함께 조사해 이들이 귀국하는 19일쯤에는 파병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다시 제기되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중동의 화약고, 쿠르드족


한국군이 이라크 파병 지역을 키르쿠크주에서 북부 에르빌주 또는 술라이마니야주 가운데 한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에는 한국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쿠르드족 문제가 급부상하고 있다.
이미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쿠르드족과 다른 민족 사이의 충돌이 있었다. 지난 2월1일 에르빌에 있는 쿠르드족의 양대 정당인 쿠르드민주당(KDP)과 쿠르드애국전선(PUK)의 두 곳에 자살폭탄 공격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56명의 목숨을 빼앗고 200여명이 다치는 대규모 참극이 있었다. 희생자는 두 정당의 주요 간부였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쿠르드족 50여명이 지난달 키르쿠크 시내 터키계 투르크멘족 정당인 이라크투르크멘전선(FIT)의 사무실에 몰려가 집기와 유리창 등을 부수며 난동을 피웠다. 그에 앞서 나흘 전에도 쿠르드족 수십명은 키르쿠크의 투르크멘족 정당 건물에 들이닥쳐 컴퓨터 등을 파괴하고 투르크멘족의 가게를 부숴 2명이 다쳤다. 이라크 임시헌법 제정을 앞두고 투르크멘족이 바그다드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단식농성 등을 벌이자, 반대 입장에 선 쿠르드족이 불만을 폭발한 것이다.
쿠르드족의 독립 요구는 비원에 가깝다. 이라크·이란·터키·아르메니아·시리아 등 5개국에 걸쳐 있는 쿠르드족은 260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유랑민족이다. 이 민족은 수천년 동안 쿠르디스탄을 꿈꿨지만, 강대국과 주변국의 배신으로 번번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은 쿠르드족의 민족 자결권을 인정했고, 세브르조약(1920)에 명문화됐지만 국가 형성에 실패했다. 쿠르드족은 “쿠르드족한테 친구는 없다. 산이 있을 뿐이다”라는 속담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러나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에 대해 인근 국가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터키는 인구의 20%(1290만명)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의 독립 움직임에 대해 터키 국가의 일체성을 해치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터키는 미국이 쿠르드족을 이용하는 이라크 전쟁 계획을 수립하자 강력한 외교적 항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터키는 1924년 쿠르드의 문화·언어·지명 등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쿠르드족 게릴라(PKK)와의 15년 투쟁에서 3만7천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사이 터키 쿠르드족은 1984년 분리독립 투쟁을 시작한 이래 혹독한 탄압을 받아 3만명이 살해되고 몇십만명이 집을 잃었다.
반면 터키의 직·간접적인 압박을 받아온 이라크 내 쿠르드족도 터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터키는 쿠르드족을 견제하고자 이라크 내 터키계인 투르크멘족을 지원해왔다. 이라크 전쟁 뒤 미국이 터키군을 이라크 북부에 배치하려 하자 쿠르드족은 완강히 반대했으며 결국 배치 계획은 무산됐다.
쿠르드족에 대한 이라크 정부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라크 쿠르드족이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에 이란의 지원을 받아 대이라크 반정부 투쟁을 벌이자 독가스를 사용해 5천여명을 살해하는 ‘할라비아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처럼 쿠르드족 문제는 중동 국가들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해 팔레스타인 문제에 못지않은 중동의 또 다른 화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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